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1년 10월 아프리카 오지인 우지지에서 영양실조와 말라리아로 거의 죽음을 눈앞에 둔 리빙스턴(1813〜1873) 박사가 미국의 스탠리(1841〜1904) 기자에 의해 발견된 것은 아프리카 탐험 사상 가장 극적인 사건 중에 하나로 알려진다. 이들의 만남이 아프리카 탐험사상 가장 가슴이 벅찬 장면으로 알려지는 것은 그들이 만날 수 있는 확률은 모래사장에서 바늘을 찾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의 만남은 아프리카로서는 가장 불행한 순간인 동시에 지구상에서 가장 사악한 사건이 태동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것은 리빙스턴이 스탠리와 헤어지면서 자신이 탐험한 지역을 그린 지도 한 장을 스탠리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리빙스턴은 틈날 때마다 자신이 탐험한 곳을 지도로 만들었다.
미지의 아프리카 대륙이 그의 발길을 따라 조금씩 베일을 벗어간 것인데 그가 스탠리에게 자신이 평생을 걸쳐 탐험한 지도를 준 목적은 매우 단순하다. 자신이 그동안 신봉한 아프리카의 기독교화와 노예사냥 금지에 힘을 써 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리빙스턴이 선의의 목적으로 스탠리에게 준 한 장의 지도는 아프리카 현대사를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 스탠리는 지도를 받자마자 꼼꼼하게 그려진 지도의 중요성을 곧바로 간파했고 이를 이용하면 큰 재산을 모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리빙스턴의 지도야말로 서방세계가 갖고 싶어 했던 정보 즉 아프리카를 식민지화 할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가 된 것이다.
〈리빙스턴도 놀란 아프리카 탐험가의 명성〉
리빙스턴은 1813년 스코틀란드 라나크셔주 블란타이어에서 가난한 니일 리빙스턴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리빙스턴의 가정은 두세대에 걸쳐 스코틀랜드의 블랜타이어의 방적공장에서 일해 왔으며, 그의 아버지 니일은 차(茶)를 파는 행상으로 일했다. 리빙스턴도 10세부터 지방 면직공장의 방적공으로 일했지만 그의 의지는 남달라 야간학교를 다니면서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공부했다.
18〜19세기 영국에서는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의 열정적인 선교활동으로 교회 선교회(Church Mission Society, CMS)들을 설립했는데, 소년 리빙스턴은 중국 의료선교사를 꿈꾸고 있었다. 그러므로 리빙스턴은 시간제로 공장에 근무하면서 독학으로 글래스고의 앤더슨 대학교에 들어가 신학과 의학을 공부하고 ‘런던 선교회’에 가입했다.
그러나 1839년 중국에서 벌어진 아편 전쟁 때문에 중국에 선교사로 갈 수 없게 되었다. 리빙스턴은 이에 좌절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개척하여 1840년에 의사면허를 받았고 성 올번즈 교회로부터 정식으로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그러자 아프리카 남부에서 선교하던 모패트(Robert Moffat, 1795-1883) 목사가 그의 생각을 읽고 중국의 선교가 불가능하므로 아프리카 전도에 도전하라고 조언했다. 모패트 목사는 남아프리카 선교회(South African Missions, SAM)의 창시자다. 리빙스턴은 곧바로 이에 동조하였고 런던 전도 협회의 의료 전도사로 1841년 3월 케이프타운에 도착하였다.
리빙스턴은 40일 동안 1,100㎞를 걸어서 모펫 목사가 활동하던 쿠루만(Kuruman)에 도착했다. 그는 전도를 위해서는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말과 풍속을 익혀야한다며 크루만에서 7달을 머물면서 토박이말과 풍습을 익혔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용감하더라도 아프리카는 아프리카였다. 호기심으로 백인들이 가 본적이 없는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다가 리빙스턴은 사자에게 습격당한다. 이때 왼쪽 어깨뼈가 으스러져 평생 왼팔을 위로 쳐들지 못하는 불구자가 되었다. 그는 ‘그 사자는 마치 테리어개가 쥐를 다루듯이 나를 흔들어댔다.’고 말했다. 이후에도 그는 수많은 부상을 당했다.
그런 리빙스턴에게 행복한 순간이 찾아왔다. 1845년, 모패트 목사의 딸인 메리와 결혼한 것이다. 이 결혼은 리빙스턴으로서는 행운이었다. 그녀는 아프리카에서 태어났으므로 원주민 말도 잘해 리빙스턴이 아프리카에서 정착하는데 가장 큰 힘이 되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쿠루만에서 보다 북쪽인 콜로벵(Kolobeng)이란 작은 마을에 정착하면서 틈 날 때마다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지도를 그리고 토인들에게 농사짓는 법도 알려 주었다. 어느 정도 아프리카에 익숙해지자 1849년 6월 리빙스턴은 칼라하리(Kalahari) 사막을 건너 북쪽에 정착하여 의술을 베풀고 새로운 곳을 탐험하겠다고 발표했다.
그 소식을 들은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미친 짓이라며 그를 말렸다. 사막이 끝나는 곳은 풀 한 포기 없는 곳이며 사막을 넘는다는 것 자체가 무모한 짓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내 메리의 적극적인 협조를 받으면서 칼라하리에 도전하여 악전고투 끝에 60일 만에 사막을 건넌 리빙스턴과 그 일행은 그만 놀라고 말았다.
그곳은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곳이 아니라 수많은 푸른 들판과 동물들이 있는 낙원이었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엔가미 호수에 대해 <왕립지리학협회>에 보고했고 학회는 그에게 금메달을 수여했다. 그 후 리빙스턴은 협회와 긴밀한 협력을 유지하면서 지리적 탐험에 보다 큰 관심을 갖기 시작해 틈나는 대로 오지를 탐험하는데 시간을 바쳤다.
