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속인 거짓말/단두대

세계에서 가장 자비로운 기계(3), 단두대(길로틴)

Que sais 2020. 12. 5.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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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두대의 발명자 루이 16

길로틴 모형최초의 처형이 있은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 파리의 거리에서 장난감이나 기념품으로 시판될 정도로 인기를 얻었다. 남자들은 몸에 단두대 문신을 하고 다녔고 여자들은 단두대 모양의 귀걸이나 브로치 같은 장신구를 구입했으며 접시와 컵, 담뱃갑 등에도 단두대 문양이 새겨졌다.

단두대루이16는 여러 면에서 연계된다.

처음 발명된 단두대는 날이 반월 모양이었는데, 길로틴 박사루이 16의 측근에게 보여주면서 힘 안 들이고 사형을 집행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후 루이 16가 직접 그 축소모델을 시찰할 때 반월형 칼날을 보고 루이 16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렇게 반월형이면 중간에 목뼈가 걸려서 쉽게 안 죽을 뿐더러 처형했을 때 죄수가 고통스럽게 죽게 된다. 그러니까 이렇게 약간 기울어진 칼날로 바꿔보면 어떤가?’

 

학자들은 오랜 기간 열쇠와 자물쇠, 칼날 쪽으로 취미를 가지고 있던 루이 16전문가적 조언이라고 평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단두대의 최종 결정자발명자루이 16라는 것이다.

당시의 국왕 루이 16단두대 모형을 보고 인간을 처형하는데 품위를 유지할 수 있게되어 매우 훌륭한 기계라고 말했다. 이 유용한 기구를 제작하기 위해서 국가는 혁명 발발 후 경제적으로 파산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1792700만 리브르나 되는 거액을 지출했다. 그 후 프랑스 혁명기간에만 35,00040,000 의 머리가 길로틴에 의해 잘려졌다. 이 속에는 프랑스 왕인 루이 16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머리도 포함되어 있는데 대부분 길로틴하면 이들 두 명을 연상하게 되므로 이들 처형에 대해 보다 설명한다.

 

<프랑스의 재정 파탄>

루이 16세의 불행은 그가 전제군주로는 너무나 선량하고 검소한 악의가 없는 그야말로 착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는 학정과 폭압으로 백성들의 원성을 산 군주도 결코 아니었다. 백성들에게 처형당할 만한 짓도 하지 않았다. 그의 성품줏대가 없고 약간 게으르며 정신적으로 편협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당대의 여타 군주들에 비해 장점이면 장점이었지 결코 단점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는 위대한 프랑스라고 자랑하는 프랑스에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패배자 중의 패배자이다.

그의 불행은 왕이 될 것으로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는데 갑작스럽게 왕이 되었다는 점이다. 당시 루이 16에게는 그의 할아버지인 루이 15의 아들인 아버지와 두 형이 그보다 왕위 계승 서열이 높았다. 그런데 아버지를 포함해서 두 명의 형이 너무 일찍 숨을 거두었으므로 열한 살 때 루이 15세의 맏손자로서 갑자기 프랑스 왕세자책봉되었다. 어머니는 작센 선제후의 딸마리 조세프였고, 남편 사후 2년 뒤에 남편과 같은 결핵으로 죽었다.

문제는 그가 왕이 되리라고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에게는 왕세자에게 어울리는 교육이 부족한 상태였다. 더구나 1770년 루이 15열다섯 살의 손자를 오스트리아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열네 살 막내딸결혼시켰다. 그녀가 유명한 마리 앙투아네트. 아름답지만 다소 경박한 성품앙투아네트는 기질 면에서 남편을 압도하려고 했는데 결론적으로 그것이 루이 16세와 자신을 파멸의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요인이었다.

 

루이16세

루이16가 즉위했을 때 그는 증조할아버지인 루이 14프랑스 재정을 파탄 낸 것을 잘 알기 때문에 궁중생활에 들어가는 막대한 경비를 절감시키는데 주력했다. 원래 사치스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은 것도 있지만 유명한 경제학자 안느 로베르 자크 튀르고(Anne Robert Jacques Turgot)재정책임자로 임명하여 전권을 위임했기 때문이다. 루이 16로서는 다소 의외인 과단성 있는 결정으로 튀르고는 즉시 강력한 긴축 정책을 추진했다. 게다가 농민들의 부역을 줄이고 길드의 강제 가입제도를 폐지하며 지방에 자치권을 부여하려는 등 개혁의 선봉에 나섰다.

