세계를 속인 거짓말/동방견문록

중국 여행 없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3)

Que sais 2020. 11. 30.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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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인의 아시아 여행>

13세기로마 교황청몽골과 동맹을 맺고자 카라코룸으로 사절단을 보냈다. 여기에는 종교와 정치적 목적은 물론 비, 향료, 같은 재물이 있는 동방과의 무역로개척하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다. 마르코 폴로󰡔동방견문록󰡕이 이들에게 많은 지식과 정보를 주는 귀한 자료가 되었음은 자명한 이치다.

 

사실 폴로 가족이 아시아를 처음으로 여행한 유럽인은 아니다. 가장 잘 알려진 사람은 프란체스코회 수도사 플라노 카르피니(Plano Carpini, 12001252)로 이후 그는 󰡔카르피니의 몽골 여행기󰡕를 남겼다. 그는 교황 이노센트4(Innocent)의 위임을 받아 몽골군기독교 세계를 침입한 것을 항의하고 또한 몽골인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12454월 부활절프랑스의 리옹출발했다. 이후 폴란드와 러시아를 거쳐 1246722일 목적지인 몽골 궁전에 도착한 그는 황제인 쿠유크몽골 제3대 황제 오고타이의 아들정종에게 친서를 전달했다. 물론 그는 몽골제국과 교황과의 친선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유럽인으로는 처음으로 몽골의 풍습과 생활 등 자신이 보고 들은 경험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가 시베리아의 스텝 지방에 대해 적은 것을 보면 새로운 지역에 얼마나 놀랐는지 알 수 있지만 자신이 목격한 것을 상세하게 적었다.

 

일부 지역에는 약간의 나무가 자라지만 그 밖의 지역들에는 나무가 전혀 없다. 때문에 사람들은 가축의 배설물을 태워서 난방하고 고기를 익혀 먹는다. 날씨 역시 매우 혹독하다. 한여름에도 천둥 번개가 치고 많은 이 내리며 우박도 자주 떨어진다. 여름철에 날이 아주 덥다가도 갑자기 기온이 곤두박질쳐 견딜 수 없이 추워진다.’

 

그가 목격한 몽골인에 대한 묘사도 정확하다.

 

그들은 잔가지들과 가로대들을 정교하게 엮어서 천막처럼 둥글게 만든 집에서 생활한다. 그 꼭대기에는 빛이 들어오고 연기가 빠져나갈 수 있는 창문이 하나 있다. 집 안에서 늘 불을 피우기 때문이다. 벽은 펠트로 덮여 있으며 문도 펠트로 만들어졌다. 천막의 일부해체와 조립이 간단하며 가축들의 등에 싣고 이동하기도 한다. 해체할 수 없는 것은 마차에 싣고 다닌다. 그들은 어디를 가든 즉 전장으로 가든 그밖의 곳으로 가든 집을 갖고 다닌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 세상 어느 곳 사람들보다 더 많은 말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카르피니쿠유크가 있는 카라코룸(카라코품, Kharakorum, 몽골의 태종정종헌종 시대의 수도)을 방문하지는 못했지만 쿠유크기독교인들의 호전적인 행위를 신랄하게 비난하면서 교황청에 전 유럽이 자신에게 복종할 것을 요구하며 유럽의 왕들과 교황에게 카라코룸의 궁전에서 자신을 알현하라고 명령했다. 바티칸의 문서보관실에 보관된 서신의 서문은 다음과 같다.

 

카라코쿰 복원도

영원한 천상의 힘을 통해 전체 위대한 민족의 대양과 같은 칸의 명령.’

 

비록 기독교를 전파하는 데는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카르피니의 보고서는 유럽에 동방을 알린 최초의 문서가 되었다. 6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한 프랑스의 루이9(재위 12261270)도 교황의 후원 아래 도미니쿠스회 수사 앙드레 드 롱쥐모몽골로 보냈고, 1252 프란체스코회 수도사 기욤 드 루브룩(Guillaume de Rubrouck)카라코룸파견했다.

