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중국의 자존심

중국의 자존심(7), 진시황제(7) : 아방궁

Que sais 2021. 1. 13.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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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제의 아킬레스건 아방궁>

학자들이 가장 많이 설명하는 것은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이 주제는 역사를 다룰 때 상식이나 마찬가지이므로 한마디로 어떤 사건 또는 주장을 설명할 때 깐깐하게 여러 면을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진시황제와 가장 직결되는 것이 아방궁(阿房宮)이다.

아방궁은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건물 중 하나로 진시황제가 건설했다는 궁으로 더욱 유명세가 높다. 함양과 위수 근처의 아방(阿房)에 유적이 남아있으며 궁전은 시황제 35년인 기원전 212년부터 세우기 시작하였다고 전해진다. 아방궁의 규모는 정말로 대단하여 동서 500, 남북 50장으로 10,000명이 앉을 수 있었다고 하는데 경기장이 아니면 10,000명이 앉을 수 있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여하튼 아방궁은 진시황제가 통일한 6국의 궁전을 모방하여 6국에서 데려온 비빈을 모두 이곳으로 배치하였다. ()의 비(), 연의 수(), 오의 희(), 월의 여()를 위시해 각각 미를 겨루어 조가야현(朝歌夜絃), ‘삼십육궁혼의 봄이라는 광경을 이곳에서 출현하게 했다고 한다.

현재도 거대한 땅을 다진 토대가 남아 있는데 높이가 7미터, 길이가 1,000미터로 알져지며 책목(柵木)을 세우고 복도를 만들어 이곳으로 남산에 이를 수 있고 복도를 만들어 아방에서 위수를 건너 함양궁에 연결되었다고 한다. 특히 아방궁은 그 당시의 각지 건축 양식을 모두 반영하여 고대건축의 보고로 불린다. 이들 지역은 1961년 중국의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였다.

아방궁은 진시황을 공격할 때 단골 손님이다. 그가 천하를 통일한 후 황제의 지고한 권위를 수립하기 위해 극도로 사치스럽고 탐욕스러운 토목 공사를 자행했는데 그중 하나가 대형 건축물 즉 궁전 아방궁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진시황제의 아방궁과 조조 동작대를 가리켜 천고춘추 아방궁, 만고일월 동작대라고 부르며, 허망한 인간의 권력 성쇠를 비유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방궁의 규모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기록에 따르면 아방궁 앞에는 5장 높이의 깃대가 있었고 양옆에는 12개의 동인(銅人)을 세웠는데 24만 근이나 됐다. 자석으로을 만들어 무기를 숨기고 입궁하면 끌어당기게 만들었고. 주위 건각은 각 궁실로 통하게 만들었으며 그 길은 지세에 따라 남산에 이르도록 만들었다. 남산 정상에 궁궐을 지어 아방궁의 대문으로 삼았다. 또 이중 도로를 만들어 아방궁에서 위수(渭水) 북쪽 기슭까지 직도를 만들어 함양에 이르게 만들고 천극자궁(天極紫宮) 북극성17성의 은하수를 가로지르게 해 궁실의 천정(天庭)에 이르게 만들었다.

이런 방대한 궁전을 세우기 위해 진시황은 죄인과 죄수 70여 만 명을 징발했다고 전해진다. 이 말에 의하면 아방궁 건축 점유지의 범위는 함양에서 동으로는 임동(臨潼), 서로는 섬서성 봉상의 남쪽인 (), 남으로는 종남(終南), 북으로는 함양 북판(北坂)까지 가로 세로 300여 리에 달한다. 이외에 수도 함양 주변 200리에 궁전 270, 함양에서 함곡관 서쪽으로 궁전이 300여 곳, 함곡관 동쪽으로는 400여 개를 건설했다. 많은 궁전은 일률적으로 조각해 단청을 입혔으며 오색찬란하고 웅장하고 화려했다.

