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컨 저격>
노예제를 반대하는 링컨이 당선되자 남부는 그의 당선이 확정된 직후 연방 탈퇴를 선언하고 제퍼슨 데이비스를 남부 연합의 대통령으로 선출했고 링컨의 취임 1달 만에 남북전쟁이 발발하였고 링컨은 전쟁 중이던 1864년 어렵사리 재선에 성공하였다.
결국 1865년에 남북전쟁은 남부의 항복으로 끝났지만, 종전 11일 후인 1865년 4월 14일 워싱턴 시내 소재 포드 극장에서 연극을 관람하던 중 남부지지자인 배우 존 윌크스 부스 (John Wilkes Booth)로부터 머리에 치명적인 총격을 받고 극장 부근 민간에서 응급 치료를 받았으나 9시간 만에 사망했다.
링컨을 저격한 존 윌크스 부스의 부모와 가족은 당대에 모두 유명한 연극인으로 그 역시 배우로 성장했다. 그는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3세」, 「햄릿」, 「로미오와 쥴리엣」 등에 출연하여 큰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와 두 형이 연극 무대에서 워낙 발군의 연극배우이므로 열등감을 갖고 있었는데 1861년 미국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노예제의 폐지를 강력하게 반대했으며 남부의 탈퇴를 영웅적 행동이라며 칭송했다.
그러나 초창기 전세와는 달리 북부의 우세로 기울었고, 결국 1865년 북부의 승전으로 끝이 났다. 부스는 6명의 남부 지지자들과 링컨 대통령의 암살을 논의하였고, 1865년 4월 14일, 링컨 대통령 부부가 포드 극장에서 「우리 미국인 사촌」을 관람할 때 부스가 다가가 링컨의 머리에 총을 쏘았다.
링컨을 살해한 후 그는 무대로 뛰어들어 다음 말을 하고 도망쳤다.
‘폭군은 언제나 이렇게 될 것이다.’
그 직후 부스는 미리 준비해 둔 말을 타고 도망친 후 리처드 갸렛이라는 농부의 집에 머물다 링컨을 살해한지 12일 후 출동한 연방군에게 포위되었다. 부스는 항복을 거부하고 총격전을 벌이다가 사살되었다. 부스의 공범자는 모두 6명으로 그중 4명은 사형, 2명은 무기징역을 받았는데 사형된 사람 중 메리 수랏은 미합중국 설립 이후 최초의 여성 사형수가 됐다. 그의 딸도 공범자로 체포되었으나 아무런 형을 받지 않아 공범자 명단에서는 제외되기도 한다.
부스는 링컨이 악인이며 독재자라고 확신했고 자기들이 정의의 편에 서 있다고 믿었다고 한다. 쫓기던 부스가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신문사였다. 그런데 그는 링컨을 쏜 자기를 영웅으로 생각할 줄 알았는데 그 반대라 매우 놀랐다고 한다.
링컨의 이야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미국 메릴랜드대학교 토머스 스칼리아 교수는 링컨 대통령 사망 당시의 의료 기록 등을 분석한 결과 당시 링컨 대통령이 입은 상처가 소생 불능 상태는 아니었으며 현대 의술이라면 회복에 다소 시간이 걸리겠지만 충분히 소생시킬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범인이 쏜 총탄이 링컨 대통령 뇌를 관통하였으나 호흡과 인식 등 핵심 부위는 건드리지 않아 소생이 가능했다는 설명이다.
스칼리아 교수는 만약 링컨이 오늘 날 저격당했다면 피격 직후 곧바로 병원에 후송해 기도에 호흡관을 삽입하고 소금수를 혈관에 주사해 뇌부기를 가라앉힌 후 CAT를 비롯한 각종 진단으로 뇌속 상황을 정확히 파악 응고된 혈액을 빼내 소생시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당시의 상처라면 일부 실명 증세와 사지 떨림 등이 발생할 수는 있으나 생명에는 지장없고 대화도 가능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링컨이 종교, 특히 기독교에 대해서 부정적이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링컨이라면 그가 신실한 기독교인이었다는 인상을 가지고 있는 반면 일부 역사학자들은 실지로 그가 무신론자였거나, 아니면, 신의 존재를 믿어도, 그 신이 꼭 기독교의 신은 아니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주장한다. 링컨은 우선 평생 교회에 정기적으로 출석한 적이 없다. 또한 그의 수많은 연설에서 신을 언급하거나 성경 구절을 인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기독교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예수를 언급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점이다.
<대통령 부인은 최고급 상복을 입을 의무가 있다>
개인적인 사생활도 관심거리이다. 그것은 링컨 개인의 출세와도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링컨이 결코 가난한 집안은 아니지만 그가 부유한 여자인 메리 토드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결코 대통령까지 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메리 토드는 부유한 은행가 집안에서 태어나 부족함이 없이 자라난 돈 많고 뼈대있는 가문 출신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링컨과 결혼할 때 그녀의 집안으로부터 수많은 반대에 부딪쳤다. 그렇지만 그들은 결국 결혼에 골인하였고 그녀의 헌신으로 링컨은 고향인 일리노이 주에서 변호사로 봉직할 수 있었으며 급기야는 정치의 중앙 무대로 발돋움 할 수 있었다.
