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도 우아하게〉
루이 16세가 길로틴의 앞에 오른 것은 길로틴이 등장한지 9개월 후인 1793년 1월 21일이었다. 루이 16세는 1789년 파리 대혁명이후 1791년 프랑스를 탈출하여 외국으로 피신하기로 결정했다. 태자에게는 여자 옷을 입히고 왕과 왕비는 하녀로 변장했다.
철저하게 준비한 도주 계획은 성공할 것처럼 보였지만 프랑스 동부 도시 바렌에서 쉬다가 발각되어 곧바로 파리로 압송되었는데 여기에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왕비병이 문제였다.
1791년 4월까지 대체로 평온하게 루이 16세는 가족들과 함께 지낼 수 있었다.
그런데 4월 온건파의 대부 미라보 백작이 사망하고 로베스피에르가 이끄는 급진 성향의 자코뱅당이 집권하자 루이 16세는 마침내 도주하기로 결정했다. 이들의 목표지는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친가인 오스트리아였다.
탈출 사건이 궁극적으로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처형되는 요인 중 하나이다. 그들은 외국의 보수 세력만이 왕정을 구해줄 수 있다고 믿고 치밀한 탈출계획을 세운 후 프랑스를 탈출하려다 발각되었기 때문이다. 엄밀하게 말해서 그들이 프랑스를 탈출하는 것은 당시의 여건을 볼 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폴레옹의 실각 후 왕으로 복귀하는 루이 16세의 동생 루이 18세도 마차를 타고 프랑스를 탈출하는 데 성공했고 당시에 수많은 귀족들이 목숨에 위협을 느껴 탈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탈출에 성공하지 못한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그들도 파리를 탈출하는데는 성공했지만 국경을 넘기 직전에 신분이 탄로나 강제로 송환된 것이다. 이 탈출극으로 왕에 대한 이미지가 나빠지고 결국 죽음을 자초했지만 그들의 탈출이 실패로 돌아가게 된 이유 중에 가장 큰 원인은 앙트와네트의 왕비 병이 한몫을 단단히 했다.
그녀는 프랑스를 탈출하는데도 왕비답고 우아하게 처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측근들이 그들이 탈 마차는 작고 속도가 빨라야하며 물건들도 최소한으로 줄여야 한다고 권고했지만 막상 마차를 제작하는 단계에서 앙투아네트가 자신들의 휴대품을 모두 갖고 가야한다고 고집했다. 그녀는 자신의 화장도구, 가구, 식기류, 술도 갖고 가야하며 변기도 두 개나 설치하도록 명령했다. 화장실(변기)이 두 개나 갖추어진 것은 아무리 탈출하는 처지라도 프랑스의 왕이 길가에서 용변을 본다는 것을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여하튼 그녀의 모든 조건을 만족시키다보니 당연히 거대한 마차가 되었다. 12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에 루이 16세 일가 5명에 7명의 하인이 탈 수 있었는데 요즈음 말로 말하면 거대한 버스와 마찬가지의 규모였다.
결국 이러한 거대한 마차에다 수행하는 마차 한 대까지 곁들여 졌으므로 그들의 이동이 눈에 띄지 않을 리 없었다. 사실상 그들이 프랑스 국경까지 갈 수 있었던 것도 엄청난 기적이었다. 더구나 천진난만한 왕 일가족은 파리를 벗어나자 긴장이 풀려 마차를 세우고 산책까지 즐겼다고 한다.
<루이 16세 재판>
루이 16세를 체포했지만 관건은 루이 16세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국민의회 의원들도 왕이 백성들로부터 인간적인 동정을 받고 있다는데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인간적인 동정은 혁명에 장애가 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은 그들이 함부로 처리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었다.
의회는 결국 묘수를 강구했다. 왕이 도주한 것이 아니라 납치되었다는 것이다. 이때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로 도주한 부아예 후작은 루이 16세가 체포된 직후 국민의회에 편지를 보내 왕은 잘못이 없고 자신이 왕을 납치했다고 알리바이까지 만들어주었다. 사태 확대를 바라지 않던 국민의회로서도 환영할 일로 결국 의회는 형식적으로 왕을 조사한 뒤 무죄 석방했다.
그후 우여 곡절이 있었으나 루이 16세는 개정된 헌법에서도 왕위를 인정받았다. 물론 국민의회는 격렬한 논쟁 끝에 왕의 다른 권한은 전부 박탈하지만 의회 결정에 대한 거부권은 인정하기로 했다. 국민의회가 그들의 왕인 루이 16세와 다소 타협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왕이 두 번이나 거부권 행사한 것이 문제였다. 그는 망명객들을 제재하는 법률안과 성직자 계급에 관한 법안이었다. 첫째 법안은 프랑스로 돌아오지 않는 사람은 전 재산을 몰수하고 목숨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둘째 법안은 성직자들도 일반 국민으로서 법과 종교의 자유를 존중하겠다고 맹세해야 하며 만일 이 맹세를 하지 않는 사람은 반역 혐의가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루이 16세가 이 두 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자 <국민의회> 내에서 군주제 폐지를 주장하자는 목소리가 커졌고 결국 1792년 6월 20일 파리 군중들이 왕이 있는 튈르리 궁전으로 쳐들어갔다. 이곳에서 성난 군중과 대면하게 된 루이 16세는 평소와는 다른 당당한 태도로 그들을 맞이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두렵지 않다. 교회의 성사도 마쳤다. 그러나 나는 그대들의 왕으로 법과 헌법이 내게 부여한 권한(거부권)을 행사한 것뿐이다.”
