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와 악마의 만남〉
리빙스턴은 아프리카에 기독교를 전파하고 현대문명을 아프리카에 접목하기 위해서는 유럽인 상인과 군대가 드나들도록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이를 원용하면 아프리카를 영국의 식민지로 만드는 것이 가장 적절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이 문제는 추후 상당한 파장을 갖고 왔다.
실제로 1873년 그가 사망한 이후 유럽의 열강 즉 제국주의자들이 아프리카를 자신들 의도대로 분할하는데 그들은 리빙스턴을 ‘보호 성자’라고 부르면서 자신들의 침략행위를 정당화했다. 즉 유럽인들이 아프리카를 점령하여 그들의 야만성을 문명인으로 길들이는 것이야말로 아프리카인들을 위한다는 것인데 이는 리빙스턴의 생각이기도 하다는 주장이다.
여하튼 리빙스턴이 사망한 후 아프리카가 유럽의 먹이가 되었는데 그 단초가 리빙스턴 즉 기독교 전파와 식민지 통치 개념이라는데 지금도 비난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물론 엄밀하게 따진다면 이 문제를 리빙스턴에게 전적으로 귀책시킬 사항은 아니다. 학자들은 실제로 아프리카를 악몽으로 몰아넣은 사람은 리빙스턴을 극적으로 구해 준 악마의 대명사 스탠리와 그를 적극 지지한 벨기에의 왕 레오폴드 2세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리빙스턴과 스탠리가 아프리카에서 만난 것은 인류 역사상 그야말로 극적인 사건으로 알려져 있는데 발단은 정말로 우연하게 시작되었다. 탐험가로 유명한 리빙스턴이 실종되었다는 사실은 당시에 큰 뉴스거리였다. 그가 줄루족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말도 돌아다녔고 거의 대부분 사람들이 리빙스턴이 이미 사망했을 것으로 생각했다.
미국의 <뉴욕 헤럴드>사의 사주인 제임스 고든 베넷2세는 리빙스턴의 실종사건을 이용하면 판매 부수를 올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프리카에 통신원을 파견해 소식이 끊긴 대탐험가를 찾게 하자는 것으로 이 임무로 발탁된 통신원이 바로 스탠리였다.
리빙스턴이 미국인도 아닌데다가 행방불명되어 소식조차 모르는데 그를 찾으라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스탠리가 항의하자 베넷2세는 그에게 한 가지 계교를 알려 주었다. 자신도 리빙스턴이 살아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므로 「리빙스턴 추적」이라는 제목으로 그가 갔음직한 소문을 따라 추적하면서 그곳의 풍물기를 쓰라는 것이었다. 리빙스턴의 명성을 이용하여 흥미 거리의 기사를 작성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얘기였다.
스탠리의 본명은 존 로우랜즈다.
그는 1841년 영국 웨일즈 덴비(Denbigh)에서 사생아로 태어났고 여섯 살에 성 아삽 유니언 구빈원 즉 고아원, 양로원, 직업훈련원 등을 겸한 19세기 영국의 복지기관에 들어가는데 스탠리는 자신이 구빈원에 있었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 평생 고생했다.
여하튼 영리한 존은 구빈원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주교로부터 성서를 상으로 받기도 했으며 어떤 사람의 필적을 몇 분만 연습하면 그대로 흉내 내는 비범한 재주를 가졌다. 또한 그의 필체는 아주 우아하고 맵시 있어 글씨만 보아서는 스탠리가 매우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것으로 오인할 정도였다.
존은 15살에 구빈원을 떠나 각지를 전전하다가 17살에 미국으로 갔다.
1859년 뉴올리언즈에서 면화중개상인 양아버지 헨리 스탠리를 만나 헨리 모턴 스탠리라는 이름으로 개명했다. 남북전쟁이 시작되자 스탠리는 남군에 입대하여 1862년 아칸소 지원병 연대의 일원으로 테네시주 실로(shiloh) 전투에 참가했다. 전투 이틀째 되는 날, 북군에 포로가 되자 재빨리 북군에 전향했는데 이질에 걸려 제대했다. 1864년 다시 북군의 해군에 지원하여 그의 멋진 필체 덕분에 프리깃함 미네소타호의 서기병이 되었으나 1865년 탈영한다.
당시에 군에서의 탈영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으므로 스탠리는 세인트루이스에서 지역 신문의 자유기고가가 되었다. 1867년부터 뉴욕 헤럴드에 근무하면서 주로 전쟁에 대한 기사를 다루었는데 평소 그의 과장된 기사에 주목한 발행인 베넷 2세가 스탠리를 발탁하여 리빙스턴을 형식적이라도 찾는 역할을 맡게 한 것이다.
사주의 제안을 수락하고 스탠리는 이집트에 들러 수에즈 운하 개통식을 취재한 후 1871년 1월에 중부 아프리카에 도착해 ‘늙은 백인이 살고 있다’는 소문만을 뒤따라 그의 행적을 추적했다. 이 당시 스탠리의 추적대는 규모가 어마어마했는데 통역사, 안내자, 짐꾼들, 무장 호위병, 요리사, 영국인 수병 등을 포함하여 무려 190명이나 되었다.
