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중국의 자존심

중국의 자존심(8), 진시황제(8)

Que sais 2021. 1. 13.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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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제>

중국의 역사에서 진시황제처럼 비난을 많이 받은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마디로 그동안 중국 역사상 가장 포악한 황제로 계속 폄하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만리장성을 쌓았고 아방궁을 세웠다는 것은 애교로 치부하더라도 분서갱유로 학자들을 생매장한 폭군이라는 데는 그가 사망한지 2000년이 지났음에도 벗겨지지 않았다. 거대한 국가는 황제 한 명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신하들이 적시적소에 움직여야하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학자들을 생매장하고 책을 불살랐다는 것은 군주가 아닌 지식인들에게는 가장 질이 나쁜 사람일 수밖에 없다.

중국에서 공산정권이 들어서자마자 진시황제에 대한 비난은 더욱 거셌다.

그가 인민을 혹사시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면서 고통에 빠지게 한 것은 물론 공산주의에 반하는 독재국가를 공고하게 만든 기틀을 세웠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진시황제는 중국 자체가 절대군주제 왕국이였음에도 가장 비난 받는 독재자 중 독재자였다. 그에게 붙여진 평가는 그야말로 지독했다.

 

진시황제는 중국 역사상 가장 불안에 떨었던 사람이다.’

진시황제는 중국 역사상 가장 잔혹한 사람이었다.’

진시황제는 가장 추악하고 가장 야만적인 사람이었다.’

진시황제는 새가슴이고 좀스럽고, 비굴하고, 뻔뻔스럽고, 별난 짓을 하는 인간이다.’

 

그런데 근래 중국에서 진시황제는 상상할 수 없는 대우를 받는다. 한마디로 과거 절대 악행의 진시황제가 위대한 중국인으로 변모한 것이다. 중국 역사가들 대부분 이렇게 평한다.

 

진시황제는 중국 역사상 가장 강한 사람이다.’

 

그야말로 지금까지의 평가가 100% 변하여 한마디로 중국을 통일시킨 영웅 중 영웅이라고 설명한다. 이와 같은 반전은 현 중국의 상황에서 결정적인 전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중국은 중국인의 대다수를 구성하는 화하인이 중국을 구성하므로 화하인이 아닌 소수 민족은 대중국에서 그다지 신경을 쓸 일이 아니었다. 공산국에서는 특히 그러했다.

그런데 다민족 국가를 통솔하던 소련이 붕괴되고 수많은 국가들이 독립했다. 그러므로 중국도 소련과 마찬가지로 분리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자 전격적으로 다국적국가론을 도출한다. 한마디로 현 중국 영토 안에 사는 사람은 모두 중국인이라는 개념이다.

이에 따르면 여러 민족을 하나로 통일시킨 진시황제가 중국에서 가장 추앙해야 할 선조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중국인들이 그렇게도 경멸하던 몽골의 칭기스칸조차 중국인의 위대한 선조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중국 역사상 최초의 통일 국가를 세운 영정(嬴政)은 열세 살에 왕위에 올라 여하튼 중국을 통일했는데 영정이 중국을 통일하기 위해 동원한 병력은 100만 명, 말은 약 10,000필이다. 현재 세계의 인구가 80억 명이나 됨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으로 100만 명의 군인이 있는 나라는 미국과 중국, 러시아 그리고 북한 정도임을 알면 진시황의 능력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천하를 통일한 영정이 자신에게 어울리는 새 칭호로 진시황제를 거명한 것은 자신이 만든 통일 진나라가 영원할 것이라고 믿었던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오행설에서 보면 토덕(土德)이다.

하왕조는 목덕, 은나라는 금덕, 주왕조는 화덕이었으므로 주를 이은 진의 시대수덕이었다. 천하통일로 역사가 완성되고 오행이 한 차례 돌았기 때문에 수덕의 시대가 역사의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는 진이 천하를 통일한 기원전 221년 음력 10월 초하루를 새로운 ()의 기산일로 삼았다. 그가 10연두로 삼은 것은 사계 중 수에 해당되는 것은 겨울이고 겨울이 시작되는 첫 달이 바로 10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시황제로 정한 것은 앞으로 왕위에 오르는 자를 2, 3세를 이어 만세까지 이어질 수 있다고 보았고 바로 그런 내용을 칙령으로 반포하기도 했다. 더불어 황제의 명령을 (), 영을 (調), 황제가 스스로를 칭할 때는 이라는 등 천자만의 전용어를 만들었다.

여하튼 천하를 제패한 진시황제에 대한 평가가 그동안 극과 극을 달린 것은 우선 광대한 중국을 하나로 통일했으므로 정리해야 할 일이 하나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선 전국을 왕이나 제후들이 나누어 다스리던 봉건제 정치를 폐지하고 전국을 군현으로 나누어 황제가 직접 다스리는 중앙집권제로 바꾸었고 자신의 지시가 빠른 시간에 전국에서 시행될 수 있도록 행정 조직도 개편했다. 통일된 한자를 간단하게 만들어 넓은 중국 땅 어디서든지 글의 뜻이 서로 통하게 했다. 복잡했던 도량형을 표준화시켰으며 식량과 물자를 나르기 위해 수도 선양(善陽)을 중심으로 거미줄같은 황제도로직도(直道)를 닦았고 마차 바퀴의 모양도 통일시켰다.

문제는 이런 엄청난 일을 단기간에 정착시키기 위해 독선적인 요소를 주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백성들이 갖고 있는 무기를 몽땅 빼앗아 그들을 녹여 큰 동상 12를 만들었고 지방 호족들의 성을 모두 부수고 12만 명의 가족들을 강제적으로 수도에 와서 살도록 했다.

