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속인 거짓말/단두대

세계에서 가장 자비로운 기계(4), 단두대(길로틴)

Que sais 2020. 12. 5.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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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

앙트와네트 왕비가 처형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유명한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이므로 보다 설명한다.

이 사건은 1772 루이 15에게 정부인 바리부인세상에서 가장 값비싼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사달라고 졸라댔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 들어주었던 루이 15궁정보석상 뵈머에게 유럽을 뒤져 가장 좋은 다이아몬드를 가져오라고 했다. 뵈머600개나 되는 다이아몬드를 사 모아 목걸이를 만들었는데 당시에 가격이 200만 리브르나 되었다.

그런데 루이 15가 갑자기 천연두에 걸려 사망하는 통에 보석상이 파산하였고 새로 왕이 된 루이 16와 당시 20살인 앙투아네트는 다이아몬드에 흥미를 갖지 않았다. 문제는 왕비다이아몬드에 흥미를 갖지 않은 것은 물론 오히려 혐오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왕비드 로앙 추기경더욱 싫어했다.

그는 왕비가 소녀였을 때 프랑스 대사로 오스트리아에 와 있었는데 그는 추기경인데도 불구하고 연애 사건으로 악명을 떨치고 있었다. 특히 그는 추기경 자리를 이용하여 뇌물로 큰 재산을 모았는데도 대부분 애인들과의 정사(情事)에 탕진하고 있었다.

로앙 추기경은 오스트리아 공사를 사임하고 귀국하자 왕비자신을 싫어하는 것을 잘 알고 있으므로 앙투아네트에 접근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는 마술사로 유명한 까글리 오스트로와 자칭 백작부인 잔 드 라 모뜨협의했는데 그녀의 처녀시절 이름은 잔 드 생레미로 그녀는 프랑스의 옛 왕가인 발로와 가문 후손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왕족이라는 것을 내세워 드 로앙 추기경에게 자신이 앙투아네트 왕비에게 접근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드 로앙 추기경앙투아네트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므로 그녀가 왕비에게 자신을 추천한다고 해도 별로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라 모뜨는 왕비의 필적을 흉내내어 추기경을 싫어하는 왕비의 마음이 다소 누그러졌음을 보여 주는 가짜 편지를 만들어 보여 주었다.

그런 후 당시 금전적으로 곤란을 받고 있던 왕비에게 값비싼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제공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부추겼다. 그러면서 그녀는 더욱 놀라운 거짓말 솜씨를 발휘했다. 왕비를 만나게 해주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녀의 방법이 일반 상식을 초월한다. 그녀는 앙트와네트와 다소 닮은 소녀를 물색해서 추기경과 이 가짜 왕비가 어느 날 밤에 베르사유궁 정원 안의 어두운 숲속에서 만나도록 주선했다. 한마디로 추기경이 진짜 왕비와 만나는 것으로 착각케 하는 것이다.

 

왕트와네트의 다이아몬드 목걸이

여하튼 라 모뜨의 계략에 의해 드 로앙 추기경이 볼 수 있었던 것은 키와 몸집이 왕비를 꼭 닮은 그림자뿐이었는데, 이 검은 그림자는 그가 무릎을 꿇어 절하자 그의 손에 장미꽃 한 송이를 쥐어 주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추기경으로서는 왕비가 자기를 용서했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므로 라 모뜨가 그에게 루이 15세가 만들게 했던 다이아몬드를 사 달라는 왕비의 편지를 받았을 때 기꺼이 받아들였다. 왕비와의 중계는 당연히 라 모뜨였다.

추기경은 그 목걸이를 사서 라 모뜨 백작부인에게 전했는데 그녀의 남편은 재빨리 보석을 갖고 런던으로 가서 목걸이를 여러 개로 나누어 팔고 런던에 계속 머물렀다.

추기경이 용기를 내어 왕비에게 왜 자기가 사 준 목걸이를 걸지 않았느냐고 묻기까지 6개월이나 걸렸다. 왕비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이 일을 남모르게 쉬쉬하지 않고 의회에서 시비를 가리도록 했다. 라 모뜨 백작부인은 체포되어 유죄판결을 받고 도둑을 의미하는 ‘V(voleuse)’가 찍혀 투옥되었다.

그런데 국민들은 가뜩이나 왕비를 싫어했으므로 오히려 그녀의 결백을 거꾸로 생각했다. 국민들은 추기경이 오스트리아 때부터 왕비의 정부이고 프랑스 국민이 굶주리고 있는데도 왕비는 그 정부로 하여금 엄청나게 값비싼 선물을 하도록 했다고 믿었다.

놀라운 것은 라 모뜨의 행방이다. 그녀는 무고한 속죄양으로 간주되어 한 번 들어가면 절대로 나올 수 없다는 감옥에서 사라졌다. 그녀는 혁명분자들의 도움으로 탈옥한 후 영국에서 자기 결백을 주장하면서 모든 잘못을 왕비에게로 돌렸다.

1793년 왕비혁명재판을 받을 때 라 모뜨 백작부인을 만난 일조차 없으며 자신은 다이아몬드 사건에 전혀 관련되지 않았다고 항변했지만 그녀의 평소 품행을 알고 있는 국민들은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녀가 루이 16를 따라 단두대에서 처형된 것도 이 사건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정설이다.

