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속인 거짓말/동방견문록

마르코 폴로, 중국 여행 없는 동방견문록(7)

Que sais 2020. 12. 1.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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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제패의 비결 역참>

마르코폴로의 이야기에 석연치 않은 많은 이야기들이 들어있지만 그를 지지하는 강력한 증거 중 하나는 그가 유명한 금패를 갖고 돌아왔다는 것이다. 금패역참과 함께 몽골이 세계를 제패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핵심 요소.

인류 역사상 최대의 영역을 자랑했던 몽골 제국의 출현으로 유라시아 대륙은 하나의 나라가 되었다. 두 대륙을 연결하는 육로나 해로가 몽골 제국에 의해 뚫린 것은 아니지만 두 세계간의 거리는 크게 단축되었고 왕래자도 큰 폭으로 늘어났다.

동양사학자 박한제 교수몽골 제국의 역사1260을 경계로 양분된다고 말한다. 몽골군동쪽의 한반도에서부터 서쪽의 도나우 강 하구, 지중해 연안에 이르기까지 그 영역을 넓혔던 시기를 전기로 보고, 쿠빌라이(재위 12601294) 이후후기로 보는 것이다.

쿠빌라이는 광대한 몽골 제국하나로 통치하는 것이 만만한 일이 아님을 느끼고 있었다. 국가가 원활하게 돌아가려면 군대를 급파해야하며 경제와 유통을 통제해야 하는데, 넓은 영토를 관리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결국 그는 군사적 확장을 다소 자제하며 안정화를 이루기 위한 경제 중시 정책을 펼쳤다.

 

몽골의 주요 교통로

쿠빌라이가 만든 통치의 근간 중 하나가 바로 역참제도. 그는 애초에 군사 및 정치 목적으로 도입된 역참제도중국 내지와 유라시아 전역의 육상수상해상에 각종 편의를 제공해 경제유통의 활로로 삼는 데 활용했다. 이를 현대적 의미로 말하면 초광역 네트워크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쿠빌라이는 육로에 만족하지 않고 동쪽의 천주, 광주를 통해 동남아시아의 팔렘방과 브루나이, 인도 남단의 여러 항구를 거쳐 서쪽 페르시아 만의 호르무즈까지 해상로를 개통했다. 이곳에서 북쪽 흑해 연안의 수다크, 지중해의 베네치아제노바서유럽의 항구 도시로 연결되었는데 마르코 폴로가 돌아간 길도 바로 이 항로였다.

몽골 제국의 수도 카라코룸에서 북경까지는 1,500킬로미터, 타슈켄트는 3,000킬로미터, 바그다드나 모스크바까지는 5,00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었다. 이후에 수도를 현재의 북경 근처로 옮김으로써 수도에서 다른 지역과의 거리는 더욱 멀어졌다.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제국의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말을 타고 아무리 빨리 달려도 최소한 200이 걸렸다고 한다.

역참제칭기즈칸의 뒤를 이어 2대 칸이 된 오고타이로부터 착수됐다. 그는 엄청나게 확대된 제국의 각 지점에서 카라코룸까지 신속하게 교통이 가능할 수 있도록 중요한 노선을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역참배치했다. 역참몽골어(jam)이라 불렀다.

에는 간단한 숙박 시설, 수레나 말, 필요한 식량 등이 준비되어 있었고 잠치(jamchi)라고 불리는 관리인이 관리했다. 오늘날 중국에서 정거장이라 부르고 한자로 ()이라 표기하는데 이 말은 몽골어 에서 기원한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의 호텔처럼 아무나 돈을 내면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김호동 박사역참은 공무로 여행하는 전령이나 관리 혹은 외국의 사신에게만 사용이 허가되었고 이들은 반드시 패자(牌子)라는 증명서를 보여주어야 했다고 한다. 몽골 제국이 얼마나 많은 역참을 설치했는지를 알려주는 자료는 없지만 중국 안에 설치된 숫자는 1,519개소에 이른다. 그곳에 비치된 말과 노새5만 마리, 9,000마리, 수레 4,000, 6,000척이었다.

