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악당/리빙스턴과 스탠리

리빙스턴과 헨리 스탠리(4)

Que sais 2020. 12. 14.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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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빙스턴스탠리와 헤어진 지 단 2년도 되지 않아 치탐보 마을의 오두막집에서 사망했다. 그의 최후에 대한 몇 가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187351일 이른 아침 리빙스턴의 오두막으로 찾아 온 현지의 소년들은 그가 죽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기도하는 자세로 침대 곁에 무릎꿇고 있었다고 한다.

리빙스턴을 존경하던 약 60명의 현지인들이 그의 시체를 절개하여 약 2주 동안 햇볕에 말렸다. 그런 다음 시체를 천으로 감싸 원통 모양으로 파낸 나무껍질 속에 안치하였으며 전체를 굵은 천으로 둘러싸고 꿰맨 뒤, 2명이 운반할 수 있도록 2개의 막대를 끼웠다.

 

영국으로 귀환하는 리빙스턴의 관

그리고 5월 중순 유해를 뒤따르는 사람들은 인도양 해안가에 있는 잔지바르 현재의 탄자니아를 향해 출발했다. 1,600킬로미터가 넘는 길을 걸어 약 11개월 뒤 그들은 잔지바르에 도착했고 1874418, 그의 시신이 영국으로 옮겨졌다.

영국에서는 이 날을 국상일로 정했으며 장례식은 웨스터민스터 사원에서 엄숙히 거행되었다. 장송행렬의 선두에는 스탠리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의 기념비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새겨졌다.

 

고독한 생활을 하고 있는 나는 이렇게 덧붙여 말합니다. 바라건대 미국, 영국, 터키, 그 밖의 어디서건 이 세상의 악습을 없애는 데 협력하는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의 은총을 받으시길 바라며‧‧‧.’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공식적인 명칭은 '웨스트민스터 세인트 피터 성당 참사회(Collegiate Church of St. Peter in Westminster)'960년경 혹은 970년경 초에 성 던스턴베네딕토회의 수도승을 위한 공동체를 세웠다. 1042년에서 1052년 사이 참회왕 에드워드가 그 자리에 새 교회를 세우기 시작했으며 고딕 양식으로 13세기부터 1503년까지 건설했다. 영국 왕의 대관식, 결혼식, 장례식 등 주요 행사가 열리는 곳이자 잉글랜드와 영국 왕을 비롯하여 영국 유명인들이 매장된 곳이기도 하다.

성당 밖에 따로 묘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성당 안에 유해를 안치하므로 내부 공간이 상당히 좁다. 헨리 7세와 엘리자베스 1를 비롯한 역대 왕은 물론 영국의 수상들, 과학자로 아이작 뉴턴, 윌리엄 톰슨, 찰스 다윈을 비롯한 위인들의 무덤이 성당 곳곳에 있다.

여하튼 리빙스턴선교사탐험가로 매장되었는데 리빙스턴웨스터민스터 사원에 매장되었다는 것은 그야말로 파격적인 대우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리빙스턴이 열강들로 하여금 아프리카를 정복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특히 영국이 큰 덕을 보았음은 물론이다.

 

웨스트민스터 교회 20세기의 순교자 10인 조각상(리그베다위키)

웨스트민스터도 현대화의 물결을 도외시하지 않고 1998년 기존의 서쪽 문 위쪽 외벽에 있던 10명의 성인들의 조각을 다인종, 다문화에 맞는 현대적 위인들의 조각으로 교체했다.

독일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다른 수감자를 대신해 죽음을 자청해 순교한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토착 종교에서 성공회로 개종했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 피살된 만체 마세몰라, 우간다의 독재자 이디 아민 치하에서 암살된 자나니 루움 대주교, 수녀가 되어 세인의 존경을 받았으나 러시아 혁명 때 볼셰비키에 피살된 엘리자베타 표도르브나 대공비, 흑백차별 철폐와 공민권 운동을 펼치다가 암살된 마틴 루터 킹 목사, 엘살바도르 군사정권에 항거하다 암살된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 반나치 운동을 벌리면서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으로 처형된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가 있다. 또한 과격 무슬림에게 피살된 에스터 존, 태평양 전쟁 때 일본군에게 피살된 루시안 타페디 그리고 중국인으로 공산주의 치하 중국에서 피살된 왕지밍이다. 이들 모두 피살된 사람이며 기존에 있던 조각은 별도로 보관한다.