사실 미국 역사상 미국 백악관에 입성한 여성 중 메리 토드처럼 콧대 센 여성의 거의 없다는 설명이다. 메리는 추후 링컨의 최대 정치 라이벌이 된 스티븐 더글러스(Stephen Doulas)에게도 구애를 받았을 뿐더러 그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나는 영부인이 될 것이다. 만일 그렇게 되지 않으면 가짜 예언자의 희생자이다. 하지만 적어도 더글러스의 아내는 아닐 것이다.’
링컨이 1846년 하원의원에 당선되었을 때 그녀가 당시의 관행과는 달리 남편과 함께 워싱턴으로 이사한 것도 이색적이었다. 만약 오늘날에 남편과 함께 워싱턴으로 이사를 하지 않으면 논란거리가 될 것이지만 당시 정치인들의 아내 가운데 남편을 따라서 이사를 하는 경우는 삼분의 일 정도에 불과했다.
흥미로운 것은 메리 토트 가문도 결코 노예해방에 찬성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메리 토드의 아버지도 노예 소유주였을 뿐 아니라 여덟 명에 달하는 그녀의 형제와 이복형제들 가운데 단 한 명만 링컨을 지지했고 나머지는 노예해방에 반대했다고 알려진다.
메리 토드가 마냥 링컨에게 헌신을 한 것만은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 그것은 그녀의 선천적인 낭비벽 때문이다. 링컨은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했던 반면에 아내는 씀씀이가 헤펐다. 그녀는 백악관에 입성하자마자 자신의 사치와 낭비벽을 유감없이 발휘하기 시작했다.
남북전쟁으로 모든 면에서 내핍을 강조할 때임에도 그녀는 흰색 바늘뜨개 레이스 숄을 2,000달러에 구입했다. 2,000달러 짜리 가운, 1,000 달러 상당의 캐시미어 솔까지 사들였다. 심지어는 한 달 사이에 84 켤레의 장갑을 구입하기도 했는데 당시 링컨 대통령의 연봉이 2만 5천 달러였다.
당시 대통령 영부인의 자격으로 2만 달러까지는 국고에서 지출이 가능하지만 그 정도로는 택도 없었다. 그녀는 초인종 당김줄, 커튼, 호화 가구, 주문형 카펫, 벽지 등을 사들여 백악관을 장식하여 영부인 예산 2만 달러를 6,700달러나 초과했다.
심지어 그녀는 벤저민 브라운 프렌치 공공건축청장에게 백악관을 새로 단장하려면 예산이 항상 초과된다는 것을 남편인 링컨에게 귀뜸해 달라고 부탁했다. 한마디로 초과된 돈 때문에 자신이 곤란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힘써 달라는 뜻이다.
그러나 백악관을 단장한다는 명목이지만 그것은 결국 그녀의 낭비벽에 의한 초과 지출인 것을 잘 아는 프렌치는 링컨에게 사실대로 보고했다. 링컨은 화를 내면서 말했다.
‘전장에 나가 있는 군인들이 담요 한 장도 없어 고생하는 마당에 대통령이 낡은 집 한 채를 수리하는데 2만 달러를 넘는 지출을 승인한다면 국민들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나는 결코 이 예산을 승인하지 않겠소.’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낭비벽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대통령의 영부인으로서 항상 우아한 옷을 입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수입품을 사 쓰는 것도 관세를 내는 것이므로 국고에 보탬이 되며 애국적인 행동이라고까지 말했다.
그녀의 우아한 옷에 대한 집착은 링컨이 저격당한 후에도 계속되었다.
그녀는 링컨의 장례식 때 가장 검고 가벼운 최고급 상복을 주문했다. 그녀는 의회에 품위 유지비가 필요하다고 탄원했다. 더구나 언론에 도움을 요구하는 광고를 게재하고 자신이 가난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옷을 비롯한 개인 재산을 경매에 부치려고 했다. 국민들이 그녀에 대해 분노를 느끼고 비난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물론 당시 언론은 그녀의 부정적 측면에만 초점을 맞춤으로써 그녀가 야전병원 방문 등 영부인으로서 수행했던 선행까지 무시했다는 비난도 있다. 그 결과 차가운 태도를 지녔던 그녀가 대인 기피증까지 보인 것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는 뜻이다.
결국 연금 법안이 1870년에 의회에서 통과되었다. 연금과 특별금, 그녀가 결혼 전에 갖고 있던 재산에도 불구하고 메리는 자기가 빈털터리로 죽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1882년 64세로 사망할 때 그녀의 재산이 거의 9만 달러나 되었다. 그녀의 재산은 남편이 사망했을 당시 그의 재산보다 훨씬 많았다. 검약이 몸에 밴 링컨은 8만 달러 상당의 재산을 남겼다.
링컨은 정치적으로 가장 성공한 정치가 중에 한 명이다.
그것도 자신의 소신과는 전혀 다른 결정으로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인물이 되었는데 메리 토드의 치닷거리 때문에 항상 고전을 면치 못했다. 바로 그 점이 그를 정치적인 위기에서 구해주었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이다.
그가 대통령에 재임하는 동안에 언론은 링컨 개인에 대한 공격보다는 메리 토드의 낭비벽을 부단히 비난했는데 바로 그것이 링컨의 노예 해방에 대한 모호한 견해를 반박하거나 정치화하는 것을 막아주었다는 뜻이다. 결국 링컨은 현명한 결혼을 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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