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중국의 자존심

중국의 자존심(9), 2세황제 호해

Que sais 2021. 1. 13.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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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제가 진제국을 탄생시켰지만 그의 진제국은 공식적으로 313년 만에 멸망한다. 학자들은 이렇게 급속도로 진나라가 멸망하는데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결정적인 요인으로 후계자 결정을 꼽는다. 바로 이세황제(기원전 229기원전 207)인 호해(胡亥) 즉 진시황제의 막내아들이 후계자가 되었다는 것을 결정적인 패착으로 지적한다.

이세황제인 호해(胡亥)는 진시황제의 18번째 막내아들로 알려지지만 그가 언제 태어났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사마천의 사기<진본기(秦本紀)>에 의하면 호해가 등극할 때의 나이가 12였다고 하지만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에는 2대 황제 원년에 그의 나이가 21라고 하고 있다. <진시황본기>의 내용에 따라서 역산하면 출생연도를 기원전 229으로 추정한다.

호해는 통일 중국 즉 진()나라의 제2대 황제이자 중국 역사상 두 번째 황제인데 중국 역사상 최초로 시해당한 황제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가 자살한 지 한 달 보름 후 영자영이 한고조인 유방에 항복하여 멸망한다.

막내아들 호해가 2세 황제가 되는 연유는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기원전 210, 진시황이 순행에 나서면서 호해와 모사꾼 조고(趙高)도 동행했는데 진시황이 사구에 이르렀을 때 병세가 악화되어 결국 사망했다.

사기에 의하면 진시황이 장남인 부소가 제위를 계승하도록 유언했으나 조고승상 이사(李斯)와 짜고 진시황의 유서를 날조해 호해에게 제위를 계승하게 하는 것으로 나온다. 그런 후 부소와 몽염에게 자결하라는 명을 위조하여 발송했다고 한다.

사기의 내용만 보면 그다지 이상할 것은 없다. 당대에 칙서를 위조하는 것이 간단한 것은 아니지만 진시황제가 사망했으므로 비밀리에 뚝딱 조작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당시 진시황제를 수행한 이사와 조고는 당대의 핵심 중 핵심이므로 진시황제의 국새를 관리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런데 학자들은 사마천의 사기에 나와 있는 이들 기록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의견을 보인다. 시황제 본인이 2대 황제로 태자인 부소로 지정했으나 그의 사후 환관 조고와 이사가 자신들이 권력에서 소외될 것을 두려워해 유언을 거짓으로 조작하여 호해2대 황제로 옹립하였다고 하는데 이 말을 그대로 믿기에는 너무 허점이 많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런 엄청난 음모가 어떻게 일반인들에게 알려지며 그것도 사마천이 글에 쓸 정도이냐는 것이다. 그야말로 황제 위를 다투는 극비의 일이 버젓히 나돌아 다닌다는 것은 가짜뉴스라 해도 너무했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앞뒤가 맞지 않아 이들 내용 자체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학자들은 조고와 이사가 진시황제의 칙서를 위조한 것이 아니라 당대의 여건 상 어떤 이유로든 시황제가 직접 호해로 결정했을 개연성이 높다고 설명한다.

여기에서 가장 먼저 지적된 것은 사마천의 사기를 보더라도 시황제가 장남인 부소에게 마음이 떠나있던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한다. 그렇지 않다면 황태자인 부소만리장성 건설하는 곳에 보냈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당대의 여건상 언제 암살 공격받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황태자를 멀리 두는 것은 상식이 아니라는 뜻이다.

더구나 부소'태자', '후계자'로 칭해지기는 했지만 사실 시황제가 생전에 부소를 직접 후계자라고 언급한 적이 없다는 것도 지적감이다. 후계자를 공식적으로 지명하는 태자 제도춘추 전국 시대에 상당히 보편화되었으며 후계 구도를 안정시키는데 도움을 주었다. 진시황의 아버지 장양왕이 후계자 서열이 떨어짐에도 진나라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원동력도 사전에 후계자로 지명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소를 변방으로 보냈다면 그가 후계자 경쟁에서 탈락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막상 시황제는 호해에게도 사전에 힘을 실어주는 말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마천은 바로 이런 내용을 근거로 조고와 이사가 뚝딱 시황제의 칙서를 조작했다고 하는데 여기에서 석연치 않은 것은 진시황제의 충신 중 충신으로 진나라를 진정한 통일국가로 만든 이사가 칙서의 조작에 가담했다는 것이다.