 

〈벨기에의 노다지

미국으로 돌아 온 스탠리는 자신의 계획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탐험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1873리빙스턴이 죽었으므로 리빙스턴이 못다 한 탐험을 계속하겠다고 선언하자 자금은 곧바로 확보되었다. 그는 곧바로 아프리카로 떠나 1874년에 빅토리아 호수를 탐험했고 1876탕가니카 호수를 조사하여 루알라바 강이 나일 강의 상류가 아니라 콩고강의 상류임을 알아냈다.

 

스탠리의 흑인 학살

스탠리 일행은 최신 소총과 대포로 조그마한 빌미라도 생기면 닥치는 대로 마주치는 흑인들을 직접 살해하거나 살해명령을 내렸다. 이와 같은 비인도적인 행위에 대해 함께 탐험에 참가한 사람조차 그를 인간 사냥꾼이라고 비난했다. 스탠리는 탐험대원들의 생명을 보호하려는 정당 방위였다고 주장했지만 그에 대한 비난은 그가 사망할 때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그가 얼마나 흑인들을 살해했는지는 한 여행자가 아프리카 원주민으로부터 들은 스탠리의 원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낯선 무리의 두목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하얀 얼굴이 강물에 비쳤다. 그 두목은 눈이 하나뿐이었고 이마의 한 중앙에 달려 있었다. 바소코족 사람들이 그 낯선 사람들을 붙잡기 위해 전투 카누를 타고 강으로 나왔다. 그들은 외쳤다. ‘고기. 고기다바소코족은 낯선 사람들을 잡아먹을 생각이었지만 붙잡지 못했다. 오히려 천둥과 번개를 내뿜는 막대기 때문에 많은 바소코족 사람들이 죽었다.‘

 

바소코족이 스탠리를 외눈박이로 상상한 것은 망원경을 보거나 소총을 겨누면서 한쪽 눈을 감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흑인들은 유럽인들에게 발굽이 달렸다고 믿었다. 신발을 본적이 없는 아프리카인들은 서양인들의 신발을 백인의 몸 일부라고 생각한 것이다. 스탠리는 자신이 직접 탐험 도중에 큰 마을 28곳과 작은 마을 6080여 곳을 공격하고 파괴했다고 적었음을 볼 때 그의 만행으로 얼마나 많은 아프리카인들이 피해를 보았는지 알 수 있다.

아프리카에서 돌아온 스탠리는 자신이 본 것을 토대로 아프리카 개발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한 마디로 무인지경으로 깃발만 꼽으면 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제일 먼저 호응한 사람이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 사실 이들 두 명의 만남이 아프리카가 세계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은 악몽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레오폴드 21865년에 부왕 레오폴드 1세를 이어 왕이 되었는데 그의 공식 명칭은 벨기에 사람들의 왕(King of the Belgians)이다. 벨기에네덜란드로부터 1830년에 독립하여 독일 왕족인 레오폴드 1세가 옹립된 소국이었다. 레오폴드 2세는 왕이 되기 전에 스페인의 세르비아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는 도서관에서 스페인의 해외 식민지에서 거두어들인 이익이 막대하다는 것을 알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식민지 확보야말로 벨기에가 가장 시급해 해야 할 임무 중에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즉위 직후 동생인 필리프 왕자에게 보낸 편지에 국가는 강하고 번영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식민지를 가져야 한다고 썼다.

그러나 신대륙과 아시아는 이미 강대국의 식민지로 변한 지 오래되었고 벨기에는 독립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소국이므로 벨기에가 차지할 마땅한 장소라곤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단독으로 식민지 확보에 나선다. 스페인의 이사벨 2에게 필리핀 양도를 타진하면서 필리핀을 사기 위해 영국은행에 대출도 신청했다. 그러나 대출은 거부됐고, 이사벨 2세마저 폐위되면서 계획은 무산되었다.

