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중국의 자존심

중국의 자존심(5), 진시황제(5)

Que sais 2021. 1. 12.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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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정부 여론 탄압으로 이용된 분서(焚書)>

진시황제에게 폭군의 이미지를 듬뿍 안겨준 사건은 분서갱유(焚書坑儒). 본래 분서와 갱유서로 다른 사건이다. 분서는 잘 알려진 대로 시중에 나도는 불온서적을 모두 불태우게 한 것으로 진시황 33(기원전 214)에 있었던 일이다. 그리고 갱유는 유학자들을 산 채로 묻어 죽인 사건으로 진시황이 세상을 떠나기 두 해 전인 진시황 35에 일어났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하는 의문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중국은 하나의 국가로 통일되긴 했지만 합병을 당한 국가에는 시황제에게 원한과 적의를 품은 자가 적지않았다. 이에 따라 시황제는 방대한 중국 대륙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성문법을 만들었고, 법령에 따른 법 집행을 제도화했다. 이는 제자백가의 사상 중에서 법가(法家)만 받아들이고 다른 사상은 일절 허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법가는 군주가 정하는 법에 따라 통치한다는 사상으로 신상필벌의 원칙에 따라 엄격히 법을 적용하고 신분 고하나 귀천을 구별하지 않았던, 당시의 여건을 감안할 때 상당히 혁신적인 정치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법가사상의 창시자상앙으로 그는 진나라의 25대 군주인 효공(孝公)에게 부국강병하려면 법을 고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상앙의 말을 옳게 여긴 효공은 다음과 같이 법 개정에 착수했다.

 

민가를 열 집 혹은 다섯 집씩 반을 만들어 서로 감시하고 연좌의 책임을 묻는다. 법을 위반한 일을 신고하지 않는 자는 허리를 베고 숨기는 자는 적에게 항복한 자로 간주한다. 반면 신고한 자에게는 적의 머리를 벤 것과 같은 상을 준다.

한 집에 두 사람 이상 남자가 있는 데도 분가하지 않으면 부역과 세금을 배로 부과한다.

전공은 싸움터에서 얻은 적의 머릿수에 따르며 전공의 정도에 따라 상을 엄격히 시행한다.

사적인 싸움은 경중에 따라 처벌한다.

남자는 밭을 갈고 베를 짜며 곡물과 베를 납부하는 정도에 따라 부역을 면제한다. 상공업에 종사하거나 게을러서 가난한 자종으로 삼는다.

왕족이라도 전공이 없으면 조사하여 족보에서 제외한다.

20() 제도에 따라 토지, 건물의 대소, 첩과 노비의 수, 의복에 차등을 둔다. 공이 있는 자는 영화롭게 살 수 있지만 공이 없는 자는 재산이 많아도 화려한 생활을 하지 못한다.

 

이 법의 기본사상은 엄격한 상벌주의 원칙에 근거한 것이다. 본래 중국은 오랜 기간 모든 사회질서를 ()로 유지했다. 법과 예는 모두 일정한 규범 속에서 사회가 존속하고 발전하도록 보장한다는 점에서 형식적으로 서로 통하는 점도 있지만, 그 기본정신은 완전히 다르다.

예의 기본적인 특징구분으로 사회적인 지위를 판단하는 빈부귀천과 혈연관계를 중요시한다. 따라서 예는 일정한 신분을 가진 사회구성원이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권력과 지켜야 할 규칙을 규정한다. “예로써 귀천을 구분하고 사랑에는 차이를 둔다는 말이 구분 혹은 차별이란 면에서 예의 특성을 잘 설명해 준다. 이런 사회에서는 어떤 신분을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을 다른 신분을 가진 사람이 하면 예에 벗어난 행위가 된다.

반면 법의 통치는 근본이 다르다. 법의 기본은 차별이 없는 동일함이다. 대표적으로 어떤 법령이 공포되면, 이는 법 앞에서 모든 사람이 공평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설사 왕자라도 법을 어기면 일반 백성과 똑같이 죄 값을 치러야 한다는 얘기다.

또한 관습에 따라 유지되지만 행정적 힘에 의해 실천에 옮겨진다. 법가사상에서 말하는 공평은 사실 귀족에게 악몽이지만 백성에게는 매우 유리한 법 제도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법을 어겼을 때 받게 되는 형벌의 도가 다소 지나쳤다는 점이다.