특히 드 루브룩은 루이9세로부터 기독교 국가로 알려진 중세 서양에서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강한 기독교 나라를 건설했다고 알려진 전설상의 왕 프레스터 존(Prester John)의 나라를 찾아내고 당대 세계 최강의 제국인 몽골과 군사동맹을 맺고 그리스도교를 선교하라는 명을 받았다. 그도 카르피니가 이동한 경로와 거의 비슷하게 나아갔고 중앙아시아를 횡단해 카라코룸에 도착했다.

그는 카르피니가 수집한 정보를 새로 추가하지는 못했지만 다소 과학적인 식견을 갖고 자신이 목격한 카스피 해에 대해 적었다. 카스피 해가 당대의 지리학자들이 믿었던 것처럼 흑해의 일부가 아니라 내륙의 바다라는 것이다. 또한 그는 카라코룸의 동쪽에 있는 한 나라에 관한 이야기를 적었다.

 

예전 사람들은 바로 대중국 사람들을 세레스라고 부른 것 같다. 품질이 가장 좋은 비단이 바로 그들에게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의 기행문 󰡔몽골제국 여행기󰡕는 영국의 중세 철학자로 잘 알려진 로저 베이컨의 글에도 인용되고 있으며 중세시대아시아, 특히 지금 흔적도 없이 사라진 카라코룸에 대해 자세히 기록한 중요한 사료.

또한 중국에 처음으로 가톨릭교회를 세운 조반니 다 몬테코르비노(Giovanni da Monte Corvino)1305년에 베네치아의 상인을 통해 교황에게 첫 서신을 보냈다. 그는 1307년에 베이징대주교로 임명되어 동양 전체를 교구로 관할했다.

결국 폴로 가족의 여행을 전후로 많은 유럽인카라코룸에 도착했고 자신들이 보고 들은 것을 기록으로 남긴 셈이다. 일부 학자는 카르피니와 드 루브룩의 기행문이 마르코 폴로󰡔동방견문록󰡕보다 더 신빙성이 있고 사료로써 가치가 있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그들의 보고서는 󰡔동방견문록󰡕처럼 베스트셀러가 되지 못했다. 그들은 단순히 보고 들은 것만 기록한 여행기이므로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과 같이 독자들을 이끄는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동방견문록󰡕원연합군>

마르코 폴로원나라의 여러 도시를 비롯해 중국 이외의 많은 나라를 묘사하고 있는데, 군데군데 독자들의 호기심을 부추기는 내용을 가미했다. 가장 흥미를 끌었던 부분은 고려에 관련되는 내용으로 추정되는 기사.

 

몽골의 쿠빌라이

 

대칸쿠빌라이의 삼촌으로 1287반란을 일으킨 나얀이  잡혔다는 것을 알자 그를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그를 두 장의 카펫에 싸서 그의 영혼이 육체에서 떠나버릴 때까지 몹시 흔들었다. 이런 괴상한 방법으로 죽이는 이유는 황제와 혈연관계가 있는 자의 피가 흐르는 것태양과 하늘에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나얀의 부하들은 항복하여 쿠빌라이에게 충성을 바치기로 서약했다. 내가 그 네 지방의 이름을 말해주겠다. 첫째는 초르차(Chorza), 둘째는 카울리(Kauli), 셋째는 바르스콜(Barskol), 넷째는 시킨팅추(Sikintinzu).’