 

<삼부회의 소집>

1789617 몇몇 개혁적인 귀족들의 후원아래 3신분의 대표단은 그들 단독으로 국민의회를 구성했다. 그들은 헌법을 제정할 때까지 단결하기로 맹세하였고 곧이어 귀족과 성직자들의 세금특혜 철폐라는 결정을 내렸다. 지배 계층에 대한 전쟁 선포나 다름없었다.

이들의 결정에 놀란 루이 16623일 무장병력을 곳곳에 배치한 상태에서 1,200명의 삼부회의원들을 소집했다. 삼부회의는 처음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특권 의식에 사로잡힌 귀족들은 회의 진행 내내 모든 면에서 3신분차별했다. 3신분 대표들은 아무 장식이 없는 수수한 검은 옷을 입어야 했고, 국왕과 귀족, 성직자 대표들이 입장할 때 일어서서 경의를 표해야 했으며, 좌석도 따로 떨어져 있었다. 여기에 빠른 의사 진행을 위해 대표들 가운데서 또 대표를 뽑는데, 3신분의 대표귀족과 성직자들이 지명하겠다고 억지를 부리자 그들의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다. 더구나 3신분이 결정한 세금특혜철폐안이 귀족과 성직자들의 압력으로 무효임이 선언되었다. 물론 3신분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귀족과 성직자들도 합당한 세금만큼은 부과하겠다고 약속했지만 3신분이 생각하는 것과는 원천이 달랐다.

 

삼부회의 소집

그러므로 시민대표들은 회의가 끝났으니 해산하라고 명령했음에도 이를 거부하고 자리를 뜨지 않았다. 궁정의전관루이 16세의 명령을 듣지 못했느냐고 묻자 3신분의 대변인격인 미라보 백작이 나섰다.

 

당신을 이리로 보낸 사람들에게 가서 전하시오. 우리는 지금 백성들의 뜻에 따라 여기 있는 것이고 총칼이 아니면 우리를 여기서 끌어낼 수 없다고 말이오.”

 

학자들에 따라 이 말이 바로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여하튼 궁정의전관3신분의 대표들이 회의장을 떠나지 않는다는 말을 루이 16에게 전하자 그는 몇 분 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냥 내버려 두어라.”

 

루이 16는 비교적 온건한 군주였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은 짐의 통치를 받을 뿐 스스로 통치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의식이 확고한 구시대인물이기도 했던 것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과거에 이 정도의 일 즉 부르주아들의 반발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날 수도 있었다.

 

바스티유 성 함락

그러나 그들도 예상치 못했던 조력자가 나타났다. 바로 민중이었다. 무거운 세금과 심각한 기근에 진절머리가 나 있던 파리의 하층민들이 국민의회를 도와 봉기했던 것이다. 이후 혁명의 불길은 노도와 같이 일어나 714 구세력의 표상이라고도 불리는 바스티유 성공격했다. 이곳은 철통같은 요새이자 탄약고이자 감옥이자 왕권의 상징이었다. 이곳이 습격당했다는 것은 무언가 큰 사건을 예고하는 것이지만 당시 루이 16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베르사유 궁의 숲속에서 사냥을 즐기고 있었다. 그는 그날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오늘은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한가로운 사냥을 즐기던 남편에게 파리에서 발생한 폭력 사태에 대해 설명하며 결정을 신속히 내리라고 재촉했다. 피신하든가 아니면 군대의 선봉에 서서 폭도들을 진압하라는 것이다. 루이 16는 망서렸고 어느 것도 결정하지 못하고 있던 차에 국민회의 의장이자 국민의회에 의해 파리 시장에 임명된(파리 시장의 임명권은 국왕에 있으므로 이는 불법이다) 장 실뱅 베일리(J. S. Bailly)는 왕에게 3의 길파리로 오라고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파리를 잃는다고 말했다.

루이 16는 결국 파리로 가기로 결정하고 유서를 작성했다. 그의 마차가 시청 앞에 도착하자 국민의회 간부들이 그를 정중히 맞았다. 루이 16가 시청의 창문으로 다가가 군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대중들에게 이렇게 한 마디 했다.

 

내가 그대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믿어도 되노라.”

 

그러나 한 번 노도와 같이 일어난 소위 시민 혁명은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고 프랑스는 한마디로 무정부 상태였다. 공권력은 사라졌기 때문에 대지주와 영주들은 사병들을 모아 시민들의 노략질을 막기에 급급했다. 그것은 2년 동안 계속된 흉작으로 기근이 만연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인권선언문

178984 이런 혼란의 와중에 국민의회미국의 독립선언문에서 차용한 인권선언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을 발표하고 왕에게 서명할 것을 요청했다. 1조와 제2는 다음과 같다.

 

1: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한 권리를 갖고 태어났고 죽을 때까지 그 권리를 유지한다.

2: 국가의 목표는 자연적이고 양도할 수 없는 인간의 권리를 보전하는데 있다. 이러한 권리는 자유사유재산안전압제에 대한 저항의 권리를 말한다.

 

인권선언문은 왕귀족성직자 계층에 대한 강력한 도전이며 왕의 권위치명상을 주는 것임에도 루이 16는 결국 인권선언서에 서명했다. 학자들은 루이 16가 서명한 이유는 최소한 왕위를 지키기 위한 행동이었다고 평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