진나라경범죄 중형으로 다스린다는 원칙을 세웠다. 가벼운 죄를 범한 자에게 무거운 벌을 내리면 다시는 가벼운 죄를 짓지 않을 뿐 아니라 더 큰 죄도 짓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길가에 쓰레기를 버려도 처벌이 내려졌고 중죄를 범하면 연좌제로 엮어 가족까지 중형을 받았다.

이 비록 엄하기는 했지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백성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이에 따라 진나라는 사회가 안정되고 인근 나라에 비해 강국이 될 수 있었다. 상앙이 사망한 것은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기 117년 전이었다. 이후 상앙의 법은 계속 이어졌고 한비자(韓非子), 이사가 법을 준엄하게 시행했다.

법가를 기초로 한 진나라의 통치 방법은 합병된 국가들의 기본 제도, 예로 다스린다는 것과 배치되었기 때문에 합병국의 학자들은 사사건건 비판을 가했다. 통일 후 안정된 사회를 구축하기 위해 모든 힘을 쏟고 있던 시황제에게 옛 제도를 그리워하는 것은 진시황에 대한 반역이었다. 더욱이 그들이 원하는 제도는 예절, 도덕, 음악 등인데 진시황은 그들이 그런 나약한 명분에 얽매이다 자신에게 정복당했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급격한 체제 변화가 불평불만자들을 양산하고, 진시황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예전의 구태의연한 관습을 근거로 대중의 인기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흥미롭게도 진시황제비난할 수 있는 빌미시황제가 만들었다.

통일을 하자마자 진시황은 전국을 군과 현으로 나눠 황제가 직접 통치하는 중앙집권제로 바꿨는데, 그가 그 제도의 조기 정착을 위해 사용한 방법이 독특했다. 충성서약을 해야 한다는 빌미로 지방의 왕이나 제후들을 수도로 불러들인 다음, 중앙에서 임명한 관리를 보내 각 지역을 접수하게 했던 것이다. 이후 그들의 가족까지 수도로 불러 일정구역에서 함께 살게 했는데, 그 숫자가 12만 명을 넘었다. 진시황은 그들이 수도에 와 있는 이상 반란을 일으킬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해 어떠한 불이익도 주지 않았다.

그런데 당시의 지도층과 학자들이 이러한 편법을 맹렬하게 비난하고 나섰다. 도덕적으로 지도자의 자질이 없다는 거였다. 통치이념으로 예와 도덕을 강조한 당대의 수많은 학자는 설사 통일을 했을지라도 도덕적 자질이 겸비되지 않은 황제는 황제로서 자질이 없다고 주장했다.

사마천은 이러한 진시황에 대해 그야말로 독설을 퍼부어댔다.

 

툭 튀어나온 코, 커다란 눈, 맹금과 같은 가슴, 승냥이의 목소리에다 친절함이라곤 조금도 없다. 여기에 호랑이나 늑대 같은 심성을 지녔다.’

 

사마천이 중국을 통일한 황제를 이렇게 폄하한 것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그가 봉직하던 ()나라가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건국됐기 때문이다. 사실상 진나라를 이은 한나라진나라가 갖고 있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태어났다고도 볼 수 있다. 따라서 진나라에 대한 한나라 사람들의 평가가 좋지 않은 것은 이해되지만 문맥만 놓고 볼 때 사마천의 평가는 매우 편협한 시각에서 저술했다고 지적한다.

한편 중국 근대의 학자 곽말약 박사는 그의 저서 󰡔십비판서(十批判書)󰡕에서 시황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시황제는 초상화와 달리 선천적인 병으로 인해 어렸을 때 외모가 추했고, 이 때문에 사람들이 꺼렸고, 특히 화려함을 좋아했던 어머니에게 거부당한 것이 정신적으로 큰 상처를 받은, 소질 있는 아이가 타고난 외모와 안 좋은 환경 때문비뚤어진 전형적 케이스다.’

 

더불어 어린 나이에 갑자기 왕이 된 탓에 제대로 된 인간 관계를 배우지 못하여 여러 가지 면이 복합적으로 가동 즉 그의 정신적인 성장에 큰 영향을 줘서 다른 사람들을 잘 믿지 못하고 그래서 무언가 이루는 것에 집착하게 되어 중국 통일에 공을 들였고 만리장성 축조 등 큰 규모의 건축을 계획하였다는 시각이다.

