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속인 거짓말/동방견문록

중국 여행 없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5)

Que sais 2020. 12. 1.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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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 폴로를 두둔하는 한 가지 가설은 베네치아의 유력 가문들은 제노바와 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상하고 적어도 한 척 이상의 갤리선을 준비토록 명령 받았다고, 그가 아시아에서 돌아오자 폴로 가문의 갤리선 선장으로 임명되었다는 것이다.

일설에는 마르코 폴로코르출라 전투보다 다소 일찍 일어난 1296년의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다고도 한다. 마르코 폴로와 동시대인이던 도미니쿠스회의 수도승 야콥 굿다이가 편찬한 연대기 󰡔이마고 문디󰡕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1296아르메니아 해에 있는 레이아스라는 곳에서 15척의 제노아 함선25척의 베네치아 함선 사이에 전투가 벌어진 끝에 베네치아의 함선이 파괴되어 모든 선원은 살해 혹은 포로가 되었다. 포로 중에는 마르코 폴로도 있었다.’

 

이 기록도 다소 의심이 간다. 그가 포로가 되었다는 이 말을 액면대로 믿는다고 해도 중국에서 돌아오자마자 함대 사령관이 되었고, 곧바로 포로가 되어 1298년까지 감옥 생활을 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더욱 석연치 않은 것은 그가 함대 사령관이었다면 당시의 일화에 대해 상당히 이야기했을 것임이 틀림없지만 그 당시에 일어난 일은 단 한 줄도 언급하지 않았다.

문제는 레이아스 전투1296년이 아니라 1295마르코 폴로가 베네치아에 도착하기 전 해에 일어났으며 12989월에 포로가 되었다는 것에도 년대가 맞지 않는다.

그러나 학자들은 마르코폴로포로로 감옥에 있었다는 자체를 수긍하는데 그가 감옥에 있었던 기간은 대체로 1년 정도추정한다. 그의 책이 1298년 말에 발간되었으므로 이때는 그가 감옥에서 나왔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가장 신랄한 질문은 감옥에 있던 마르코 폴로가 어떻게 자신의 여행기를 루스티켈로에게 받아쓰게 했는지이다. 일부 자료에 의하면 마르코 폴로와 루스티켈로가 약 1년 동안 제노바 감옥에 있을 때 마르코폴로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 것으로 설명된다. 그런데 당대의 문서보관실마르코 폴로가 투옥되었음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가 전혀 없는데다 감옥에 갇혀 있는 상황에서 구술을 받아쓰게 했다는 것도 의문이다.

 

마르코폴로가 지휘했다는 함선

일반적으로 포로들은 손과 발에 쇠고랑을 찬 채 토굴로 된 감옥에서 일생을 마친다.

당시 포로들이 갇혀 있던 제노바의 감옥은 악명 높은 팔라초 델 카피타노 델 포폴로(현 빠라소디 산 조르지오)이다. 만약 마르코 폴로가 정말로 포로였다면 그런 열악한 상황에서 어떻게 방대한 책을 쓸 수 있었을까가 의문이다. 어쨌든 마르코 폴로 말대로 그가 함대 사령관이었다면 그의 명성이 상당히 높았을 것이므로 천부적 이야기꾼임을 감안해 일반 포로들과 달리 토굴에 갇힌 것이 아니라 특별한 배려를 받았을 수도 있다고는 추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길고 자세한 상황을 묘사할 수 있었는지는 의문점이 아닐 수 없다.

마르코 폴로기억에만 의존하기에는 묘사가 지나치게 매끄럽다는 점도 지적한다.

흥미롭게도 당대에 󰡔동방견문록󰡕을 읽어 본 사람들은 대개 마르코 폴로가 진짜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니라 상상력이 풍부한 허풍쟁이라고 했는데, 이는 그의 과장벽을 빗댄 것일 수도 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아버지 니콜로마르코 폴로에게 여행 중의 노트를 감옥에 가져다주었다는 설도 있지만,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하면 󰡔동방견문록󰡕은 논픽션이 아니라 픽션 중의 픽션으로 간주해도 틀리지 않다는 지적을 하는 학자들이 많이 있다.