자신의 명성을 포장하는데 일가견이 있는 스탠리는 라이벌 경쟁자들에게 리빙스턴 발견의 단서를 주지 않기 위해 아프리카가 아니라 미국을 탐험한다고 연막을 피웠다. 아프리카에 도착해서는 자신의 추적을 보다 극적으로 알리기 위해 독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선언하여 흥미를 돋구었다.
‘리빙스턴이 어디에 있든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추적하겠다. 그가 살아 있다면 그의 말을 여러분들에게 전해줄 것이다. 죽었다면 그의 뼈라도 찾아내어 여러분에게 가져가겠다.’
여하튼 스탠리는 8개월 이상 고된 여행을 한 끝에 1871년 11월 3일 아프리카의 오지인 우지지 마을에서 1866년 이래 5년이나 소식이 끊긴 리빙스턴을 만나면서 그 유명한 인사말을 한다.
“리빙스턴 박사님이시죠? Dr. Livingstone, I presume?”
이 당시 리빙스턴의 처지는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우지지 마을로 미리 보낸 식량과 의료품은 짐꾼들이 모두 팔아 버렸고 마을 주민들과 문물 교환할 물건도 바닥난 상태였다. 그는 일기장에 자신을 ‘뼈다귀 덩어리’라고 묘사했으며 자신의 정신력도 밑바닥까지 떨어져 버렸다고 썼다. 결국 그는 아랍 주민들에게 구걸하여 먹을 것과 마실 것을 해결하고 있었는데 스탠리가 미국 국기를 펄럭이며 나타난 것이다.
<리빙스턴의 지도가 보물임을 알아차린 스탠리>
리빙스턴이 스탠리의 도착으로 원기를 회복하자 두 사람은 함께 5개월 간 아프리카 내륙을 탐험하였다.
두 사람의 의기가 어느 정도 통했는지 리빙스턴은 스탠리와 중앙아프리카의 중요 도시인 타보라 근처에서 헤어지면서 자신이 탐험한 지역을 그린 지도 한 장과 일기장, 메모 등을 스탠리에게 주었다. 리빙스턴은 틈날 때마다 자신이 탐험하는 도중에 관찰한 것을 열심히 기록하고 지도로 만들었다. 미지의 아프리카 대륙이 그의 발길을 따라 조금씩 베일을 벗은 바로 땀의 결실을 스탠리에게 준 것이다.
그런데 리빙스턴이 스탠리에게 자신이 평생을 걸쳐 탐험한 지도를 준 목적은 자신이 목적한 순수한 의도, 즉 아프리카의 기독교화와 노예 사냥 금지에 힘을 써 달라는 부탁에서였다.
그러나 리빙스턴이 선의로 스탠리에게 준 한 장의 지도는 아프리카 현대사를 완전히 뒤바꾸어 놓는 계기가 되었다. 스탠리는 리빙스턴의 지도를 받자마자 꼼꼼하게 그려진 지도의 중요성을 곧바로 간파했고 이를 이용하면 큰 재산을 모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리빙스턴의 지도야말로 유럽 국가들이 갖고 싶어 하던 정보, 즉 아프리카를 식민지화할 수 있는 결정적인 자료가 되기 때문이었다.
스탠리는 매우 냉정하고 치밀한 사람이었다. 아프리카 지도를 확보하자 자신의 원대한 계획을 숨긴 채, 서두르지 않고 자신의 계획을 하나하나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그는 아프리카라는 대륙을 상대로 누군가와 상담하려면 우선 자신이 보다 많은 아프리카 지역을 탐험해야 한다고 믿었다.
사실 아프리카는 이미 로마시대부터 유럽에 잘 알려져 있는 지역이었다. 기원전 430년경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나일강을 아스완 부근까지 거슬러 올라가 나일강 상류에 있다는 흑인이 통치하는 쿠시 왕국에 대해 적었다. 로마시대에는 아프리카 북부에 로마제국 식민지가 설치되어 현재도 많은 유적들이 남아있으며 61년에는 네로 황제가 나일강 상류를 탐험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중해 쪽의 아프리카에서 조금만 남쪽으로 내려가면 ‘돌과 모래의 바다’인 사하라 사막이 가로막고 있어 유럽인들이 발을 들여놓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16세기가 되어서야 유럽인들이 해안을 따라 항해를 했고 1652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동인도무역의 보급기지로서 케이프타운에 상륙한 이래 아프리카 남부에서 북동 내륙부로 진출할 수 있었다. 그 후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유럽인들은 아프리카 남부를 제외하고는 내륙으로 들어가지 않고 해안에 살고 있는 아프리카 인들을 납치하여 노예로 팔거나 일부 물품을 강탈하는 데만 열중했다. 황금해안, 상아해안, 노예해안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였다.
유럽인들이 아프리카 내부 깊숙이 들어가지 않았던 이유는 ‘유럽인들의 묘지’라고 부를 정도로 습도가 높고 기후가 나쁘기 때문이다. 간혹 가다 내륙으로 들어간 사람들도 식인종이나 야수, 독충들에 물려 희생되기 일쑤였다. 리빙스턴이 유럽에서 그렇게 환대를 받고 유명인사가 된 이유도 바로 그런 아프리카 내륙 지역을 탐험했기 때문이며 그의 실종이 커다란 이슈가 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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