그런데 아방궁의 진실은 진시황제 때 준공되지 않아 2세 황제인 호해(胡亥) 때에도 계속 건축했다는 점이다. 사실 진시황제가 함양의 조정이 작다고 생각하여 아방궁을 지었지만 진시황제는 막상 궁전을 완공하지 못한 상태에서 사망했다.

진시황제가 워낙 창졸간에 사망했으므로 호해는 아방궁 공사를 중단하고 여산의 진시황릉 건설에 투입했다. 그런데 호해는 선제 즉 진시황제의 유업인 아방궁 건설을 장례 때문에 중단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으므로 아방궁 공사를 계속하라 명령했다.

그렇지만 아방궁 공사가 착수되었는데 곧바로 진승과 오광의 반란이 일어나 결국 아방궁은 완성되지 못했다. 역사는 이후 항우와 유방의 혈투로 이어지는데 항우가 유방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 진의 함양궁 등을 불태운다. 기록에는 100일 동안 계속해서 불탔다고 하는데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당시 불태워진 궁전의 크기가 얼마나 어마어마했는지 감을 잡을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학자들이 의심은 날카롭다. 과연 이 당시 아방궁도 항우가 불태웠는가이다.

2002년 중국은 이미 재로 변했다는 아방궁의 흔적 찾기에 나섰다.

아방궁 일대의 발굴을 지휘한 리위팡(李毓芳박사시안시 함양 아방궁터 추정지 부근 62를 샅샅이 정밀조사했으나 건물을 짓기 위한 토대만 남아 있을 뿐 건축물이 완성된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고 발표했다. 물론 아방궁터로 알려진 곳에는 동서 1,270m, 남북 426m의 흙이 단단히 다져진 토대가 발견되었고 이 토대는 동서와 북쪽에 담으로 둘러싸였으나 남쪽에는 담이 없었으며 불탄 흔적도 없었음을 확인했다담은 흙벽이 쌓아졌고 벽 위를 장식했던 기와도 발견되었는데 기와는 진나라 때의 것이 아니고 동한(東漢)과 북조(北朝)시대의 것으로 확인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리위팡 박사항우에 의해 불에 탔다는 함양의 궁전 유적에서 1미터가 넘는 두꺼운 기와 무더기를 발견했지만 아방궁 유적에서는 이런 흔적도 발견치 못했다고 발표했다.

한나라의 장락궁(長樂宮)한나라의 수도인 장안에서 가장 화려한 궁전의 하나로 한무제(武帝)의 어머니가 거주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어린 아교(阿嬌)가 같은 나이의 무제를 만난 금옥장교(金屋藏嬌)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생겨난 곳도 그곳이다. 한나라 말기에 장락궁이 불에 타 파괴되었다고 전해지는데 화재의 흔적이 아직까지도 뚜렷이 남아있다.

아방궁과 한나라 장락궁의 건축 연대가 다소 차이나지만 화재라는 같은 원인에 의해 파괴되었다면 흔적이 남아있어야 하는데 아방궁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2000년이나 지났다고 화재의 흔적조차 완전히 사라졌다고도 불 수 없는 일이다.

학자들의 이야기는 명쾌하다. 항우가 함양을 점령하여 불을 태울 때 아방궁이 아직 건축되지 않았기 때문에 한마디로 아방궁이 불탈 수 없었다는 뜻이다.

이 문제는 중국 고고학계의 논쟁을 불러왔다.

2003, 중국 사학계는 사마천의 史記에 따르면 아방(阿房) 는 가깝다는 뜻이고,곁방(자와 같은 뜻으로기존 함양궁 근방 일대를 부르는 지명이었는데공사 중 임시로 이 지명 아방을 붙여 아방궁이라고 불렀고결국 미완성 상태에서 끝나 정식 이름은 지어지지도 못했다고 결론내었다.

그러나 궁전으로서 역할도 못하고 사라졌지만인간의 상상력은 비상하여 방궁이란 명칭이 한자 문화권에서 가장 화려하고 거대한 건축물을 상징하는 개념으로 자리매김 했다는 것이다.

