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악당/리빙스턴과 스탠리

리빙스턴과 헨리 스탠리(5)

Que sais 2020. 12. 14. 18:43

youtu.be/UBQ3dMemvUQ

콩고를 울린 고무 열풍

스탠리와 레오폴드 2는 사실 운도 좋았다. 그가 처음에 진출한 콩고열대 우림 지역이지만 남부는 광산물이 풍부하여 아프리카에서는 노른자위와 같은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레오폴드 2전제군주답게 자신의 소유물은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면서 많은 비난을 무시하고 콩고인을 철저하게 착취했다. 그런데 콩고에서 벌어들이는 모든 것은 벨기에 정부가 아니라 그의 사금고로 들어갔다.

 

때마침 세계는 고무 붐이 일었는데 콩고에는 검은 황금으로 불리는 고무나무가 국토 절반에 걸쳐 퍼져 있었다. 콜럼버스가 서인도 제도에서 고무를 보았지만 처음에는 유럽인들도 고무의 활용성을 잘 몰랐다. 그런데 1700년대에 고무연필자국을 지우는 특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사실 고무(rubber)지우는 것이란 뜻을 갖고 있다.

1823년에는 스코틀란드의 매킨토시가 옷에 고무를 입혀서 방수복을 만드는 방법을 고안했다. 1839년에는 미국의 발명가 찰스 굿이어가 우연하게 유황을 조금 섞으면 고무가 차가운 때에 잘 굳어지지 않고 또 뜨거울 때에 끈적거리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발견이야말로 고무장화레인코트의 문제점을 해결해주어 고무의 대중화가 이뤄졌는데 여기에 날개를 달아 준 것은 1890년 아일랜드의 존 던롭의 공기가 찬 고무 타이어를 이용한 자전거 발명이다. 그의 타이어를 이용한 자전거는 덜컹거리지 않고 부드럽게 달릴 수 있었으므로 자전거 열풍이 불어 닥쳤다.

단 몇 년 만에 고무의 수요는 폭발하기 시작했다. 산업계는 고무 타이어뿐만 아니라 호스, 튜브는 물론 전보, 전화, 전기 와이어 등의 절연 장비로도 고무를 사용했다. 고무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자 공장에서 고무 원자재의 품귀현상이 일어났고 고무 가격1890년대 내내 폭등했다.

 

고무채취(뉴스브리핑캄보디아)

고무는 응고된 수액(樹液)으로 일명 눈물 흘리는 나무에서 채취된다. 콩고의 눈물 흘리는 나무는 란돌피아 종()으로 고무를 채취하기 위해서는 칼로 넝쿨 표면을 벤 다음, 양동이나 항아리를 받쳐서 천천히 떨어지는 수액을 수집해야 한다.

워낙 고무의 수요가 폭발하다 보니 마을 인근의 넝쿨은 곧 동이 나버렸으므로 사람들이 열대 우림의 넓은 지역에서 일을 해야 했고 때로는 나무 위로 올라가야 했다. 보호 장비가 전혀 없는 흑인들이 나무에서 떨어져 등이나 다리, 팔 등이 부러지는 상황이 속출되기 시작했다. 더욱이 연중 열대성 폭우가 빈번하여 고무나무가 자라는 지역은 습지가 되는 수가 많았으므로 고무 채취는 그야말로 흑인들도 기피하는 고된 작업이었다.

스탠리와 레오폴드 2는 고무 확보를 위해 그야말로 상상할 수 없는 방법을 동원했다. 고무채취 작업벨기에에서 파견된 군인들을 이용하여 독려했는데 이들이 사용한 방법은 악랄하기 그지없었다.

흑인 마을에 들어가면 곧바로 여자들을 잡아 영창에 가둔 후 가족에게 연락했다.

가족들이 풀어달라고 요청한면 협상을 시작했다. 그들이 제시한 고무를 갖고 와야 여자를 풀어준다는 것이다. 결혼한 여자의 경우 남편이 고무 채취를 거절하면 여자들을 그 자리에서 사살했다. 남자들이 정해진 양의 고무를 갖고 왔다고 해서 그대로 풀어준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여자 1명 당 염소 두 마리씩 여분으로 받았다. 한 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이 당시의 참상이 적혀있다. 그런데 그 고무 생산방법과 농장에 비하면 히틀러 정권아우슈비치 수용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① 1인당 고무의 할당량을 정해줌

1번째 할당량을 채우지 못할 시 손목을 자름

2번째 할당량을 채우지 못할 시 팔목을 자름

3번째 할당량을 채우지 못할 시 목을 자름

죽은 사람의 몫은 그 주변사람이 채워야 함. 못 채울 시 위와 같은 처벌을 받는다.