당시 진나라법가 사상이 지배적이었는데 법가는 이사의 전매특허나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법가에서 장자 우대가 기본인데 이 와중에 이사가 조고와 짜고 멀쩡하게 장남인 부소가 아닌 막내아들을 임명했다는 것은 비상식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사호해를 황제로 옹립하는데 찬성한 것은 충분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일부 학자들은 호해가 진시황제의 18명의 자식 중 막내라는 점에 방점을 찍는다.

당시 북방 기마민족 계열에서는 기본적으로 막내를 후계자로 세웠다. 이는 한 치도 알 수 없는 혼돈의 시기에 막내를 우대하는 것은 막내가 형제 중에서 가장 오래 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진나라는 전국시대의 다른 나라와는 달리 북방 기마민족흉노 등의 전형인 기마술을 기본으로 했다. 그러므로 당대에 진나라야만국가라고 왕따 시키기도 했다.

결론은 이런 야만국 진나라가 통일 위업을 세웠는데 진시황제의 근원북방족들의 풍습을 잘 아는 막내인 호해에 관심을 많이 가졌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이 말은 역으로 진나라의 내부 사항을 잘아는 이사가 호해의 옹립에 반대하지 않았다는 뜻도 된다.

여하튼 부소는 호해가 2세황제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자살하여 후계자 문제는 깨끗하게 마무리된다. 그가 자살하지 않고 거짓 황명이라고 반기를 들었다면 통일된 진나라가 다시 갈라져 부소파와 호해파로 나뉘어져 대규모 내전이 벌어졌을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소가 자진했다는 것은 진시황제가 자신을 멀리한 이유를 이해했다는 뜻도 된다.

여하튼 호해는 가장 걸림돌이라 할 수 있는 형 부소와 명장 몽염, 우승상 풍거질(馮去疾), 대장군 풍겁(馮劫) 등은 물론 자신의 제위를 위협할 만한 형제와 누이 20여 명숙청하고 제위에 오른다.

근래 진시황릉 주변에 있는 여러 곳의 배장갱이 발굴되었는데 무덤의 부장품이나 호화로운 관을 볼 때 왕족의 무덤으로 추정한다. 그런데 막상 묻힌 유골은 나이도 젊고 건강 상태도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두개골에 화살촉이 박혀 있거나 사지가 토막나는 등 잔혹한 처형을 당한 상태였다. 이는 호해가 죽인 그의 형제 자매들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사기에 의하면 이때 누이 10명은 가장 잔혹하게 사지를 찢어 죽였다고 하는데 실제로 진시황릉 발굴 때 발견된 여성으로 추정되는 유골들이 팔다리가 인위적으로 절단되어 나란히 포개져서 묻혀 있었다. 이는 사기에 나타난 잔혹한 기록이 사실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사기<이사 열전>에 보면 호해의 형제 중 유일하게 공자 고(公子 高)가 먼저 죽음을 청했기 때문에 호해가 은혜를 베풀어 자살을 허락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배장갱에 매장된 남자 유골 1구만 외상이 없어 이를 공자 고의 유해라고 추정한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의 통일 왕조가 출현했지만 진시황의 급속한 중앙 집권 정책과 과도한 토목 공사가 백성들의 큰 불만을 사고 있었던 차에 호해가 즉위했다. 그런데 호해는 그를 즉위케 만든 조고에게 휘둘리면서 제대로 된 정치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특히 막내아들인 호해가 정상적으로 등극하지 않았다는 의혹과 자신의 형제자매를 모두 살해하여 비난이 계속되는데 진시황 대의 토목 공사를 그대로 이어갔다. 진시황의 거대한 능침인 여산릉의 공사를 계속하는 한편, 진시황 대에도 완공되지 않았던 아방궁과 만리장성 공사도 이어갔다.

문제는 이런 토목 공사가 지속되면서 백성들의 불만도 커져가자, 문제점을 잘 알고 있던 승상 이사호해에게 아방궁 건립의 중단과 조세 부담 완화를 주청했다. 그러나 조고의 농간으로 호해가 이를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고 이사는 결국 숙청된다. 이후 호해는 조고에게 모든 국사를 맡겨버리고 자신은 유흥에 빠져들었다.

결국 진나라의 과도한 조세와 부역 및 급속한 중앙 집권 정책에 대한 불만이 폭발해 진승오광의 난이 일어나는데 이 난은 장한에 의해 겨우 제압되었지만 이들 반란을 시점으로 진나라에 저항하는 반란이 속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해는 진시황제가 명목만 살려 둔 ()나라의 군주를 폐하여 명실공히 중국을 완전히 통일한다.