특히 콜로벵으로 돌아 온 리빙스턴은 이번에는 부인과 세 아이들을 데리고 엔가미 호수 북쪽인 마콜롤로(Makololo)로 향했다. 하지만 동행한 가족들의 잦은 병 치례로 그들을 영국으로 보냈는데 그들이 콜로벵의 집을 비운 사이 토인들을 잡아 팔던 네덜란드계 보어(Boer)인들이 마을을 습격하였다. 리빙스턴으로서는 다행한 일로 리빙스턴은 다른 길을 이용하여 마콜롤로에 도착했다.
리빙스턴은 여세를 몰아 1853년 잠베지 강의 탐험에 나섰다. 강의 물줄기를 찾아 서쪽으로 가면 대서양이 나오리라는 생각에서였다. 그의 생각은 유럽인들에게 그야말로 엄청난 호응을 얻었는데 한마디로 아프리카를 벗어나기 위해 유럽에서 케이프타운까지 먼 길을 돌아가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여행이 순탄하지는 않았다. 리빙스턴 일행이 치보크 마을을 지나가려 할 때, 그 마을의 토인들이 일제히 창을 들고 나와서 일행을 막아섰다. 마을을 지나가려면 두 사람의 토인을 두고 가라는 것이다. 리빙스턴이 강경하게 거절하자, 토인들은 그를 죽이려고 창을 쳐들었다.
리빙스턴은 그들에게 총을 겨누고, 토인 대신 소 한 마리를 주겠다고 제안하여 다행히 위기를 모면했다. 그에 의해 구출된 토인들은 그를 추장에 대한 경칭인 ‘빠빠’고 불렀다고 한다. 이후 사나운 토인들의 많은 방해와 온갖 어려움이 있었지만 1854년 드디어 포르투갈의 식민지 항구 루안다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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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오지에서 서해안으로 나가는 길을 발견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여행으로 쇠약해진 리빙스턴은 영국 군함으로 옮겨져 간호를 받았다. 몸이 완쾌되자, 여행 중에 조사한 지리, 동물, 식물, 그리고 각 지방의 토산물을 자세하게 기록하여 영국으로 보냈고 영국으로부터 폭발적인 반응을 받았다.
다시 자신의 근거지인 마콜롤로 마을로 돌아온 리빙스턴은 이번엔 동해안으로 가는 길을 선택했다. 그가 도착했던 잠베지 강은 대서양까지 연결되지 않는데다 서해안으로 가는 길이 너무 먼 것은 물론 사나운 종족들이 도처에 있기 때문에 새로운 여행 계획을 세운 것이다.
그의 집념은 결실을 맺어 드디어 ‘천둥치는 연기’라는 의미의 '모시오아투니아 폭포'에 도착했다. 강물이 엄청나게 큰 폭음을 내며 두터운 베일 같은 물보라를 치기 때문인데 토인들은 폭포에 무서운 요술쟁이가 살고 있어서 가까이 가면 연기가 된다고 생각했다.
연기의 정체는, 바로 너비 1,700미터, 높이 100미터가 넘는 엄청나게 큰 폭포였다.
빅토리아 폭포는 미국의 나이아가라 폭포의 두 배 크기로 리빙스턴이 발견했다고 하지만 과거부터 아프리카인들은 이 폭포를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가 빅토리아 폭포를 발견한 것은 마콜로로 족의 젊은 부족장 세켈레투가 이끄는 약 200명의 부족민들이 그를 이끌었기 때문이다. 리빙스턴은 카누로 이루어진 선단을 타고 잠베시 강을 따라 동쪽 해안으로 항해하다가, 먼 곳에서 천둥 치듯 울려오는 폭포의 소리를 들었다.
10㎞ 떨어진 곳에서 그들은 솟구쳐 오르는 물보라의 기둥을 볼 수 있었다. 폭포 가장자리에 있는 한 섬에 상륙했고 리빙스턴은 아래편으로 펼쳐지는 믿을 수 없는 장관을 바라보았다. 리빙스턴은 이 폭포에 영국 여왕의 이름을 따서 ‘빅토리아 폭포’라는 이름을 붙였다. 훗날 그는 빅토리아 여왕에게 자신이 아프리카에서 목격한 '가장 놀라운 광경'에 대해 구술했는데 W. 레이드 딕이 조각한 리빙스턴의 동상은 빅토리아 폭포에 있는 마을 외부에 1934년에 세워졌는데 물론 ‘악마의 폭포'를 바라보며 서 있다.
그리고 1856년 5월 마침내 잠베지 강이 인도양으로 흘러드는 곳, 켈리마네에 다다랐다. 리빙스턴은 16년 만에 아프리카 동서를 가로지른 최초의 유럽인이 되었는데 이를 ‘리빙스턴의 제1차 탐험’이라고 한다.
물론 리빙스턴이 최초로 동서를 가로지른 사람은 아니다. 학자들은 리빙스턴보다 50여 년 전에 혼혈 노예상인 페드로 바티스타와 아나스타시오 호세가 중앙아프리카를 횡단했다고 인정한다.
1856년 12월 리빙스턴은 자신이 탐험한 것을 학회에 보고하기 위해 영국을 방문했다. 그런데 그는 영국에 도착하자마자 국민적인 영웅으로 환영을 받았다. 국민들의 환대에 어찌나 놀랐던지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고 실토할 정도였다.
아프리카 오지만을 다닌 그가 영국 사회의 저명인사가 된 것이었다. 더구나 그가 출간한 책 『남아프리카 전도 여행』은 1850년대 임에도 불구하고 무려 7만 권이나 팔려 세상을 놀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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