그가 눈독을 들인 미지의 장소는 아프리카였다. 남아프리카를 비롯한 비교적 접근이 쉬운 곳은 영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이 확보하기는 했으나 아프리카 전 영토의 약 80퍼센트에 해당하는 지역은 무주공산으로 남아 있었다. 광대한 영토에 대한 정보가 유럽인들에게 전혀 없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식민지화할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레오폴드 2세

이때 아프리카의 오지를 탐험하고 리빙스턴을 찾아낸 스탠리가 아프리카에 대한 정보를 갖고 식민지를 개척하자는 제안은 레오폴드 2에게 구세주의 손짓이나 마찬가지였다.

레오폴드 2는 스탠리의 제안에 따라 곧바로 <국제 아프리카 협회>라는 단체를 설립했다. 과학 연구와 인도주의를 명분으로 내세우면서 자신을 아프리카에 서구의 기독 문명을 전파하는 박애주의자로 포장하고 국제 학술회의도 개최했다. 마침 아프리카에서 두 강대국 영국과 프랑스의 충돌을 막아줄 완충지가 필요했으므로 이들 국가도 레오폴드 2세의 진출을 환영했다.

그러므로 스탠리그는 레오폴드 2세의 지원으로 벨기에의 은행과 합작하여 1878<콩고회사>라는 사설 회사를 만들어 아프리카로 진출했다. 스탠리의 원대한 계획은 아프리카에 도착하자마자 실행에 옮겨졌다. 그는 전 콩고 지방을 돌면서 원주민 추장에게 구슬이나 옷감 등을 선사하고 자신이 갖고 간 종이 위에 그 종족의 표시를 그리거나 X표를 찍게 했다. 대부분 족장들은 글로 된 문서를 본 일조차 거의 없었다.

아프리카인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호의의 표시로 찍어 준 종이가 뒷날 아프리카를 침략하는 통한의 전면 위임장으로 변하였다. 그들이 서명한 종이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자발적으로 우리의 상속권과 계승권을 협회 즉 레오폴드 2가 위장으로 만든 국제 아프리카 협회에 양도하고, 영토에 대한 모든 주권과 통치권을 영원히 포기한다. (중략) 영토의 어느 지역에서든 당 협회가 시행하는 작업, 원정 사업에 언제라도 노동력이나 기타 수단을 지원한다. 이 나라를 관통하는 모든 도로와 수로의 통행료 징수권, 모든 수렵, 어업, 광산, 삼림 개발권은 당 협회가 절대적인 소유권을 갖는다.’

 

스탠리에게 찍어 준 종이에는 땅뿐 아니라 노동력까지 제공해야 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속에 신체포기 각서도 있었다. 이들 계약은 미국의 맨해튼을 양도한 인디언들의 조약보다 훨씬 조건이 나빴지만 스탠리의 속임수에 의해 만들어진 문서를 넘겨받은 레오폴드 2500명의 원주민 추장들에게서 권리를 넘겨받은 증서를 갖고 있다며 1885200여만나 되는 거대한 지역을 콩고자유국가로 이름 짓고, 스스로 왕이 됐다.

 

레오폴드2세사유지콩고영역

특히 그는 벨기에영국과 프랑스에 비해 식민지가 전혀 없으므로 벨기에식민지를 소유하게 해 달라고 호소하였고, 결국 외교전을 통해서 콩고에 대한 영유권 승인을 받는다.

그러나 콩고지역이 벨기에 국가의 식민지가 아니라 레오폴드 2세의 사유화가 된 것은 벨기에 의회가 식민지 경영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1831중립국 지위독립을 선언한 벨기에의 군사력이 바다 건너 식민 영토를 보호할 수 있을 만큼 강하지 않으므로 식민지 경영을 무모한 도박이라 여겼다.

그러므로 벨기에에서는 국가 차원의 점령이 아닌 레오폴드 2세의 사적인 점령을 묵인했다. 벨기에 정부는 통치에 관여하지 않았고, 그는 개인 자격으로 콩고의 땅과 원주민을 소유했는데 실제로 레오폴드 2는 자신을 콩고의 소유주(proprietor)라 불렀다고 한다.

한마디로 한반도의 10나 되는 거대한 지역은 벨기에가 아닌 레오폴드 2개인 소유지가 되었는데 추후 이것이 비난의 대상이 되자 그는 이 사기계약을 근대적 합법계약이라 주장했다. 흑인들이 현대의 계약을 몰랐으므로 자신에게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