그러나 진승오광으로 촉발되어 유방항우 등의 세력들이 일어나고 이들이 진나라의 수도 함양을 향해 진격해 들어오면서 진나라는 위기를 맞게 된다. 상황이 이렇게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음에도 조고가 중간에서 보고를 차단한 탓에 호해는 정세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진승오광의 반란을 제압한 장한조고의 모함에 제거당할 위기에 처하자 장한이 항우에게 투항한다.

더 이상 진나라를 지킬 힘이 없는 상태가 되는데 유방의 군대가 함양 남쪽 무관에 이르자 결국 조고는 호해가 모든 것을 알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사위인 염악과 함께 모반을 일으킨다. 십팔사략에 호해의 마지막 순간에 대해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호해 :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날 때까지 짐에게 미리 말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단 말이냐?

시종 : 말씀드렸다면 살아있을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신도 지금이 아니었다면 이미 죽었겠지요.

 

조고의 사위인 염락(閻樂) 군대를 이끌고 황궁을 포위한 후 호해에게 자결할 것을 강요하여 결국 호해가 살려달라고 애걸했으나 거절당하고 자결한다. 그의 나이 22세로 추정한다. 그의 뒤를 부소의 아들로도 알려지는 자영(子嬰)이 뒤를 잇는데 특이한 것은 황제가 아닌 왕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천하를 통일한 진나라는 호혜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영에 의해 완전히 멸망한다. 진시황제가 죽은 지 단 4년도 버티지 못한 것이다.

염락에 의해 망이궁(望夷宮)에서 자결을 강요당한 호해는 시안의 두현(杜縣) 남쪽 의춘(宜春)에 매장되었다. 그런데 그는 2세 황제라는 황제의 명칭을 폐기하고 평민의 예로 장사 지냈기 때문능호를 쓰지 못하였다. 그러나 현재 그의 무덤에는 2세황제릉(秦二世皇帝陵)이라고 적혀있고 다른 표석에는 진2세묘라고도 표기되었다.

 

<왕으로 격하된 영자영>

호해가 자살한 후 진나라는 항왕(降王)으로 알려지는 영자영이 뒤를 잇는다. 그의 출생은 명확하지 않는데 사기<진시황본기>에는 호해의 형의 아들로 적혀있으므로 소설 초한지대부분 기록에서는 부소의 아들로 설명된다. 그러나 호해가 즉위하자마자 모든 형들을 죽였다는 기록과 실제 진시황릉에 배장된 유골들을 볼 때 대체로 진나라의 방계 황족으로 인식한다. 황제 칭호를 포기하긴 했지만 후대인들이 삼세황제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그가 왕위에 오른 것은 상당한 에피소드가 있다.

조고는 이세황제인 호해가 자살하자 당대에 인망이 두터운 자영을 옹립시키려고 했다. 그런데 자영즉위식 당일에 병이라고 칭하고 결석했고 거듭해서 사자의 설득을 거부했다. 화가 치민 조고가 스스로 자영의 집으로 찾아가 설득하려 했는데, 자영은 자신의 아들과 심복 부하들을 매복시킨 후 들어오는 조고를 살해하고 그 일족을 모두 제거한 뒤에야 왕이 되었다.

그러나 이때 천하는 이미 각지의 군벌이 차지하여 진나라의 영토는 함곡관 서쪽으로 축소된 상태였으므로 스스로 황제의 칭호를 버리고 진왕(秦王)으로 낮추었다. 이미 유방의 군대가 함양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고, 자영은 장수들에게 몇 차례 맞서 싸우도록 했지만 장자방장량의 계략 등에 농락당하면서 속수무책으로 패배하고 만다.

결국 자영은 장례식을 상징하는 백마가 끄는 흰 마차와 흰 소복을 입고 목에는 전국옥새를 걸고유방에게 항복하게 되는데 즉위한 지 45일 만이었다. 유방은 항복을 받아들이고 자영과 그 일족의 안전을 보장했지만, 뒤늦게 함양에 입성한 항우는 진시황이 각국을 멸망시킨 죄 등을 물어서 진왕 자영과 일족을 처형시켰으며 자영의 죽음으로 진나라 황족의 대는 완전히 멸족 당한다.

항우의 자영 처형은 당대의 민심이 항우에서 유방으로 넘어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우선 전국시대 진나라 영역이던 관중 및 서천 지역이 유방을 지지하였고 이들 지역이 유방의 든든한 후방 보급처가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사실상 이때부터 항우는 내리막길로 치닫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참고문헌 :

 

'중국서안 진시황릉 기행문', 문화재청, 목을수, 2017.12.22.

'2세 황제', 나무위키

'영자영, 나무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