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속인 거짓말/동방견문록

중국 여행 없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6)

Que sais 2020. 12. 1.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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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의 역마차 금패>

마르코 폴로의 이야기가 진실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결정적인 증거로 제시하는 것은 바로 그들이 갖고 온 금패. 당대에 원나라를 여행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폴로 형제는 분명 원나라의 금패를 갖고 돌아왔다. 금패는 폭은 좁지만 길이 약 40센티미터나 되는 매우 특이한 물건으로 사실 금패가 있으면 제국 안에서 어디를 가든 지방관리의 호위 아래 한 지방에서 다른 지방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고, 식량을 비롯해 모든 필수품을 받을 권리가 부여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귀향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정작 귀향하는 폴로 형제를 괴롭힌 것은 홍수, 폭풍우, , 빙하 등의 악조건이었다. 어쨌든 이들은 3에 걸쳐 소아르메니아 연안의 현 알렉사드레타 만에 있는 라이아스(Layas) 을 거쳐 12694팔레스티나의 아크레(Acre)에 도착했다. 카로코쿰을 떠난 지 3년 만이다.

 

원시대 금패와 은패

이때 그들은 교황 클레멘스4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후계자는 아직 결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곳에서 그들은 교황을 보좌하는 포 강 연안 도시인 피아첸차의 테오발도(Teobaldo) 추기경을 만났는데 그는 교황이 선출될 때까지 기다리라고만 말할 뿐이다.

새로운 교황이 선출될 때까지 기다리기 위해 그들이 베네치아의 집으로 돌아왔을 때, 니콜로의 아내는 이미 사망한 뒤였고 한 친척이 마르코를 키우고 있었다. 마르코가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체로 장사에 필요한 실용적인 계산베네치아의 뱃사람 혹은 장사꾼들로부터 세상살이를 터득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1271폴로 형제가 만나 쿠빌라이의 이야기를 전해준 테오발도 추기경그레고리10교황이 되었다. 마침 폴로 형제의 이야기에 흥미를 갖고 있던 그레고리10폴로 형제에게 아크레 항방문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렇게 해서 교황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폴로 형제는 당시 열일곱 살이던 마르코 폴로를 데리고 두 번째 여행길에 올랐다.

하지만 교황은 당대 사절단의 기본인 100을 보내지 않고 단 두 명의 수도사, 빈첸차(Vincenza)니콜로와 트리폴리(Tripoli)프라 구일렐모를 동행하게 했다. 교황두 수도사에게 사제 임면사교(司敎) 수계(受戒) 권한을 주고 교황 자신과 같이 죄를 과하고 용서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했으며 황제에게 축복의 뜻을 전해 주도록 부탁했다. 현대의 개념으로 보면 교황청특권전권대사, 즉 서양을 대표하는 모든 특권을 부여받은 것이다.

원래 그들은 레이아스 항구를 향해 아르메니아 왕국을 횡단하려 했다. 그런데 그곳에서 바빌로니아의 왕 분도크다리가 대군을 이끌고 아르메니아침입했다는 소식을 듣고 두 수도사여행을 포기하고 폴로 일행에게 교황으로부터 받은 서한과 선물을 준 후 돌아가 버렸다고 주장했다.

마르코 폴로의 이야기인데 독일의 크리스티안 후프 박사󰡔동방견문록󰡕에 적힌 그 이야기를 두고 한마디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일축했다. 교황청의 사정으로 100명의 수도사가 아니라 2명의 학식 있는 수도사를 파견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교황의 엄중한 밀명을 받은 두 수도사전쟁이 일어났다고 교황에게 받은 모든 서한과 선물을 두 명의 상인과 아들에게 내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마르코폴로의 아버지와 삼촌쿠빌라이가 준 금패를 갖고 있으므로 원나라를 여행하는데 문제가 없었다. 한마디로 두 수도사 역시 위험에 처해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더구나 놀라운 것은 두 수도사가 만약 자신들이 부여받은 모든 권한을 폴로 가족에게 주었다면 선교사로서의 임무까지 부탁한 셈이다. 그런데 폴로 가족24년간 교황에게 자신들에게 부여된 상황을 보고하는 서신 한 통 보내지 않았다.

학자들은 상식적으로 마르코폴로의 이야기허무맹랑하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교황청으로부터 임명을 받은 기욤 드 루브룩몽골의 풍습과 의식, 종교에 대해 풍부한 정보를 전달했다는 것을 보면 마르코폴로에게 전도를 의뢰했다는 것은 코미디와 같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기독교 논리로 똘똘 뭉친 당시의 사회에서 교황청의 특사가 교황에게 단 한 번의 보고도 없이 즉 교황의 지시를 묵살하면서 자신이 부여받은 임무를 수행하지 않았다는 것이 정말로 가능한가 하는 점이다. 이러한 지적은 󰡔동방견문록󰡕에 기록된 마르코 폴로의 여러 가지 행동 자체가 원천적으로 포장되었다는 것의 의미한다는 지적이다.