자른 손목과 팔을 바구니에 넣고 다니며 전시함

 

영국의 선교사 스크리워너는 그 참상을 이렇게 적었다.

 

백인 병사들은 그 자리에서 몇 명의 원주민을 총으로 사살했다. 그러면서 원주민을 총으로 후려갈기며 고무를 더 가져와라. 그러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했다. 공포에 질린 원주민들은 휴대할 식량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고무나무 숲으로 가려면 왕복 2주일이 걸리기 때문이다.

원주민들이 출발 준비를 하고 있는데 병사들이 왔다. ‘뭐야. 아직도 출발하지 않았어하며 몇몇 원주민을 처자식 앞에서 사살했다. 가족들은 울부짖으면서 사체를 땅에 묻으려고 했지만 그것마저 허락되지 않았다. 원주민들이 음식을 갖고 있지 않다고 항의하자 병사들은 그냥 떠나라고 호통쳤다. 불쌍한 원주민들은 모닥불을 피우는 부싯돌 하나 없이 맨손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정글로 가는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과 밤의 추위로 죽어갔다. 물론 더 많은 사람들이 총살당했다.’

 

한 가톨릭 신부가 흑인으로부터 들은 레옹 피에베즈라는 악독한 관리에 대해 언급했다.

 

그는 들판에 죽어 있는 시체들로부터 손을 잘라오게 했다. 군인들은 양동이에 담아온 손의 숫자를 일일이 확인했다. (중략) 고무를 내놓지 않겠다는 마을은 완전히 싹쓸이 당했다. 나는 젊은 시절 피에베즈의 부하가 원주민 열 명을 잡아다가 그물 안에 집어넣고 그물에 무거운 돌을 매달아 강물에 던지는 것을 보았다. (중략) 우리는 그 자의 이름을 두 번 다시 듣고 싶지 않다. 군인들은 젊은이들을 사주하여 그들의 어머니와 여동생을 죽이거나 강간하게 했다.’

 

1894피에베즈는 한 군인에게 자신이 필요한 물자들을 얻기 위해 저지른 행동을 다음과 같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나는 그들과 전쟁을 벌였다. 시범은 한 번만 보여주면 충분했다. 흑인 백 명의 머리를 자르니까 그 다음부터는 나의 말대로 물자를 갖고 왔다. 나의 목표는 궁극적으로 인간을 위한 것이다. 내가 100명을 죽였지만 그렇게 해서 500명을 살린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혹한 처사가 1900년 초반 영국 언론인과 그곳에 다녀온 선교사들의 고발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특히 스탠리와 레오폴드의 악행1900년대 초, 영국인 에드먼드 모렐에 의해 상당부분 밝혀진다. 모렐은 당시 화물회사 직원이었는데 그는 콩고에 드나드는 무역 기록 등을 토대로, 레오폴드 2가 아프리카 중부를 개척해 인도주의를 전파한다고 선전하면서, 원주민들에게 상아와 고무를 채취하게 해 이익을 착취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레오폴 2세 식민 지배시 손이 잘린 콩고 원주민

그는 당시 아프리카에서 활동한 여러 선교사들이 벨기에 군인에게 손이 잘린 원주민 사진을 공개하는 등 벨기에의 잔혹한 통치에 대해 고발했다.

더불어 영국의 여성 선교사였던, 앨리스 셀리 해리슨은 다음과 같이 레오폴드 2세의 만행을 적나라하게 폭로했다.

 

하루당 고무 채취량을 충당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벨기에인 감독관은 그 은살라라는 남자의 딸의 손과 발을 잘라버렸다. 딸아이의 이름은 보알리였고, 그녀는 다섯 살이었다.

그런 다음 그 아이를 죽였다. 하지만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아내도 죽였다. 하지만 이것조차도 충분히 잔인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는지, 더 확실히 일을 끝마치기 위해, 아이와 엄마의 시신을 먹었다.

그런 후 은살라에게 토큰을 던져줬는데, 그가 세상 모든 것보다 더욱 사랑했던 그의 딸이 차고 있던, 한때는 살아있었던 그녀의 몸뚱이에서 떼어낸 것이었다. 그의 삶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미 노예 생활로 인해 반쯤은 이미 파괴되었지만 이 일이 그의 모든 것을 부수어 버렸다.

이 모든 것이 한 남자가 벌인 일이다. 수 천 마일이 넘는 곳에 사는 한 남자, 더욱 거머쥘 부조차도 없는 남자가, 본인의 영달을 위해 이 땅이 자기 것이라 선포하고 이 땅에 살던 사람들은 자신의 탐욕만을 위해 일해야 한다고 선포했기에 벌어진 일이다.

