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빙스턴의 아프리카 탐험은 선교와 노예해방〉
1858년 2월 리빙스턴은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켈리마네 영사 겸 잠베지강 탐험대장에 임명되었다. 그의 임무는 잠베지강을 탐험하여 이것을 내륙으로 들어가는 통상로를 개척하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는 동부해안 및 내륙의 독립구(獨立區)를 관할하고 아프리카 동부·중앙부를 탐험하는데 모든 권한을 부여받은 막강한 탐험대의 지휘자로 임명된 것이다.
중앙 아프리카 탐험 대장이 된 그는, 1858년 3월부터 1864년 7월까지 아프리카인 10명, 유럽인 6명의 대원을 이끌었다. 대원 중에는 동생 찰스와 에든버러의 의사 존 커크도 있었다. 이를 ‘리빙스턴의 제2차 탐험’이라고 한다.
이 탐험은 그가 행한 이전의 외로운 여행과는 차원을 달리하여 탐험 항해를 위한 외륜선도 확보했다. 그런데 문제는 리빙스턴이 탐험의 기본을 선교로 삼았다는 점으로, 사사건건 대원들과 마찰을 일으켰다. 한마디로 그가 팀원을 다독거리는데 문제가 생겨 탐험에 참가한 팀원끼리 마찰이 일어났다.
사실 그의 대원들은 리빙스턴의 명성에 따라 나선 것이지만 리빙스턴의 독주에 반기를 들자 결국 배를 타고 잠베지 강을 순항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그러므로 포르투갈 영역을 우회하는 로부마 강을 따라 니아사 호 즉 말라위 호 주변지역으로 가는 길을 찾으려고 시도를 했으나 이 역시 실패했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아내가 1862년 4월 잠베지 강 수팡가에서 죽었다. 첫째 아들 로버트는 1863년 아버지 리빙스턴과 합류하기로 했으나 결국 그도 합류하지 못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는데 1864년 12월 남북전쟁에서 북군으로 싸우다 전사했다.
특히 포르투갈 사람들의 노예 매매를 보고 리빙스턴이 이에 간섭하여 수백 명의 노예를 독단적으로 해방시키기도 했다. 이 때문에 포르투갈과 영국 간에 말썽이 생기는 등 잡음이 계속되자 영국은 결국 1863년 탐험대 소환 명령을 내렸다.
이는 당시 잠베지 지역의 경제적·정치적 상황을 리빙스턴이 잘못 판단한 결과로 볼 수 있는데 리빙스턴은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고 훈련되지 않은 선원들과 얼마 안 되는 연료만을 싣고 약 400km 가량의 위험한 항해를 감행하여 봄베이 현재의 뭄바이에 도착했다.
결론적으로 잠베지 강 탐험은 재난의 연속이었지만 그의 식민화에 대한 전망은 결국 이루어져 이들 지역이 1893년 영국이 중앙아프리카 보호령을 이루는 데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이 지역은 1907년 니아살랜드로 되었다가 1966년 말라위 공화국이 되었다.
여하튼 영국으로 소환된 리빙스턴은 1864년 영국으로 돌아와 동생 찰스와 함께 1865년 2번째 책을 썼는데, 제목은 『잠베지 강과 그 지류』이다.
당시 그는 첫번째 아프리카 여행 이후로 자신을 괴롭혔던 치질 때문에 외과수술이 필요하다는 충고를 받았지만 거절했는데, 그가 3차 아프리카 여행을 마치면서 그가 얼마 안 되어 사망한 것도 아마 출혈이 심했던 치질 때문으로 추정한다.
약 2년 동안 휴식하고 원기를 되찾은 그에게 영국은 리빙스턴에게 백나일 강의 수원을 밝혀 달라고 요청했다. 리빙스턴은 1866년 1월 공·사 단체의 지지와 함께 영국 영사의 지위를 맡아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와 1873년까지 탐험을 계속했는데 이를 ‘리빙스턴의 제3차 탐험’이라고 한다.
지도도 없고 정보도 없는 아프리카 오지의 탐험이 순탄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이번엔 유럽인을 포함시키지않고 오직 아프리카인과 아시아인들만으로 팀원을 구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부하 대원들 사이에서 문제가 발생했지만, 오랜 탐험의 경력으로 동부 연안 미킨다니로 전진했다. 그러나 응고니의 습격 때문에, 포르투갈 영토를 피하고 니아사 호 북부를 가로질러 탕가니카 호 주변으로 가려던 계획은 결국 포기해야 했다.