그러나 이러한 과감한 정책은 당시의 기득권 세력이라고 볼 수 있는 귀족과 성직자들의 반발을 샀다. 특히 루이 15가 프랑스 재정을 파탄시킨 것이 그의 짐이었다. 루이 15는 미국에서 프랑스의 앙숙인 영국에 대항하여 독립전쟁이 일어나자 미국식민지지원했는데 이때의 전비가 상상을 초래할 정도로 많이 지출되었다. 국고가 바닥나고 더 이상 다른 나라로부터 차관을 끌어다 쓰는 것이 불가능하자 프랑스국내 세금을 인상하는 수밖에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세금 인상주된 납세자중간층과 하층 계급에게 보다 많은 고통을 안겨주는 것이었다. 당시에 먹을 빵도 없어서 빵을 달라는 폭동이 끊이지를 않았는데 이들에게 세금을 올린다는 것은 그야말로 벼룩의 간을 떼겠다는 말이나 다름 아니었다.

 

제3신분이 사슬을 끊고 무장하는 것을 보고 놀라는 제1신분과 제2신분

 

<적자 부인 마리 앙투아네트>

프랑스 국고재정이 엉망으로 치닫자 국왕 루이 16는 새로운 개혁안을 제시한다. 3계급인 평민만이 아닌 귀족들에게 세금을 부과하겠다는 것이다. 프랑스는 루이 16 치세 12년 동안 무려 125천만 리브르란 천문학적 숫자의 빚을 짊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2계급인 귀족들은 자신들의 특권인 세금 면제 권한에서 양보할 수 없다며 세금 납부거부했다.

루이 16는 결국 3부회의소집하지 않을 수 없었다. 3부회의성직자, 귀족, 평민 세 계급으로 구성된 의회로 왕권의 약화와 귀족의 특권 강화를 위해 구성된 것이지만 세금 인상과 같은 중요한 안건을 결정할 때는 꼭 소집되어야 한다고 법으로 명시되어 있었다.

 

적자부인 마리 앙투와네트

문제는 국민들이 세금을 인상해야 하는 근본 요인이 루이 16의 왕비인 마리 왕투아네트의 낭비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는 점이다. 15세의 루이와 14세의 마리 앙투아네트는 베르사유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마리 앙투아네트오스트리아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딸이었다. 한때 오스트리아 계승을 놓고 겨루기도 했던 부르봉가와 합스부르크가를 대표하므로 이들이 하나로 맺어진다는 것은 유럽의 중심 세력이 이들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마리 앙트와네트는 남다른 매력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천성적인 애교와 상냥함 그리고 명랑한 기질이었다. 그러한 성격을 갖고 있으므로 고지식한 성직자나 가정교사들과는 기본적으로 잘 맞지 않았다. 그녀에 대한 평은 거의 빵점이나 마찬가지다.

 

지능이 높은데도 생각하기를 워낙 싫어하며 진지한 대화는 늘 건성으로 흘려듣기 일쑤였다. 집중해서 무엇을 읽는 일 또한 도무지 잼병이다.’

 

그녀의 어머니인 마리아 테리지아마리 앙트와네트의 소양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므로 자신이 전해준 행동지침서를 꼭 읽고 기도와 독서를 게을리하고 경망스럽게 처신하거나 게으름에 빠지면 안 된다고 조언할 정도였다. 그러나 마리 앙트와네트의 문제는 사실 그녀의 탓만도 아니다. 우선 프랑스가 그녀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것은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결혼동맹으로 오스트리아프랑스보다 훨씬 많은 이득을 얻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오스트리아는 숙적인 프로이센을 견제할 지원을 얻은 셈이다. 더구나 프랑스를 통치하는 부르봉 가문의 후계자합스부르크 가문의 혈통에서 나온다는 점도 문제였다. 자존심이 강한 프랑스 귀족들에게 이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은 아니었다.

설상가상으로 그녀를 곤혹스럽게 만든 것은 루이 16세의 성적 무능력 때문이다. 의사들의 진찰에 의하면 그의 성적무능력은 큰 문제가 아니라 사소한 결함 때문이었다. 의사들은 간단한 포경수술이면 충분하다고 했는데 이 문제는 7년 후 비로소 해결되었다. 루이 16수술을 이리저리 미뤘기 때문인데 이 일만 보더라도 루이 16세의 우유부단을 알 수 있고 앙트와네트로서는 불만이 아닐 수 없었다.