 

패자(고등학교 세계사)

몽골 제국의 역참제는 제국을 방문했던 유럽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마르코 폴로󰡔동방견문록󰡕 2편 제26에서 상당히 많은 지면을 할애해 역참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이는 마르코 폴로에게조차 역참이 매우 인상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칸발리크 시로부터 여러 지방으로 통하는 길이 매우 많은데, 큰 도로에는 어느 곳이나 25마일에서 30마일마다 여행자를 위한 숙박시설과 역이 있다. (중략) 각 역에는 언제나 400필의 좋은 말이 준비되어 있어 황제의 명령으로 여행하는 사자 또는 사절들은 여기서 지친 말을 버리고 새로운 말로 바꿔 탈 수 있다. 황제는 촌락도 없고 읍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산악지대에도 같은 건물을 세워 같은 수의 역마를 상비해 두었다. 특히 그곳에 농사를 짓거나 역전 사무를 맡아보는 사람들을 이주시켰다. 덕분에 역사를 중심으로 촌락이 생겼다. (중략)

황제의 영토 안에서는 24만 필 이상의 말이 역전(驛傳)에 사용되고 있으며 또한 상당한 시설을 갖춘 역사가 1만 개소나 된다. 이것은 실로 놀라운 제도로 그 효과는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뛰어나다. (중략) 역사 사이에는 작은 마을이 있으며 3마일마다 약 40호의 농가가 있는데, 그곳에는 걸어서 황제의 심부름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허리에 작은 방울을 달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달려오는 것이 멀리서도 들린다.

그들은 한 역에서 다음 역까지 3마일만 달렸고 그들이 가까이 오면 다음 역에서 새로운 급사가 달릴 준비를 하고 있다가 서류를 받아 계속 달린다. 이러한 제도 때문에 황제보통 10일 이상 걸리는 지방으로부터의 정보를 단 2()2()에 받을 수 있다. 과일이 익을 무렵이면 칸발리크에서 아침에 딴 과일이 다음날 저녁 상도(上都)에 있는 황제에게 도달하기도 했다. (중략)

역에는 서기가 있어 한 급사도착한 일시와 다른 급사가 그곳을 떠난 일시기록한다. 이들 급사세금을 면제받을 뿐 아니라 황제에게 상당한 봉급을 받는다. 역전 사무에 동원되는 경비는 황제직접 지불하지 않는다. 부근에 있는이 말도 바치고 기르는 비용도 댄다. (중략) 물론 400필의 말도 늘 역에서 기르고 있는 것은 아니다. 200필이 한 달간 근무하는 동안 나머지 200필은 방목한다. 월초에 이제까지 근무하고 있던 말을 방목해 쉬게 하고 방목하던 말은 다시 근무하는 것이다.

급사나 역마를 탄 사람이 건너야 할 강이나 호수가 있으면 부근의 도시는 언제나 3, 4척의 나룻배를 준비해 두어야 한다. 또한 횡단하는 데 수일이 걸리며 인가도 전혀 없는 사막 곁의 도시는 궁정으로 오가는 사절이나 수행원이 무사히 사막을 지날 수 있도록 말이나 그 밖의 것을 공급해야 한다. 이처럼 특수한 곳황제가 경비를 하사한다. (중략)

매우 급한 일, 예를 들어 폭동이 일어났거나 귀족이 반역을 꾀했을 때, 그밖에 중대한 돌발사태가 발생했을 때 황제에게 보고할 서류는 하루에 200250마일을 주파한다. 이 경우에는 임무가 긴급해 되도록 빨리 달려야 한다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 사자는 큰 매가 새겨진 패부(牌符)를 지참한다. (중략) 특별히 긴급한 일이면 사자는 밤에도 말을 타고 달린다. 이때 만약 달이 떠있지 않으면 역에서 다음 역까지 등불을 든 사람이 말 앞에 서서 달린다. 등불을 든 사람을 앞질러 갈 수 없어 낮과 같이 빨리 달릴 수는 없지만 임무를 수행한 사자는 크게 포상을 받는다.‘

 

역참제도에 대한 마르코 폴로의 기록은 상당히 구체적이다. 따라서 마르코 폴로의 여행담이 진실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역참에 대한 설명을 가장 강력한 증거로 내세운다.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결코 적을 수 없는 내용까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원나라역참제도는 적어도 500년간 계속 시행되었다.