탐험대는 남쪽으로 향했고 대원 몇 명이 그를 따르지 않고 이탈했다. 그 대원들은 잔지바르에 도착한 뒤 리빙스턴이 응고니에게 살해당했다고 거짓 보고를 했다. 다음해에 그가 살아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지만, 그가 실종되었다는 소문은 보다 부풀려진 채 해외까지 퍼졌다.
그가 니아사 호 남단에서 다시 북쪽으로 이동했을 때 소문은 극에 달했고, 1867년 초에 대원 중 한 명이 의료상자까지 가져갈 정도로 최악의 상황이 되었지만 그는 계속 중앙아프리카로 향했다. 1867년 11월 므웨르 호를 발견하고 1868년 7월 방웰루 호를 발견했으며, 마침내 1869년 2월 아랍 무역상의 도움으로 탕가니카 호에 도착했다.
그는 건강이 상당히 안좋았음에도 아랑곳없이 계속 전진해 1871년 3월 북서부의 마지막 목표지점 니앙궤에 도달했다. 니앙궤의 위치는 콩고 강으로 들어가는 루알라바 강 유역으로 그는 아프리카에 간 유럽인들 가운데 가장 서쪽으로 깊숙이 들어간 것이었다.
이 기간 동안 유럽과 미국에서는 리빙스턴이 행방불명되었다고 알려졌는데 1871년 10월, 스탠리가 영양실조와 말라리아로 거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리빙스턴을 발견하여 극적으로 구출된 것이다.
리빙스턴은 스탠리를 만나 건강이 회복되자 탕가니카 호 북부유역을 탐험하기에 충분하다며 동쪽으로 320㎞ 떨어진 우니아니엠베까지 스탠리와 함께 동행했다. 스탠리는 그에게 아프리카를 함께 떠나자고 제안했지만 리빙스턴이 거절하자 스탠리는 리빙스턴이 준 지도를 갖고 아프리카를 떠났다.
한편 스탠리가 공급해준 물품들로 새롭게 준비를 갖춘 리빙스턴은 다시 남쪽으로 이동했다. 여기에서 강조될 것은 리빙스턴의 아프리카 탐험이 상당히 독선적으로 운용되었다는 점이다.
영국 정부가 그에게 대대적인 지원을 하면서 아프리카 탐험을 또 다시 지명한 것은 나일 강의 수원을 찾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아프리카에 온 근본 이념 즉 아프리카의 만행인 노예무역을 뿌리 뽑는 것을 신조로 삼았다.
그런데 그가 아프리카의 만행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제시한 것은 아프리카에 기독교를 전도하고 유럽의 선진 문명을 보급하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즉 아프리카인들이 스스로 깨어 노예무역에서 벗어나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어야 비로소 아프리카인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 방법이다. 그는 유럽인으로서의 유럽인 시각으로 접근했다. 한마디로 아프리카가 영국의 식민지가 된다면 해결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프리카에 유럽인 상인과 군대가 쉽게 드나들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리빙스턴의 탐험으로 발견된 지역은 모두 영국 식민지가 되었다.
바로 이 점에서 많은 현대 학자들이 리빙스턴에 대해 큰 점수를 주지 않는다.
즉 리빙스턴이 아프리카 사람들을 자신과 동등한 인간이 아니라, 기독교 전파를 통해 계몽해야 비로소 인간으로 돌아올 수 있는 존재 즉 자신보다 못한 존재로 여겼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사고는 리빙스턴만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고, 아프리카를 검은 대륙이라고 낮춰 부름으로써 식민통치를 정당화하려는 제국주의 시대 유럽인들의 사고방식이다. 당대 유럽인들은 아프리카를 노예의 공급지로만 생각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특히 아프리카인들은 인간인 유럽인들과는 다른 동물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아프리카에 대해서 무지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생각의 원천지가 천하의 천사로 알려지는 리빙스턴이라는데 문제가 지적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빙스턴에 대한 좋은 시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리빙스턴이 유럽의 제국주의자로 아프리카를 식민지화를 유도한 것은 사실이지만 아프리카인들이 깨어나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것이 결국 아프리카에서 아프리카인들에 의한 민족주의가 일어나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역시 유럽인들의 제국주의적 시각으로 그렇다는 지적이 있음은 물론이다.
