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속인 거짓말/단두대

세계에서 가장 자비로운 기계(6), 단두대(길로틴)

Que sais 2020. 12. 6.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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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6세의 처형>

1793121 그는 단두대로 향했다. 루이 16의 왕실 담당 신부인 앙리 에섹스 에지워드 드 피르몽이 직접 단두대까지 루이 16수행한 후 참수 현장을 목격하고 다음과 같이 적었다.

 

단두대로 통하는 길은 몹시 울퉁불퉁해서 걷기가 힘들었다. 은 내 팔에 의지했는데 내가 너무 천천히 걸었기 때문에 나는 단두대까지 걸어가는 사이에 혹시 그가 용기를 잃지나 않을까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단두대에 이르렀을 때 그는 갑자기 내 팔을 놓더니 당당한 걸음걸이로 단두대로 올라갔다.’

 

피르몽 신부루이 16가 단두대 위에 홀로 서 있고, 맞은편에 20개 가량의 북이 배치되어 있었다고 말했다. 북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그는 마지막 연설을 했다. 그런데 갑자기 왕이 크고 분명히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적었다.

 

프랑스 국민이여! 나는 나에게 씌워진 모든 죄목에 대해 결백하고 무죄로 죽는다. 그러나 나는 나를 죽이는 죄를 범한 모든 사람들을 용서한다. 그리고 그대들이 흘릴 피로 인해 이 나라 프랑스고통받지 않게 되기를 신께 기도한다.”

 

루이 16는 할 말이 더 있었으나 처형을 감독하는 싼테르 장군북소리를 키워 왕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하라고 명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이 16는 큰소리로 외쳤다.

 

내 피가 프랑스의 행복을 굳혀 주소서.”

 

싼테르는 왕을 강제로 붙잡아 단두대의 칼날 아래로 끌고 가도록 했다.

 

1793.1.21 루이16세처형(2만명 관중)

한순간에 왕의 머리는 몸에서 떨어져 나갔고 열여덟 살 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가장 앳된 호송대원 한 명이 그의 머리를 집어들고 단두대 주위를 돌며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그 호송대원은 기괴한 의식을 아주 잔학하고 꼴사나운 태도로 거행했다고 피르몽 신부는 적었다.

프랑스의 시인 알퐁스 드 라마르틴1847년에 이렇게 적었다.

 

누가 루이 16를 구할 수 있었을까? 그 누구도 그 무엇도 그를 구할 수는 없었다. 그는 과거의 조정과 왕들이 저지른 온갖 잘못과 패악 때문에 대신 목숨을 잃었다. 왕과 그 왕으로 대변되는 왕정의 죄를 씻기 위해 도살되어야 했던 희생양이었다.’

 

<마리 앙트와네트의 처형>

루이 16가 처형된 후 우여곡절을 겪은 후 같은 해, 마리 앙투아네트1015사형 판결을 받았다. 그녀는 다음 날 새벽 430시누이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나는 방금 사형선고를 받았어요. 당신의 오빠인 루이 16와 마찬가지로 죄가 없기에 나는 그가 마지막에 보여준 확고부동함을 보여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양심이 깨끗한 사람들이 그렇듯이 나는 평온합니다. 나로서 가장 유감스러운 일은 가엾은 아이들을 두고 가야 한다는 점입니다. 내가 오직 아이들을 위해서 살아왔다는 것을 당신은 잘 알겁니다.’

 

1016일 그의 아내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가 흰색 슈미즈를 입고 머리를 모두 깎인 채 처형장에 도착했다. 그녀는 야유하는 구경꾼들을 향해 오만하게 머리를 들었으나 칼날을 보고는 자세가 흐트러지면서 울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군중들이 자신의 불행을 즐기는 것을 알아채자 재빨리 단두대로 걸어 가다가 형 집행자의 발을 밟았다.

 

집행자님. 죄송해요. 실수였어요.”

 

이 말이 그녀의 유일한 마지막 발언이었다. 그녀가 죽고 난 뒤 혁명 재판소는 많은 축하문을 받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심약한 남편을 휘두르며 고국을 위해 스파이 활동을 하여 프랑스를 배신하고, 사생활이 추잡하기 이를 데가 없었으며 심지어 아들과 근친상간을 한 여자.'국민의 피를 게걸스럽게 먹던 거만한 오스트리아 여자의 머리가 마침내 떨어졌다.'

