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속인 거짓말/동방견문록

마르코 폴로, 중국 여행 없는 동방견문록(4)

Que sais 2020. 11. 30.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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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견문록󰡕에서 이상한 점은 원연합군1, 2차에 걸쳐 일본을 공격했음에도 마르코폴로2차 원정에 대해서만 설명한다는 점이다. 마르코 폴로의 말이 맞다면 그는 제1차원정 때에도 중국에 있었다. 그가 쿠빌라이의 궁에 도착한 것은 1274년 여름인데 1차 여원연합군10월에 출발했으므로 이 원정에 대해 상당한 식견이 있어야 마땅하다.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 있었다는 것을 부정하는 근거가 되는데 마르코 폴로원연합군 중에서 강남군만 설명하고 동로군에 대해서 조차 언급이 전혀 없다. 여하튼 󰡔동방견문록󰡕에 기록된 전쟁의 전황 설명은 다음과 같다.

 

어느 날 하루는 바람이 북쪽에서부터 세차게 불어오므로 장병들이 만약 지금 떠나지 않으면 배들이 파손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모두 배에 올라 그 섬을 떠나 바다로 들어갔는데 그들이 4마일 정도 갔을 때 바람이 더욱 세차게 불자 많은 배들이 있었기 때문에 서로 부딪쳐 상당수가 부서졌다. 파손되지 않은 배들이 바다로 흩어져 난파는 모면했는데 이때 인근에서 그리 크지 않은 다카시마 섬(高島)을 발견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그 섬으로 피신했지만 섬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은 죽었다. 성난 바람과 무서운 폭풍이 잠잠해지자 난파에서 모면했던 사람들의 숫자가 너무 많아 지위가 높은 사람들 즉 백인장, 천인장, 만인장들은 배를 타고 귀국했다.’

 

이 당시의 피해 등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만 󰡔동방견문록󰡕에 난파 후 귀환하지 못하고 잔류한 정벌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 자료는 다소 부정확한 원연합군에 대해 설명하고 있으므로 모두 진실로 생각하지는 않지만 매우 흥미로운 내용을 알려준다.

 

일본 원정 고려군

 

다카시마 에 표착한 타르타르군(원연합군)은 약 3만 명 인데 그들은 사령관으로부터 버림받은데다 무기나 식량도 없고 더욱 이 섬에는 피신처도 없으므로 포로가 되거나 죽는 수 밖에 없는 상태가 되었다. 폭풍이 그치자 타르타르인들을 체포하기 위해 지팡구 본토에서 대부대가 함선을 타고 들이 닥쳤다. 그들은 상륙하자 타르타르군을 수색하기 시작했으나 타르타르인들은 섬의 복판에 있는 높은 언덕에 숨어 있다가 적의 눈에 띠지 않도록 반대 방향으로 돌아 적의 함선들이 정박하고 있는 곳으로 갔다. 함선에는 타르타르인들은 선박을 지키는 사람들이 없다는 것을 알고 그 배들을 탈취하여 지팡구의 중요한 도시로 향했다. 그러자 섬에 있던 사람들은 자기편의 색깔을 가진 배가 도착하자 안심하고 타르타르군시내로 들어오는 것허락했다. 시내에 들어간 타르타르인들은 부녀들을 제외하고 모든 주민들을 쫓아버렸다. 지팡구의 왕은 이 사실을 알고 크게 우려한 후 곧 그 도시를 봉쇄하도록 했다. 6개월 동안 사람과 물자도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봉쇄는 성공하여 타르타르인들은 생명을 구해주는 조건으로 항복했다. 이 일이 있었던 것은 1279이다.’