<출발선이 다른 리빙스턴>
물론 리빙스턴의 생각을 이렇게 단적으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리빙스턴이 당시 유럽인들과 상당한 차이점을 보이기 때문이다. 리빙스턴이 유럽인들을 보는 시각은 매우 단순했다. 유럽인들의 목표가 돈이므로 유럽인들이 아프리카에서 돈을 벌 수 있도록 하면 노예사냥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즉 유럽과 아프리카가 직접 교역하여 아프리카에서 상아나 털가죽 등을 유럽으로 팔 수 있다면 아프리카인들의 경제적 상황이 개선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유럽인들의 노예사냥도 근절될 거라는 단순한 생각이다.
그러나 리빙스턴이 착각한 것은 유럽인들은 노예무역을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즉 노예사냥은 당대에 그 어떤 무역 보다 수지맞는 장사인데다 국가적인 이익이 큰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유럽인들은 심지어 노예제가 ‘아프리카 야만인들에게 친절을 베푼 것이며 그들은 노예제 덕분에 훨씬 행복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생각하기조차 했다. 흑인들이 아프리카에서 살지 않는다는 자체가 행복함의 근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프리카에서 포로가 된 흑인들이 항해 도중에 여섯 명 중에서 다섯 명이 사망했다는 것 따위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비인도적인 노예제도의 실상과 문제점을 깨달아 아프리카에 진출한 제국주의 국가들이 노예제도를 적극적으로 폐지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리빙스턴이 아프리카에 있을 때에는 미국에서조차 노예제도가 금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예무역은 계속되었고 노예상인들은 감시를 피하기 위해 흑인들을 상자 속에 집어넣어 운반하는 등 그 참상은 말할 수 없었다. 수없는 흑인들이 운송용 배에서 사망한 이유다.
여하튼 리빙스턴은 아프리카의 노예 문제는 유럽과 미국에서 아프리카와 무역으로 이득을 얻으면 굳이 노예사냥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리빙스턴은 흑인들의 환경과 처우를 개선하는 방법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리빙스턴의 생각은 당대에 많이 퍼져있던 것 중 하나로 이것이 추후 아프리카인들의 민족 감각을 일으켜 현대의 수많은 국가들이 유럽으로부터 독립하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문제는 리빙스턴이 이들과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음은 틀림없지만 그도 아프리카인들이 선진 문명국의 지도를 받는 것은 절대 필요한 조처라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이 문제는 리빙스턴을 계속 따라다니는 주제임으로 보다 설명한다.
리빙스턴의 기본은 선교와 아프리카인들의 노예를 해방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선교사 활동에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일이 포함돼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데이빗리빙스턴센터>의 커런 커루써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리빙스턴은 매우 신앙심이 깊은 기독교인으로 자신이 이룬 일에 대해서 얼마나 겸손한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나는 그가 아프리카 동부 지역에서의 노예매매를 금지 시킨 인물이자 위대한 박애주의자로 기억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커러써 박사의 말을 액면 그대로 본다면 리빙스턴은 천사와 다름없다.
그런데 그의 마지막 말을 역으로 보면 기억되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말은 그렇지 않을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리빙스턴을 보는 시각이 천사만은 아니라 비판적인 견해들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그는 아프리카에서 아프리카인이 아니라 당대의 최문명국인 유럽인의 생각을 견지하면서 아프리카인을 생각했다는 것이다.
리빙스턴은 가족과 정치인들, 다른 선교사들과 과학자들에게 수천 통의 편지를 보내고 일기와 여행일지를 남겼는데, 이를 검토한 랭카스타 대학의 존 맥켄지 석좌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람들은 리빙스턴의 글에서 그가 제국주의자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의 선교사역에 대해서 비판하기도 한다.’
말라위에서 태어난 존 르완다 박사는 리빙스턴의 공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말라위에 대한 데이빗 리빙스턴의 영향력에는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다. 그는 말라위에 기독교를 가져다주었고 말라위를 세계에 소개했다. 그러나 그로 인해서 아프리카에서는 쟁탈전이 벌어졌고 말라위의 경우 수많은 영토를 잃었다. 그가 아프리카를 개척해 놓음으로써 강대국들이 보다 쉽게 우리의 땅을 빼앗아간 결과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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