한편 시황제비정상적인 외모말년에 보인 정신착란 증세가 사실 심각한 뇌 손상이 가져온 결과라고 추측하는 학자들도 있다. 학자들이 주목하는 것은 수은이다. 수은을 소량 섭취하면 일시적으로 피부가 팽팽해지는 효과가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시황제가 이를 불로장생 약으로 믿었고 시황제는 매일같이 수은을 먹어 결국 수은 중독에 걸렸는데 더불어 수은은 금단 증상까지 있으므로 후대에 갈수록 시황제는 수은의 덫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의 무덤수은으로 채웠다는 것도 이를 방증한다.

어쨌든 학자들의 반기에 진시황제가 채택한 것은 과감한 사상통제였다. 그는 과거에 안주하는, 즉 통일 전의 제도에 집착하는 기득권 세력과의 단절을 모색했다. 그것이 바로 분서라는 이름으로 과거의 정책이나 제도를 옹호하는 책들을 불태우려 한 이유라는 것이다.

 

진나라 함양궁 유적

사건의 진상은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기원전 213년 전국에서 부로(父老) 70여 명을 초대해 함양에서 연회를 벌였다. 그런데 참가자 중 한 명인 주청신이 황제의 공덕과 군현제의 실행을 찬양하자, 이때 당시 자리에 있던 이사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옛 것을 답습하려 하는 것은 현실을 비난하고 불만을 표출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현실을 부정하는 것은 곧 황제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자 제국의 통치에 해를 입히는 행동이다. 따라서 옛것을 따른다는 명분 아래 현재의 정책에 반기를 드는 자들을 적절히 제압해야 하며, 그것이 선악을 구별해 올바른 정치를 하는 길이다.’

 

그의 원래 뜻은 옛 사상과 제도에 매달려 있다면 통치에 해로울 것이라고 말했는데 현대적인 관점에서 이사가 황제의 위엄을 등에 업고 전국적으로 문화말살이라는 폭행을 자행했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이사가 책이란 책은 모두 불태웠다는 것은 과장이다. 우선 천문, 지리, 점술, 의학, 농업 등 각종 실용서적은 남겨두도록 했다. 또한 불온사상과 관련된 책도 정부기관의 도서관 같은 곳에 남겨두어 연구하도록 했다. 실제로 춘추전국시대의 수많은 책이 현재까지 전해지는 이유시황제의 분서 조치상징적인 것에 불과했음을 보여준다.

더욱이 당시의 책은 종이로 만든 것이 아니라 죽간이나 목간이었던 터라 웬만한 책 한 권 분량이 상당했다. 이에 따라 학문의 주된 방법은 스승이 제자에게 구전으로 가르치는 식이었다. 결국 일부 서적을 불태웠다고 해서 머릿속에 있던 모든 사상이나 이론이 사라졌던 것은 아니다. 한마디로 분서반정부 여론을 억제하기 위한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사실 이 방법은 지금도 각국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국민 통제방법 중 하나.

내용은 어떻든 분서의 영향은 상당 부분에 미쳤다.

분서의 풍파로 현전하는 중국의 고서 중에 기원전 3세기 이전의 것은 많지 않다는 점이다. 그런데 학자들은 진시황제의 분서에 이어 항우와 유방의 혈투로 인한 분서가 오히려 더 큰 피해를 입혔다고 주장한다. 진나라에서 여러 유학에 관련된 책들을 연구용으로 1부씩은 보존하고 있었는데 항우가 유방보다 먼저 함양을 점령하여 불태울 때 자료들을 거의 파괴했다는 것이다.

이 당시 사라진 책들이 워낙 많으므로 곧바로 복원 절차에 들어갔다. 그러나 한 번 사라진 책들의 복원이 간단한 것이 아니다. 잔존하는 책들이 없으므로 대부분 이를 기억하고 있는 유학자들의 기록을 중심으로 복원해야하기 때문이다.

다행하게도 한나라 초기󰡔시경󰡕, 󰡔서경󰡕, 󰡔예기󰡕, 󰡔춘추󰡕 4경이 복원된다. 주역은 애초에 역술에 관한 책으로 분류되어 분서갱유의 화를 피했다. 물론 각 복원본마다 내용이 달랐다. 책을 외운 사람들끼리도 내용이 조금씩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에 복원된 고전을 일괄적으로 정리할 필요가 생겼는데 이것이 바로 한나라 시대를 대표하는 훈고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