 

감옥에서 마르코폴로와 루스티켈로

마르코 폴로의 개인생활과 상관없이 󰡔동방견문록󰡕은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필경사들은 그의 책을 필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책이 발간된 지 20년도 지나지 않아 󰡔동방견문록󰡕라틴어, 이탈리아의 투스카나 방언베네치아 방언으로 필사되었고 독일어 필사본도 나왔다. 1477년에는 뉘른베르크에서 최초의 인쇄본이 등장하였지만 현재 알려진 필사본만 해도 무려 150여 개가 된다.

그런데 󰡔동방견문록󰡕가장 큰 약점'원본'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당시에는 금속활자 등에 의한 인쇄술이 없었으므로 책을 발간하려면 필경사들이 일일이 복사해야 했다. 그런데 󰡔동방견문록󰡕은 출간되자마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어 수많은 언어로 번역되었는데 새로 옮겨 쓸 때마다 조금씩 내용이 변질되면서 󰡔동방견문록󰡕원전이 사라지고 150에 달하는 판본만 남았다는 것이다. 150개의 판본 중에는 포켓북처럼 작은 판본부터 백과사전 크기의 대형 판본도 있다.

물론 루스티켈로가 필기한 원본은 없어졌으나 여러 사본 중에서 원본에 가장 가깝다고 인정되는 것은 14세기필사되어진 F이다. 이 책은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1824년에 필사본을 그대로 출간하였고 1928년 필사본 F을 기초로 교정을 본 책이 다시 출간되었다.

다른 사본으로 라무지오 인쇄본으로 불리는 R이 있다. 이 사본은 마르코 폴로가 원본 이후에 추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 상당한 신빙성을 인정받고 있다. 그리고 Z으로 불리는 라틴어로 필사된 젤라다(Zelada) 이 있다. 1934년 이 사본을 혼합하여 A.C.P.펠리오공동편집으로 단일본이 출간되었다.

 

마르코폴로와 동방여행기

근래에 학자들은 도미니쿠스회 수도사였던 프란체스코 피피노(Francesco Pipino)베네치아 언어롬바르디아어로 쓰인 판본을 입수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마르코가 쓴 원본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마르코가 한 개 이상의 판본을 썼거나 몇 년에 걸쳐 내용을 보완했다고 생각하는 학자들도 있다. 피피노도미니쿠스회 수도사들에게 동방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기 위해 라틴어 번역판을 만들라는 지시를 받았으며 , 실제로 도미니쿠스회는 얼마 후 동방에 선교기지를 설립했다.

󰡔동방견문록󰡕의 초판이 프랑스어 출간되었다는 점도 구설수에 오르는 이유.

알려지기로는 마르코 폴로프랑스 말을 전혀 할 줄 몰랐다. 그렇다면 마르코 폴로가 모국어인 베네치아어로 말한 것을 루스티켈로가 곧바로 프랑스어로 번역했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이 일부 학자가 󰡔동방견문록󰡕마르코 폴로의 이야기를 토대로 루스티켈로가 상상의 날개를 펼친 공상 소설간주하는 이유이기도하다.

 

<의문은 끝이 없다>

엄밀히 말해 폴로 집안에서 탐험으로 명성을 떨친 사람은 마르코 폴로가 아니라 그의 아버지 니콜로와 숙부 마페오 폴로이다. 학자들은 만약 그들이 마르코 폴로처럼 자신의 여행기를 썼다면 마르코의 󰡔동방견문록󰡕보다 더 중요하고 놀라운 작품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적어도 한 번쯤은 틀림없이 중국을 여행했을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마르코가 태어날 무렵 베니스를 떠나 콘스탄티노플(현 이스탄불)에서 근거를 잡고자 했으나 생각보다 큰 돈을 벌지 못하자 1259 베니스동업조합지부가 있는 크림 반도 남쪽 끝에 있는 솔다이아(Soldaia) 지방으로 이주했는데, 이 역시 사업은 신통치 않았다. 1260 폴로 형제사라이에 있는 칭기스칸의 증손이자 킵차크의 왕인 바르카(Barka) 이 통치하는 볼가라(Bolgara)로 다시 이주했다.