루이 16세의 당당한 태도에 군중들은 순수히 물러났다. 그러나 7월 6일 결국 국민의회에서는 피에를 베르뇨가 군주제 폐지를 요청했다. 그런데 루이 16세는 군주제를 양보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특히 프랑스 혁명에 우려를 표명하고 프랑스에 전쟁을 선포한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연합군이 파리 인근인 상퍄뉴 지방까지 진격했다는 소식을 듣자 더욱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1792년 8월 10일 시민군은 루이 16세가 있는 튀를리 궁을 공격했다.
이때 교황청 근위대가 시민군에게 총격을 가했고 1,000명 이상의 시민이 살해되었다. 그러나 성난 군중의 힘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고 근위대 중의 절반이 살해되었다. 더구나 1792년 9월 2일 베르됭이 프로이센군에 함락되었고 점령군이 프랑스 왕가의 상징인 백합 문양 깃발을 게양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파리 시민들을 루이 16세를 계속 살려두는 것은 위험하다고 그의 처형을 요청했다. 침략자의 승리를 기대하는 왕을 프랑스 군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국민공회는 군주제의 철폐를 결의했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체포된 후 프랑스 혁명에 반대한 죄와 외국과 결탁하여 프랑스를 넘기려고 한 죄로 기소 당했다. 그러나 정권을 잡은 쟈코벵당과 지롱드당은 그들의 군주였던 왕과 왕비의 처리에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로베스피에르의 쟈코뱅당은 비천한 자는 남의 호주머니 하나만 털어도 사형을 당하는데 루이 16세는 전 프랑스를 내란에 몰아넣고 나라를 외국에 팔아먹으려고 했으므로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주장을 편 반면에 지롱드당은 자신의 군주였던 루이 16세를 죽이고 문명국들의 지탄을 받아야 하는가를 고민했다.
그런데 한 자물쇠장이 밀고에 의해 왕과 왕비가 외국인들과 밀통했다는 의외의 사태가 폭로된다. 이에 루이 16세의 재판이 시작되었는데 그에게 붙여진 죄목은 모두 57개조나 되었다. 국민공회의 기소 요지는 루이 16세가 왕위에 있을 때 여러 가지 언동, 외국과의 음모 등을 통해 왕위를 영구히 차지하려고 획책했다는 것이다.
루이 16세는 1792년 12월 처음으로 재판에 나왔다. 루이 16세에 대한 고발은 다음과 같다.
‘루이. 당신은 독재를 위해 백성들의 자유를 짓밟았다. 이에 프랑스 백성은 당신을 수많은 범죄 혐의로 고발한다.’
그러나 루이 16세는 프랑스라는 거대한 국가를 통치하던 왕이었다.
루이 16세는 적들도 인정했듯이 재치있게 자신을 변호하며 변호사를 요구했다. 갑론을박이 있었지만 결국 중재안이 채택되어 루이 16세가 세 명의 변호사를 고용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다음 재판부터는 루이 16세가 참석하고 변호사가 그를 변호하면서 <국민공회> 의원들의 약점을 공격했다.
“나는 여러분 중 어떤 분이 판사인지 찾고 있습니다만 고발자만 보이는군요. 여러분은 루이 16세의 운명을 결정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생각은 이미 전 유럽이 알고 있습니다. 루이는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유일한 프랑스인입니다.”
변호사 세즈의 변론이 깊은 인상을 남기자 로베스피에르 등은 루이 16세에 대한 동정적 여론을 봉쇄하기 위해 곧장 판결을 내리라고 재촉했다. 다수의 <국민공회> 의원들은 재판의 진행이 너무 빠르다며 “우리는 그의 재판관이지 형리가 아니다.”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마침내 1793년 1월 중순 세 가지 핵심 문제에 대한 최종 투표가 있었다.
① 루이 16세가 백성의 자유를 침해하고 국가 안보를 위협한 반역의 혐의가 있는가?
② 백성들은 이 판결을 옳다고 인정할까?
③ 루이 16세는 어떤 벌을 받아야 할까?
첫 번 째 질문에는 거의 모든 의원들이 유죄를 인정했지만 둘째 질문에 대해서는 대부분이 부정했다. 여하튼 재판은 당시의 정치 상황에 따라 난전을 벌인 후에 721명의 의원이 기명으로 투표를 했는데 결선 투표 결과 387명의 의원이 사형에 찬성했으며 이는 과반수에서 53표가 초과한 것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 26명은 은사를 조건으로 했기 때문에 사실상 단 한 표 차로 왕의 사형이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이와 같이 세계 역사상 가장 극적이고 운명적인 결선 투표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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