󰡔동방견문록󰡕이 유럽에서 워낙 큰 영향력을 미쳤으므로 독일의 크리스티안 후프를 비롯한 검증팀은 각각 마르코 폴로가 기록한 여행로를 따라 신장 웨이우얼 자치구에 있는 도시인 카슈가르부터 대사막과 오아시스를 거쳐 베이징까지 철저히 답사했다. 그들은 마르코 폴로가 실제로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지나쳤는지에 주목했는데, 크리스티안 후프마르코 폴로중국을 방문하지 않았다는 데 역점을 두었다. 반면에 마이크 에드워즈 박사마르코 폴로의 과장이 상상을 초래하지만 여행 자체는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한마디로 크리스티안 후프는 마르코폴로가 중국을 방문하지 않았다는데 방점을 찍은 반면 에드워즈 박사마르코폴로중국을 방문했을 개연성은 있다는 것이다.

 

<실크로드를 통과했다는데 빠진 것이 많다>

크리스티안 후프마르코 폴로가 중국을 방문하지 않았다고 결론을 내린 것은 󰡔동방견문록󰡕에 기록된 설명에 수많은 의문점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마르코카슈가르를 지나 중국으로 들어가려면 당연히 중국과 중앙아시아를 잇는 실크로드의 관문둔황을 반드시 거쳐야 하는데, 그가 그 지역을 거론하지 않은 것이다.

여행기를 쓰면서 가장 중요한 지점, 특히 무역의 요충지를 제외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당시 둔황서역 북도와 남도의 분기점으로 문화적으로도 중요한 요충지였다. 마르코 폴로둔황을 방문했다면 그의 일정에서 가장 중요한 그곳의 이야기를 빠뜨렸을 리 없다는 지적이다.

물론 여기에 대한 반론도 있다. 마르코 폴로1편 제40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사막을 횡단하는 30일간의 여행이 끝나면 쿠빌라이 황제가 지배하는 사치우(Sachiu, 사차우(Sachau)라고도 부른다)에 도착한다. 이 지방을 탕구트(Tangut)라고도 한다. 주민은 대개 우상숭배자들이며 그밖에 투르크만족도 있고 소수지만 네스토리우스파의 기독교도마호메트교도들도 있다. 우상숭배자들은 다른 사람들과 다른 국어를 쓰고 있다. 탕구트 시는 동북동쪽에 있고 주민은 주로 농부이며 밀을 많이 생산한다. 이곳에는 많은 수도원과 사원이 있는데 모두 여러 가지 우상을 안치하고 있다. 주민들은 이러한 우상들을 깊이 존경한 나머지 희생을 바치며 아들을 낳으면 그 우상 중 어느 한 우상의 보호를 빈다.’

 

고대사 전문가인 정운용 박사사치우 또는 사차우사주(沙州)로 지금의 둔황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탕구트감숙 지방의 당고특(唐古特)을 뜻하는데 이는 󰡔당서(唐書)󰡕에서 말하는 당항(黨項)이 와전된 것으로 추정했고, 이곳에는 당시 선비족이 살고 있었으며 우상숭배자라마교도들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또한 투르크만족투르크(Turk)에서 유래한 말로 트루크만(Turkoman)이란 유목민이 자신들을 부를 때 쓰는 고유명사이며 이들은 티베트어를 쓴다고 했다. 더불어 이 지방에서 지금도 행하는 장례법특이한 화장에 대해서도 기록했음을 지적했다.

 

둔황 막고굴

그러나 크리스티안 후프명사산(鳴沙山)의 동쪽 끝 절벽에 남북 약 1,600미터에 걸쳐 여러 층으로 뚫린 막고굴(莫高窟)492개 굴을 설명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한다. 특히 당나라 때 건조된 158굴의 72작은 석상들 사이에 비스듬히 누운 16미터 길이의 와불(臥佛)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을 볼 때 마르코 폴로가 이 지역을 지나지 않았다고 확신했다. 반면에 마이크 에드워즈마르코 폴로둔황의 석굴을 아예 못 보았거나 아니면 낯선 종교예술의 장관에 압도되어 적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무엇보다 학자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은 마르크 폴로가 다음 여행지로 하미(哈密)라는 도시를 언급한다는 점이다. 하미 수박으로 유명한 이 도시는 원나라로 들어가는 도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역북도에 있는 도시로 훨씬 북쪽에 있다. 이에 대해 정운용 박사마르코 폴로 자신이 방문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삼촌에게서 1차 중국 여행담을 듣고 적은 것이라고 설명할 정도로 의문점이 있는 여행 경로라고 한다.