 

이곳에서 사업에 성공한 이들은 베네치아로 돌아가려 했는데, 마침 몽골과 페르시아 간에 전쟁이 터져 콘스탄티노플로 가는 길이 완전히 봉쇄되었다. 할 수 없이 그들은 다소 위험이 덜한 길을 따라 중앙아시아의 무역 중심지 중 하나인 부하라(Bukhara, 보하라)를 향해 동쪽으로 갔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사방으로 길이 차단되자 그들은 약 3년간 그곳에 머물렀다.

그래도 행운의 여신은 그들의 편이었던지 마침 좋은 기회를 얻게 되었다. 몽골의 강자 훌라구의 사절이 당시 중국의 황제였던 쿠빌라이에게 가는 길에 그곳에 들른 것이다. 훌라구의 사절몽골어가 유창한 그들에게 동행하기를 권했고 폴로 형제는 그 여행이 유익할 것으로 판단해 선뜻 응했다. 결국 그들은 약 1년간의 여행 끝에 1266년 경 쿠빌라이가 있는 카라코룸에 도착했다.

 

마르코 폴로󰡔동방견문록󰡕에서 그들의 여행을 약간 언급하지만 학자들은 그 여행에 대해 보다 많이 기록하지 않은 점을 아쉬워한다. 그들이 겪은 이야기를 사실대로 적어 주었다면 마르코 폴로 이전의 몽골 상황을 보다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을 터였기 때문이다.

 

마르코 폴로󰡔동방견문록󰡕 첫 장에 쿠빌라이의 궁전을 다녀온 니콜로와 마페오 폴로의 이야기를 적고 있다.

 

쿠빌라이 황제는 상식이 풍부한 폴로 형제에게 여러 가지 얘기를 들을 때마다 크게 만족했다. 그리고 몽골 귀족 코카탈과 함께 로마 교황청에 사절로 가달라는 제안을 했다. 황제교황에게 기독교 교리에 정통한 동시에 7종의 학예(수사학, 논리학, 문법, 수학, 천문학, 음악, 기하학을 뜻함)에도 능통한 100명의 선교사를 보내달라고 청했다. 더불어 황제의 영토 안에 있는 석학들에게 기독교 신앙이 다른 어떤 신앙보다 우수하고 명백한 진리를 가졌으며, 타타르인의 신이나 가정에서 예배하는 우상은 악마에 지나지 않고 이들을 신으로 숭배하는 것은 그릇된 것임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을 보내달라고 했다. (중략)

그들은 황제의 무릎 앞에 엎드려 아무리 고난이 따르더라도 최선을 다해 뜻대로 하겠다고 대답했다. 황제는 그들에게 로마교황에게 보내는 서한타타르어로 써서 폴로 형제에게 내주었다. 또한 황제는 신하에게 명해 그들에게 제왕의 상징이 적힌 파이즈로 불리는 금패(牌子)를 주게 했는데 원대에는 금호패, 금패, 은패, 해청패, 원패가 있었다.

 

몽골 칸에게 보내는 서신을 맡기는 교황

몽골 황제 쿠빌라이폴로 형제에게 기독교인의 협조요청했다는 것은 당시 상황으로 볼 때 매우 놀라운 일이다. 학자들은 중국에 오랫동안 기독교 일파로 비록 431년이단으로 낙인찍혔지만 네스토리우스파가 있었고 쿠빌라이 자신이 여러 종교에 호의적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이야기가 결코 과장이 아니라고 믿는다. 학자들은 쿠빌라이노자, 공자, 석가모니, 기독교에 대한 교리를 학자들이 마음껏 토론하는 장을 만들어 주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고 추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