()나라의 왕기(王圻)찬집(撰集)󰡔속문헌통고(續文獻通考)󰡕에 나오는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원나라 때 문서를 사방으로 왕래케 했는데 이를 통원포(通遠舖) 또는 급체포(急遞舖)라 한다. 쿠빌라이 때 연경으로부터 개평부에 이르다가 다시 개평부에서 경조에 이르렀다. 처음에 거리의 원근, 인구의 다소를 살펴 급체포를 세웠다. 10리 혹은 15리마다 하나씩 만들어 각 주현 소관의 누적호(漏籍戶)를 조사해 포병(舖兵)을 조직했다. 중통(中通) 원년 여러 지방의 관리에게 명해 전체포역(傳遞舖驛)을 만들고 ()마다 5명을 두어 1주야(晝夜) 400리를 가게 했다. 각 노선의 총관(總管)에 대해서는 ()는 유급 정관(正官) 1인에게 위임하고 춘하추동 각각 1회씩 친히 가서 점검하며 주현(州縣)도 유급말직 정관에게 위임하여 상하 반월(1일과 15)에 점검한다.’

 

여기에서 하루에 달릴 수 있다는 400중국의 리()의 거리를 말한다.

몽골 제국역참제중국 왕조역참제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후자는 도로를 전제로 성립한 것으로 역참도로망의 효율적인 이용을 위해 고안된 것이다. 반면 몽골 제국의 역참은 도로가 존재하지 않는 초원에 도입된 것으로 도로이차적인 중요성에 지니지 않는다. 김호동 교수는 다른 국가의 역참제 도로를 근간으로 하는 ()’의 네트워크였다면, 몽골 제국의 역참제는 도로가 존재하는 농경 지역은 물론 도로가 존재하지 않는 사막과 초원까지도 포함하는 ()’의 네트워크라고 했다.

몽골의 이러한 역참제도는 세계를 장기간 지배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예를 들어 어느 지역에 전쟁이 벌어졌을 경우 그곳을 피해 우회하는 곳에 역참들을 배치함으로써 새로운 교통망을 구축할 수 있었다.

그러면 여기서 마르코 폴로금패 문제를 생각해 보자. 금패는 역참에 대한 기록과 함께 마르코 폴로의 탐험이 진실임을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 마르코 폴로원나라 여행에 사용했다는 금패 세 개를 갖고 왔는데, 금패에 대해서는 그의 아버지 마페오 폴로와 마르코 폴로유언장에도 언급되어 있다.

그런데 마르코 폴로의 일정을 면밀하게 검토한 일부 학자는 그 금패가 마르코 폴로보다 먼저 중국을 방문한 니콜로와 마페오 폴로의 첫 번째 여행 때 카라코룸에서 가져온 것으로 추정했다. 마르코 폴로의 여행을 둘러싸고 벌어진 가장 큰 의문점 중 하나도 진실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는 설명이다.

 

놀랍게도 역참제도남아메리카의 잉카 제국에서 더욱 효과적으로 운용되었다. 잉카인컬럼비아로부터 칠레까지 길이 5,230킬로미터에 달하는 도로를 닦았다. ‘왕의 길이라고 불리는 그 길은 인간이 시공한 토목공사가장 큰 공사로 거론되고 있으며, 오늘날까지도 자동차와 트럭이 다닐 수 있을 만큼 잘 닦여져 있다.

잉카의 우편제도19세기 중엽까지 세계에서 가장 빨랐다. 그들은 차스키(chasqui)라고 부르는 전령 시스템으로 키토(Quito)로부터 쿠스코까지 2,011킬로미터를 5일간 주파해 메시지를 전달했다. 놀랍게도 그 길은 대부분 고도 3,000미터였다. 고대 로마 역시 훌륭한 도로 시스템으로 메시지를 전달했지만, 그들은 같은 거리를 10배나 더 걸려 전달했다.

잉카인전보도 활용했다. 이는 불과 연기의 신호법으로 3,200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 도달하는 데 3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앤드루 토머스잉카 사회에서의 전보가 현대의 사회주의보다 더욱 능률적으로 기능을 발휘했다고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