그러면서도 진시황제는 그의 짧은 시황제 기간 동안 5번이나 전국을 순행했다는 점이다. 이것이 큰 문제가 되었던 것은 진시황의 순행이야말로 엄청난 규모의 동원이 가동되었다는 점이다.

진시황은 이동 중에도 통일된 나라의 시급한 정사(政事)를 처리하기 위해 하나의 작은 궁궐을 꾸려 함께 다녔다. 순행지의 도시들은 황제의 행차를 모시기 위해 중앙정부에서 정한 규격에 맞춰 미리 도로를 정비했고, 순행에 필요한 물자들을 준비했다.

진시황의 화려한 전국 순행을 직접 본 항우저 놈의 자리를 내가 빼앗겠다라고 했고, 훗날 한 고조가 된 유방은 사내대장부라면 저 정도는 해야지,’라고 평을 내렸다고 한다.

시황제가 5번이나 중국을 순행했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의 1차 순행은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 조상님들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리고 이후의 순행도 자신을 천자로 만들어준 하늘과 각 지역을 대표하는 산과 강에 제사를 지내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순행을 거국적으로 한 것은 자신의 행차를 보러 온 백성들에게 자신이 너희들을 다스리는 최고의 지배자, 황제임을 대대적으로 보여주기 위함도 큰 이유 중 하나였다. 피지배자들에게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하고, 새로운 나라의 탄생을 실질적으로 느끼게 하는 것이다.

진시황은 화려한 순행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백성들에게 선포했고, 자신의 순행을 위해 애쓴 지역에는 적절한 보상을 해주었다. 또한 체계적인 법을 통해 나라의 질서를 세우고 집행하는 모습을 직접 보여줌으로써 서로 다른 관습과 시스템, 문화를 가진 지역들을 하나로 통일해 하나의 제국을 완성했다.

근래 학자들은 그동안 전혀 다른 각도로 그가 취한 조처들을 재평가한다. 그동안 그가 만든 거의 대부분 법령을 부정적으로 비난했으나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여 그가 행한 여러 조처들이 결국 중국 2,000년 왕조의 반석을 깔았다는 것이다.

그가 순행한 곳은 기본적으로 진나라가 통일한 여섯 나라의 중심부였다. 그는 자신이 순행한 곳마다 순행을 기리는 비를 하나씩 세웠다. 신라통일 후 진흥왕이 순수비를 세운 것과 다름없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그동안 알려진 진시황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혹한 법을 시행하는 악랄한 사람이 아니라, 전쟁을 종식시켜 사람들에게 평화를 가져다준 고마운 사람, 훌륭한 법으로 질서 있게 세상을 다스리는 성군으로 표현돼 있다.

진시황산동지방을 여러 차례 순방했는데 당시 순행기록을 남긴 2기의 중요한 비석이 세워졌다. 하나는 태산각석(泰山刻右)이고 다른 하나는 낭야각석(琅琊刻石)이다.

 

태산각석은 진시황 28년인 기원전 219년에 태산에 세워졌는데 태산에서 가장 오래된 비석이다. 비석의 한 면은 기원전 219년의 진시황제의 칙령이고, 다른 한 면은 2092세황제 즉 호해의 칙령으로 사마천의 사기에 전문이 남아있을 정도로 중요성을 갖고 있다. 이 비석은 사방이 넓고 좁은데 22줄의 글자, 한 줄에 12, 222자로 원래 144인데 2세황제때 78자가 추가되어 12222가 되었다.

진나라 승상 이사가 쓴 글씨로 알려져 있는데 비석은 송나라 때 발견되었으며 명나라 떄 다시 발견되었을 때 진2세 황제 때 추가한 29자만 남았고 비석은 청나라 때 사라져 29자가 적힌 탁본만 남아 있다.

낭야각석(琅琊刻石)은 진시황이 산동지방을 순행하면서 이를 기념하여 낭야산에 세운 비석으로 이 역시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비석 중 하나이다.

높이 129cm, 너비 67,5cm, 두께 37cm으로 원석에는 13, 86, 빈줄은 14줄로 되어 있었다. 1868자가 남아 있는데 승상 이사가 쓴 글씨로 추정된다. 현재 남아 있는 부분은 2세 황제가 추가로 새긴 부분이다.

일부 학자들은 이들 비석에 대해 포악한 지배자에게 잘 보이기 위한 신하들의 송덕비로 평가절하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 글자 한 글자를 아껴 쓰는 것은 물론 진시황제를 극히 혐오했던 사마천이 사기에 일곱 개 비문의 유사한 내용의 글을 그대로 옮겨 적었다는 것은 사마천도 진시황에 대해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만 기술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모든 것을 사마천의 생각대로 기록할 수는 없는 일이다.

 

참고문헌 :

진시황이 위대한 황제로 꼽히는 까닭은, 김영주, 정책브리핑, 2007.07.20.

[글로벌24 브리핑] 시진핑 주석, 아방궁 복원 사업 중단 지시, KBS NEWS, 2014.01.07

진시황, 중국학위키백과

http://m.jnuri.net/news/articleView.html?idxno=25042

http://www.poongsoojiri.co.kr/index.php?mid=board_UIpY69&order_type=asc&page=6&document_srl=21233&listStyle=viewer

http://m.jnuri.net/news/articleView.html?idxno=25078

http://www.dapsa.kr/blog/?p=527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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