 

카울리고려를 뜻한다는 것은 통설로 인정되고 있지만 마르코폴로카울리의 위치 등 그에 관련된 내용은 적지 않았다. 그런데 년대를 보면 카울리가 정말로 고려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글에 의하면 카울리1287 이후에 원나라에 복속되었다고 하지만 고려1287보다 훨씬 이전에 강화에서 출육했고 삼별초몽연합군에 의해 진압되면서 완전히 복속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록은 마르코폴로장시간 중국에 거주했다는 사실 자체마져 의심을 품게 한다. 특히 서남 아시아에 대한 내용은 비교적 정확한 부분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동아시아에 대한 사실은 매우 빈약하기 때문이다. 근래 학자들은 마르코폴로중국을 방문하지 않았다는데 큰 비중을 둔다. 한마디로 자신의 아버지와 삼촌으로부터 들은 것콘스탄티노플 등에서 상인으로 있는 동안 들은 이야기들을 토대로 󰡔동방견문록󰡕을 저술했다는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많은 자료가 있으므로 이곳에서는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사실 마르코 폴로의 말처럼 그가 17이나 쿠빌라이의 휘하에 있었다면 동아시아 사정에 더 밝아야 한다. 그런데 일본에 관한 내용은 비교적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구체적인 부분이 있다. 일본에 관련된 내용은 3편의 2장부터 4까지 상당히 많은 양으로 설명했다. 특히 일본원연합군일본 원정에 대해 상세히 적었는데 바로 이들 설명이 마르코 폴로중국을 방문하지 않았다는 증거로 제시될 정도임을 보면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은 지적이 제기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내용 때문이다.

우선 일본인도와 연계해서 적었고 둘째는 지팡구(일본)육지에서 동쪽으로 해상 1,500마일 떨어진 곳에 있다고 했는데 이는 현재의 상식과 상당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일본인을 묘사한 내용도 상당히 과장되어 있다.

 

지팡구는 매우 큰 섬으로 주민들의 피부 빛깔이 희며 체격이 좋고 그들의 풍습은 매우 개화되었다. 그들은 우상을 숭배하고 있으며 어떠한 외국의 간섭도 받지 않고 그들의 왕에게만 복속한다.’

 

일본인들의 피부가 희고 깨끗하며 잘 생겼다는 내용인데 이 글을 보면 마르코 폴로가 직접 일본인을 보거나 일본인을 그림조차 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폴로가 직접 일본인들을 보았다면 자신과 비교하여 피부가 하얗다고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쿠빌라이에 문서 전달

쿠빌라이2차에 걸쳐 원연합군으로 하여금 일본을 침공토록 했으나 󰡔동방견문록󰡕일본 원정을 위해 내용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당시 원나라의 가장 중요한 정책 중의 하나가 일본 원정인데 실제로 그가 쿠빌라이와 함께 있었다면 당대의 상황을 정확히 알고 있음이 틀림없다. 특히 황금이 많은 나라라고 적었다 하면 상인인 폴로로서는 가장 큰 관심을 갖고 있어야 함에도 일본에 대한 정보가 크게 왜곡되어 있다. 마르코 폴로지팡구를 설명하는 초입부터 황금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곳에서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금이 나온다. 그러나 왕의 명령으로 수출이 금지되고 있으며 소수의 상인들만이 이곳을 방문한다. 그러므로 타국의 배들이 이곳을 방문하는 일도 적다.’

 

그런데 특이하게 마르코 폴로지팡구의 궁전을 설명하면서 자신이 직접 보지는 못했다고 적었다. 일본의 궁전에 대한 기록은 놀랍다.

 

놀랄 만큼 호화로운 국왕의 궁전의 모습은 그 궁전에 가 보고 온 사람의 이야기에 의하면 매우 훌륭하다고 한다. 지붕 전체를 우리의 교회나 집들처럼 납판으로 씌워 놓은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는 금으로 씌워 놓았고 홀의 천정은 물론 바닥으로 씌워 놓았다. 여러 방에는 매우 두터운 순금으로 만든 작은 테이블들이 있으며 들창도 금으로 장식해 놓았다. 궁전의 화려함은 도저히 그들의 이상을 모두 전달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하다. (중략) 이 섬이 이렇게 부유한 곳으로 유명하기 때문에 쿠빌라이로 하여금 이 섬을 정복하려는 생각을 갖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