 

이 설명은 실제와 부합하는 면도 있고 다소 다른 면도 있다. 우선 다카시마잔류한 장병의 숫자 3만 명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일본이 이들 섬을 공격한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후술 부분사실과 상당한 거리가 있다. 잔류한 장병들은 장백호를 총관으로 추대한 후 배를 만들어 귀환하려 한 것은 사실이나 일본의 공격으로 모두 포로가 되어 하카다(博多)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몽골인한인고려인들은 모두 처형되고 남송 출신노예가 되어 목숨만 건졌다. 또한 2차 원정1279에 일어났다고 적었는데 실제는 1281에 벌어졌다. 마르코 폴로가 이 당시 중국에 있었다면 원연합군일본원정과 같은 중대한 일이 일어난 년대조차 불분명하다는 것은 󰡔동방견문록󰡕상당한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일본에 관한 한 그는 분명하게 자신이 직접 본 것과 타인으로부터 들었다는 것구분하여 설명했다. 이런 이유 등을 근거로 일부학자들이 여행기가 아니라 세계의 기술또는 책의 제목처럼 견문록으로 말하는 이유. 학자들은 모든 궁전이 순금으로 장식되어 있다는 지팡구에 대한 이야기는 고려혼합해 설명한 것으로 추정한다. 일본에는 목조로 된 건물단청을 하지 않는 반면(청수사 등 제외) 한국의 건물들은 단청을 하는데 이를 황금으로 보는 것은 충분히 이해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콜럼버스지팡구의 황금, 고려와 인도의 향료를 구하기 위해 출발했다는 것이 정설로 알려질 정도이다.

 

<󰡔동방견문록󰡕의 원작자는 누구인가>

󰡔동방견문록󰡕서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세계의 동부에 있는 여러 왕국, 지방, 지역의 여러 가지 상태와 모든 인종의 진기한 풍속을 알고자 하는 황제, , 공작, 제후, 백작, 그리고 기사님들 이하 여러분. 누구나 이 책을 읽으면 아르메니아와 페르시아, 인도, 타타르인(몽골을 뜻함)의 놀라운 특징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현명하고 교양 있는 베니스의 시민 마르코 폴로는 자신이 직접 본 것과 남에게서 들은 것을 명백히 구분해 이 책에 설명해 놓았습니다. 그것은 그가 진실을 전해 이 책을 신뢰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하나님께서 인류의 시조인 아담을 창조하신 태곳적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교도와 사라센인, 그리스도교도, 그밖에 다른 어떤 사람도 마르코 폴로만큼 넓은 세계의 여러 곳과 위대한 이야기 및 현상을 듣고 보고 연구한 사람은 없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는 이러한 사실을 직접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공표함으로써 다소나마 도움이 되게 하려는 충정에서, 기원후 1298 때마침 제노아의 감옥에 갇혀있을 때 같은 감방에 있던 피사의 작가 루스티켈로(Rustichello, 루스티치아노)에게 구술해 기록케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작품을 세 부분으로 나누었습니다.’

 

감옥에서 구술하는 마르코폴로와 루스티켈로

서문의 내용만 보면 마르코 폴로가 저자임이 틀림없고 이탈리아의 작가 루스티켈로마르코 폴로의 구술대필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12세기 중엽 주로 기사들의 모험담인 로망(로맨스)문학 연구가 바르바라 베르(Barbara Wehr)루스티켈로가 마르코 폴로의 원래 이야기를 문학적으로 개작한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했다.

지금도 많은 작가흥미로운 소재를 찾기 위해 고심한다. 예를 들어 교도소를 방문해 수감자들의 특이한 경험담을 구전으로 듣기도 하고 알려진 사건의 장본인을 만나 자초지종을 채집하기도 한다. 그런 다음 자신의 아이디어를 접목시켜 작가의 작품으로 발표한다. 상황에 따라 소재를 제공한 사람의 이름으로 출간하기도 하는데, 이는 그렇게 하는 것이 책으로 성공하는 예가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자들은 루스티켈로가 단지 제노바 감옥에서 구술한 것을 받아썼다라고 적은 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책의 판매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추정한다.