 

우측 상단 하미수박

마르코폴로의 여행기 자체만 볼 때 다소 여유를 갖고 보아야한다는 지적도 있다.

마르코 폴로 일행은 어디까지나 상인이었기 때문에 무역상을 위한 무역안내서를 쓰려고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마르코 폴로의 이야기에서 루스티켈로각색한 부분을 제외하면 그다지 모순이 없다는 얘기.

사실 󰡔동방견문록󰡕거리와 가격, 음식, 무역 물품을 이야기하는 데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 그러나 중국과 서양을 오갈 때 가장 중요한 둔황의 석굴에 대한 내용을 제외했다는 것은 그 지역을 방문한 사람이라면 적지 않았을 리 없다는 지적이다.

문제는 당대에 둔황을 거치지 않고 중국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점이다. 마르코폴로가 만만치 않은 의문점을 제기한 것인데 이 문제는 또 다른 치명타로 보다 공고해진다.

󰡔동방견문록󰡕신빙성을 따질 때 가장 크게 지적되는 것은 󰡔동방견문록󰡕사용된 언어.

일부 학자는 마르코 폴로터키어, 페르시아어를 알고 있다는데는 이해하는데 중국에서 상당 기간 살았다면 최소한의 중국어구사할 수 있었다고 추정한다. 실제로 아버지 니콜로와 삼촌 마페오중국어를 잘 숙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동방견문록󰡕을 엄밀히 검증한 학자들은 마르코 폴로중국어전혀 하지 못했다고 단언한다. 그 이유는 󰡔동방견문록󰡕에서 60여 군데의 지명이 언급되는데 단 세 곳의 이름만 중국어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베이징을 가리키는 칸발리크(Khanbalik)왕이 있는 도시라는 뜻의 터키어에서 나온 이름이다.

마르코 폴로가 정말로 자신이 거론한 도시들을 여행했다면 그 지역 사람들을 많이 만났을 것이며 적어도 지명을 정확히 거론했을 거라는 설명이다. 바로 이 점이 마르코 폴로가 그 이전에 몽골을 여행한 터키인이나 페르시아인의 여행기차용해 마치 자신이 직접 여행한 것처럼 설명한 것이 틀림없다는 주장이 나오게 된 결정적인 이유이다.

유명한 중국학자헤르베르트 프랑케(Herbert Franke)마르코 폴로󰡔동방견문록󰡕을 의심한 최초의 사람이다. 그는 󰡔동방견문록󰡕의 여러 부분이 마르코가 전혀 경험하지 않은 내용을 포장하여 전한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마르코 폴로가 말하는 내용 중 대부분은 페르시아 원전에서 유래했다고 지적했다.

마르코 폴로는 당대의 강국인 원나라 궁에서 쿠빌라이를 직접 만났고 황제의 신하로 지방관 벼슬을 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중국의 문자 체계를 언급하지 않았다. 중국의 고위직급인 지방관에 17년 간이나 봉직했다고 자랑스럽게 기록했으면서도 말이다.

 

양주(楊洲)24개의 읍이 있는 대도시인데 이 도시 사람들은 우상숭배자들로 상업과 수공업으로 생활하고 있다. 이 지방에는 많은 군대가 주둔하고 있으며 사람들은 무기와 군 장비를 많이 만든다. 양주는 황제가 임명한 12인의 귀족 중 한 사람이 황제의 명을 받아 지방행정을 맡아보고 있는데, 마르코 폴로도 황제의 특명으로 3년간 그 도시의 행정관으로 일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적어도 그가 당대의 수많은 사건에 대해 서류를 검토하거나 결재했음이 틀림없다. 그런데 그가 가장 자랑스러워했을 지방관으로서의 역할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다. 이는 그가 지방관으로 근무한 적이 없음을 의미한다는 지적이다.

물론 일부 학자는 마르코 폴로중국인 통치자의 명단에 들어가지 않은 사실을 근거로 그의 직책이 매우 낮았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또한 그가 3년이나 봉직했음에도 다른 도시보다 짧게 기록한 것은 그가 매우 비인격적인 생활을 했거나 당시의 일을 거론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두둔한다.

아무리 그렇다해도 일단 중국이라는 나라에서 행정을 담당하는 관리가 되었다면 적어도 중국인 관리와 소통해야하는 절대적인 문제점이 제기된다. 위에서 적은 것처럼 그의 직급이 낮았기 때문으로 그가 통역을 활용하여 소통했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중국의 글자체계가 유럽과 다르다는 것을 모를리 없다.

결론은 그가 글자를 몰라도 되었다는 것인데 그것은 그가 중국에서 관리로 봉직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그가 글자를 몰랐다는 말은 중국에 체류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된다는 설명에 반박이 궁색해질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