레오폴드이 아프리카의 어린이들, 남자와 여자들이 같은 인간이며 형제자매라는, 유럽 왕족을 빚어 만든 하느님이 이 아프리카인들도 같은 손으로 빚어 만들었다는, 그런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당시 인구에 대한 구체적 통계가 없으므로 정확한 사망자 수를 알 수 없지만 일부 학자들은 레오폴드 2세의 20여년 통치 기간에 희생된 콩고인을 최대 1,0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한다. 그런데 이런 악행을 자행한 레오폴드 2의 벨기에에서의 행동은 더욱 가증스럽다.

그는 기독교 정신에 입각하여, 콩고를 '자비롭고, 인도적으로 지배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벨기에 외무부의 아우구스테 램버몬트 남작을 궁으로 불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프리카에서 뭔가 일을 해 보고 싶네. 다른 나라의 개척자들이 아프리카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자네는 정확하게 알고 있지 않은가!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을 우리도 나서서 평화적이고 인도주의적인 방법으로 시행하여야 하네. 그것이 나의 유일한 걱정거리이자 목표일세.’

 

그의 대리인인 스탠리가 콩고지역에서 하는 행동에 대한 비난은 자신과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악행이 계속 알려지자 그에 대한 암살 시도도 계속되었다.

 

레오폴드 2세의 저격

1902년에는 이탈리아의 무정부주의자젠 나로 루비노레오폴드 2세에게 세 번이나 총을 쏘았지만 레오폴드 2세는 맞지 않았다. 그는 그 즉시 체포되었고 레오폴드 2세는 조금도 다치지 않고 태연히 다음 일정을 진행했다.

그러나 그와 스탠리에 의한 악행이 너무 크게 알려지면서 국제적 비난을 사자 그는 또 다른 면피조치를 한다. 자신의 사기업인 콩고 소유권1908벨기에 정부에 인계하면서 자신은 끝까지 콩고에서 벌어진 학살을 몰랐다고 잡아뗐다. 그러면서 그가 이런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나의 콩고를 벨기에 정부에게 넘기지만, 그들에게 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 알 권리는 없다.’

 

여하튼 그에 대한 비난을 계속 따라다녔는데 190912월 사망했다.

그의 재산은 여러 곳으로 숨겨져 있었는데 그 후 레오폴드 2두 딸이 유산을 달라고 벨기에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그들은 아버지가 콩고에서 모은 재산은 개인적인 것이므로 상속자인 자신들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벨기에 정부는 레오폴드 2숨겨 둔 대부분의 재산을 찾아내어 국고에 환원시켰다.

 

한편 콩고 지역 현지에서 레오폴드 2세의 대리역할을 하여 세계에서 가장 극악한 행동을 한 사람으로 지적되는 스탠리만년에 영국 국적으로 복귀했다. 그런데 그에 대한 영국의 대우는 파격적으로 1895하원의원이 되었으며 영국으로부터 작위를 받는 등 영국 제일의 명사 대우를 받았다. 그에 이런 파격적인 대우는 벨기에의 레오폴드 2세의 후원을 얻어 콩고 지방을 탐험, 콩고 자유국의 기초를 닦은 사람으로 설명되는 것은 물론 기본적으로 영국아프리카지역을 식민지화하는데 큰 기여를 했기 때문이다.

그는 1904510일 사망하여 레오폴드 2가 콩고 지역을 벨기에에 반납하는 것은 보지 못했다. 스탠리는 밤중에 시계소리를 듣고 참 이상하구나! 때가 되었는가?라는 말을 남기고 사망했다고 알려진다.

 

지옥의 묵시록

그러나 그의 악행은 조지프 콘래드의 소설 암흑의 핵심을 영화로 만든 프란시스 코플라 감독 지옥의 묵시록에 적나라하게 등장한다.

 

미군 공수부대 소속 윌러드 대위커츠 대령 암살 임무를 받는다. 그는 캄보디아의 금지구역에서 왕 노릇을 하면서 그야말로 악행을 저지르고 있기 때문이다. 철저한 기밀 속에서 캄보디아로 험난한 여정을 떠난 그는 서로 죽고 죽이는 정글 같은 전쟁 상황에 점차 피폐해져 간다. 마침내 커츠 대령의 은신처에 도착한 윌러드 대위는 상상을 초월하는 충격적인 공포와 마주한다.’

 

지옥의 묵시록의 현장은 아프리카 콩고 지역이 아니라 캄보디아이다.

미군이 배출한 최고의 군인이었던 커츠 대령은 베트남과 베트공의 이중 스파이 용의자를 임으로 사살하고 군수사기관의 추적을 받자 부하들과 함께 캄보디아 정글로 들어가 독자 세력화 즉 왕처럼 행세한다. 이 영화에서 잔인한 카츠 대령의 모델이 바로 레오폴드 2. 레오폴드 2세의 악행을 프란시스 코플라 감독이 잊지 않고 등장시켰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