한마디로 󰡔동방견문록󰡕마르코 폴로의 견문기가 아니라, 기사문학 작가인 루스티켈로서사적인 요소를 가미한 작품이라는 얘기다. 루스티켈로의 덧칠을 거치면서 당시 유럽인의 흥미를 유발할 만한 과장이 더해졌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학자들은 루스티켈로아서왕의 이야기도 썼는데 두 책의 서문이 똑같다는 것을 발견했다. 두 책의 서문이 똑같다는 것은 󰡔동방견문록󰡕아서왕의 이야기와 같은 틀에서 쓰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쿠빌라이 칸마르코 폴로 일행을 환영하는 장면은 아서 왕 전설에서 트리스탄처음 궁정으로 왔을 때의 장면을 그대로 따와 고쳤다는 것이 정설로 통한다. 다시 말해 사실만 기록한 것이 아니라 작가적 상상력이 듬뿍 담겨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루스티켈로가 자신의 작품에 왜 마르코폴로의 이름을 넣었느냐는 질문이 나오는데 이는 매우 간단한 말로 설명이 된다. 그가 마르코 폴로와 함께 감옥에 있으면서 그의 이야기를 듣고 여행기를 작성했지만 그의 이름이 잘 알려져있지 않으므로 폴로의 이름으로 출간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이미 죽은 사람이 책을 내는 것은 물론 가공 인물이 출간하는 책도 많이 있다. 심지어 연금술 관련 서적그리스 신화의 신들이 쓴 도 있음을 볼 때 루스티켈로의 저작으로 보는 것이 옳다는 시각도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마르코폴로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은 사실이며 그래서 󰡔동방견문록󰡕이 빛을 본 것도 사실이다. 내용은 어떻든 마르코 폴로를 제외하고 이야기할 수 없다는 뜻이다.

 

<모호한 마르코 폴로의 행적>

마르코 폴로의 과장벽은 자신이 베네치아 함대 사령관이었다고 떠벌렸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그는 1295년 아버지, 숙부와 함께 긴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베네치아의 함대 사령관으로 임명된 후 제노바 함대와의 전투에 참전했다가 포로가 되었다고 적었다.

 

코르출라에서 마르코폴로의 생가로 설명

그로부터 200여 년 후, 마르코 폴로의 글을 보충하고 주석을 단 이탈리아의 지리학자 조반니 바티스타 라무시오12989마르코 폴로코르출라(Korcula) 해상전갤리선을 이끄는 사령관으로 참전했다가 포로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베네치아의 기록보관소에서는 마르코 폴로의 이름조차 찾을 수 없다. 웬만한 장교들 모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때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참고적으로 코르출라는 현재 크로아티아지역으로 크로아티아에서는 마르코폴로코프출라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하며 박물관과 그의 생가도 있다. 

물론 그를 두둔하는 학자들은 그가 함대 사령관이 아니라 그보다 낮은 계급이었다면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은 것에 수긍이 간다고 설명한다. 사실 군대 경험도 없는 사람함대 사령관이 되었다는 것은 󰡔동방견문록󰡕신빙성을 떨어뜨리는 요소로 작용한다.

그렇다고 그가 설명하는 전투 자체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3세기 중엽, 베네치아와 제노바 공화국이탈리아 해안을 지배하고 있었는데 1250년 경 베네치아제노바보다 약간 앞서 있었다. 특히 베네치아는 대함대와 군대를 고용해 자국의 이익을 지키거나 자국의 경쟁자들이나 우호적이지 않은 상대들을 공격했다. 결국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1290년대에 결전을 벌였다. 1298에는 달마티아 해안에 있는 코르출라 섬에서 전투가 벌어졌는데 예상과는 달리 베네치아가 완패하는 바람에 제노바가 강자로 떠올랐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베네치아의 도제 안드레아 단돌로지휘하는 약 100척의 함대가 전멸했다고 한다. 그런데 마르코 폴로가 이 전투의 한 갤리선(galley) 함장으로 참전했다가 부상을 당해 다른 7,400명의 베네치아인과 함께 포로가 되었다는 것이다. 하긴 마르코 폴로가 함대 사령관이 아니라 한 척의 함장이라는 것이 다소 신빙성 있게 들리기는 하지만 자신이 함대 사령관이었다고 말한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이렇게 금방 탄로 날 이야기를 한 사람이 바로 마르코폴로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