 

마리 앙트와네트의 처형

당시 마리 앙투아네트를 둘러싼 스캔들은 크게 4가지.

첫째드 로앙(Louis de Rohan) 추기경부적절한 관계를 가진 것처럼 조작된 이른바 보석 목걸이 사건’, 둘째 왕실 재정 적자 초래설, 셋째 왕세자 샤를의 아버지가 남편인 국왕 루이 16가 아니라는 소문 그리고 왕세자와 근친상간을 했다는 거짓 법정 증언 등 부지기수였다.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제일 큰 부정적 이미지는 그녀의 사치와 낭비벽에 기인한다. 소박한 성품의 남편 루이 16세와 달리 그녀는 사치품 구입이나 도박 빚 등으로 왕비 연금을 탕진하고 왕에게 손을 벌렸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의 주요 원인정부 재정위기는 당시에 악명이 높은 그녀의 사치 탓인 것만은 아니다. 당시 프랑스 정부의 지출은 언제나 세입의 1.2가 넘는 적자상태였다. 혁명 바로 전 해인 1788년의 왕실 경비프랑스 정부 총지출6%에 불과했다. 미국 독립전쟁 지원 경비 등 전쟁과 외교와 관련한 지출이 25%, 기존 국가 부채의 이자에 대한 지출50%였던 것에 비하면 왕비의 낭비로 인한 왕실의 지출은 재정 위기의 전적인 원인이 아니었다. 또한 도박빚으로 말하자면 왕비보다 그녀의 시동생인 아르투아 백작의 빚이 더 많은 액수였다.

가장 해괴한 것은 마리 앙트아네트를 처형한 죄목에 왕실 재정적자 초래 말고도 어처구니없이 아들 샤를과의 근친상간이 들어있었다. 이 죄는 아들이 법정에서 증언한 내용인데 자코뱅에 속하는 혁명세력코치한 것이다. 혁명재판소는 그녀에게 해명할 시간을 제대로 주지 않았지만 그녀는 하도 어이가 없어 굳이 해명할 생각을 안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당시 샤를의 나이 9.

그녀에 대한 고발은 증거가 제시되지 않았고 무고로 고발한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맞섰지만 판결은 이미 내려진 상태였다. 그녀가 단두대에 오르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었다.

루이16세와 마리앙투와네트처형에 앞장섰던 장본인 역시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대표적으로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 생 쥐스트, 조르주 당통을 들 수 있다. 혁명 당시 쟈코뱅 당을 이끌던 수장격인 로베스피에르는 개인적으로는 강직한 사람이었으나, 정작 정치하는 자리에서는 극단적이고 엄격한 정치를 펼쳤으며 귀족들은 물론이고 동료 정치인들까지도 반혁명분자의심된다면 모조리 단두대로 올려 처형시켰다

 

로베스피에르의 처형

로베스피에르의 동료이자 공포정치 지지자 중 한명인 생 쥐스트'단두대의 천사'라고도 불렸을 정도로 냉혹했는데, 처음엔 국민의 권리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혁명에 방해되는 모든 사람을 죽여야 한다며 극단적인 흑백논리까지 내세운다. 심지어 로베스피에르더러 우유부단하다면서 보다 열심히 사람들을 처형하는것에 앞장서기도 했는데, 그도 역시 로베스피에르와 같이 테르미도르 반동단두대로 공개처형 당한다 테르미도르 반동(Thermidorian Reaction) 또는 테르미도르의 구데타는 프랑스 대혁명 이후 권력을 잡은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숙청하는 공포정치 끝에 결국 살해당한 사건이다.

조르주 당통 역시 로베스피에르와 생 쥐스트와 같이 활동하면서 국민들을 선동하여 혁명을 이끌고 공포정치의 극단적인 지지자였는데 당통뇌물수수 혐의와 반역혐의로 이들보다 먼저 단두대로 올랐다. 처형 당일 그는 로베스피에르에게 다음은 귀하의 차례다라는 말을 남기고 단두대에 올랐다.

이 당시만 해도 단두대는 아직 길로틴으로 불리지 않고 그 기계를 발명한 외과의사 앙투안 루이에 경의를 표하는 의미로 루이에트또는 푸치 푸이존이라고 불렸다. 그러나 곧 프랑스 사람들은 이 공포의 도구를 길로틴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 후의 소문 즉 가짜뉴스는 더욱 가관이다. 길로틴 역시 자신이 만든 길로틴에 의해 머리가 잘려졌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