 

 

결혼한 지 7년 후 루이 17세가 태어나지만 마리 앙트와네트남편의 무능력에 대한 한을 사치로 풀었다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일이다. 그런데 앙투아네트는 유럽을 대표하는 오스트리아의 공주답게 낭비에 관해서도 제국의 수장급이었다는 점이다. 그녀의 낭비가 어찌나 심했던지 적자 부인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그녀의 사치는 사실 도를 넘어섰다. 겨울이면 각종 장신구는 물론 12벌의 화려한 야회복, 12벌의 무도복, 12벌의 평상복에다가 여름에는 여름에 알맞는 드레스를 따로 주문했다. 야회복에는 수많은 금이나 진주로 수놓았다.

그녀는 디자이너들이 제안하는 사치를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디자이너는 그녀의 낭비벽을 잘 알고 있으므로 달마다 새로운 색깔이나 아이디어제안했다. 그들이 제시한 색깔 중에는 1776에 등장한 벼룩 색깔이라는 다갈색도 있었다. 많은 여성들이 왕비를 흉내내 비싼 의상을 사들이기 시작하자 귀족 남편들이 노골적으로 불만을 터트릴 정도였다.

앙투아네트1년 사이에 전담 디자이너에게 87,600리브르, 영국인 승마복 재봉사에게 31,000프랑을 지불했다는 것을 알고 자신도 놀랐다고 한다.

사실 앙투아네트는 당시의 유행을 이끈 여성이기도 하다. 머리를 최소한 30센티미터 이상 올려 500그램 정도의 분과 포마드를 바른 뒤 그 위에 관을 씌워 깃털, 리본, , 다이아몬드 등을 꽂은 헤어스타일도 유행시켰다. 헤어스타일 외에 그녀가 관심을 기우린 것은 춤으로 그녀는 우아한 춤을 보급시킬 의무가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한 번은 연간 지출액을 배나 초과했는데도 20만 프랑에 상당하는 팔지 한 벌을 구입한 후 남편인 루이 16세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 왕은 마지못해 돈을 주었다. 그녀의 낭비벽을 보다 못한 오스트리아의 왕비인 어머니 마리 테레지아가 낭비하는 버릇을 고치라고 타이르자 그녀는 자신의 낭비벽이 따분함을 풀어주는 오락이다라고 변명했다. 인생의 유일한 지침이 낭비이므로 프랑스의 왕비로서 그런 정도의 지출은 당연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녀는 낭비벽 때문에 받은 가장 큰 모함빵 문제. 파리에서 백성이 빵을 달라고 폭동을 일으키자 앙투아네트빵 대신 과자를 먹으면 될 것 아니냐?반문했다는 것이 다. 그러나 학자들은 앙투아네트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은 근거 없는 낭설이라고 확신한다.

문제는 워낙 큰 파문을 갖고 왔으므로 학자들이 드디어 그 인용문의 장본인을 찾아냈는데 그것은 루이 14세의 왕비였던 스페인 왕가 출신 마리 테레즈가 한 말이다. 그래서 마리 앙투아네트가 왕비가 되기 20년 전에 이미 장 자크 루소고백론에서 이 말을 풍자적으로 인용했다. 루소는 그 책에서 그런 말의 진원지가 젊은 공주라고 적었다. 후대로 갈수록 가장 많이 거론되는 앙트아네트에 대한 비난은 그녀와 전혀 관련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말이 앙투아네트를 연상시키면 바로 떠오르는 것은 그녀가 그런 말을 유발시켰다고 생각해도 전혀 무리가 아니라고 많은 사람들이 느꼈기 때문이다. 그만큼 그녀는 경박스러운 생활을 한 것이다. ‘모르는 것이 약이다라는 말이 있지만 사실 이처럼 위험한 말은 없다. 실제 모르는 것이 죄가 되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한 나라를 책임지고 이끌어갈 위정자와 그 측근들이 일반 민중의 삶모른다면 그것은 죄를 넘어서 악이 된다. 국가의 정책을 결정하는 당사자가 아무것도 모르고 한 일이 일파만파가 되어 나라 전체를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것은 역사가 잘 증명한다. 마리 앙트아네트가 바로 그런 경우다.

문제는 그녀가 프랑스 국민들이 빈곤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점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녀는 자신의 낭비 자체가 국민들을 위한 것이라고 믿었다. 무지도 그런 무지가 없는데 그녀의 측근들은 오히려 그녀를 부추겼다. 그녀가 오직 귀족사회의 풍요로움에 대해서는 잘 알았지만 국민들의 고통을 몰랐다는 것은 변명이 아니라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