사마천에 의하면 진시황제는 아방궁을 짓기 위해 진시황은 많은 술사(術士)들을 불러 함양 부근에서 가장 풍수에 적합한 곳을 찾으라 했다. 그들은 () 두 도읍의 가운데에 위치한 지역을 추천했다. 고고학자들이 아방궁이 있었던 장소로 비정한 지역으로 연구팀이 조사한 지역도 바로 이곳이다.

제주 국제대의 이권홍 박사사기에는 항우가 함양궁전을 불태웠다는 기록은 있지만 아방궁불태웠다는 기록이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사기에는 마침내 함양을 점령하고 그 궁실을 불태웠는데 3개월 동안 탔다는 기록만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기에서 말한 궁실(宮室)은 불에 탄 진나라 도읍이었던 함양에 있는 궁전과 기타 진나라의 궁실이며 위하(渭河) 이남의 상림원(上林苑)에 있던 아방궁은 아니라는 뜻이다.

아방궁 앞에서 발견된 궁전 유적은 현재까지 고대 세계역사상 가장 광대한 규모의 땅을 다져 만든 궁전의 토대로 알려진다. 토대 자체가 50여 만 평방미터에 달하는데 놀라지 않을 사람이 없다. 그런데 기록에 철저한 중국의 자료를 보면 아방궁이 건설되었을 진시황제 말년에서 2세황제는 함양궁 혹은 망이궁(望夷宮)에서 정치 활동을 했지만 아방궁 이야기는 없다.

아방궁이 불에 탔다고 말한 사람은 엉뚱하게도 당()나라 저명한 시인 두목(杜牧)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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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아방궁부에서 나라 사람이 불을 붙이니 아까워라 초토가 되었구나라고 말했다. 학자들은 두목이 문학가로 아방궁을 불태웠다는 말을 지어내 풍자했다고 설명한다. 실제로 남송(南宋)의 정대창(程大昌)옹록(雍錄)에서 아방궁을 그린 그림은 많이 남아있지만 그것은 모형에 불과하고 실제로 세워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엄밀한 의미에서 두목이 유명한 아방궁부에서 아방궁을 적었다는 것이 아방궁이 존재했다는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역사는 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가짜뉴스가 보다 신빙성을 갖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인간들이 그렇게 믿고 싶은 내용이 진실로 포장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시황의 아방궁의 경우 역사상 건설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전대미문의 아름답고 사치한 꿈속의 궁전이라며 천하제일궁이라는 명성을 얻으면서 전제군주의 악행의 결과라는 오명을 뒤집어쓰는 결정적인 단서 중 하나로 제시되었다. 더불어 존재하지 않은 아방궁을 불태웠다는 역사적 죄를 뒤집어쓴 중국 역사상 최고의 영웅이라 칭송받는 초패왕 항우는 더욱 억울하지 않을 수 없다.

진시황제가 전제군주의 악행으로 아방궁을 건설하여 진나라가 멸망되는 단초를 만들었다는 누명과 항우가 거대한 아방궁을 불태웠다는 누명은 벗겨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방궁은 그동안 중국의 야심적인 프로젝트 중 하나였다. 중국은 2000년대2억 위안 즉 약 350억 원을 들여 복원했는데 복원 위치가 원래 아방궁이 있던 자리가 아니라는 이유로 철거되면서 더 크고 화려하게 재 복원하기로 결정했다.

산시성 시안 시는 무려 380억 위안, 66,000억원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예산을 투입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시진핑 주석이 이에 제동을 걸었다. 시 주석은 겉으로는 문화재 보호를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대규모 관광 단지를 조성해 돈벌이에 이용하고 또 정치적으로 업적을 쌓으려는 지방 공무원들의 욕심 때문에 추진된 사업이라는 지적이다. 가장 큰 이유는 아방궁사치 풍조를 조장할 뿐 재건할만한 문화적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시 주석의 말에 중국 공산당 기관지는 화려하게 복원된 아방궁보다 불에 탄 아방궁의 흔적을 보는 것이 더 큰 역사적 교훈이 있다고 보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