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중국의 자존심

중국의 자존심(6), 진시황제(6)

Que sais 2021. 1. 12. 16:38

youtu.be/WBEItruKGko

<방사들의 횡포를 응징한 갱유(坑儒)>

갱유는 분서와 또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시황제는 포고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과거에 비춰 오늘을 경시하는 자는 마땅히 구족(九族)을 멸하겠다.’

 

이는 덕을 갖추되 그의 정책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처벌하겠다는 뜻이지만, 본래 이 사건은 두 명의 방사가 함양성을 몰래 빠져나간 데서 비롯되었다. 그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하려면 우선 당시의 과학 수준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시황제신선이나 불로불사의 존재를 믿었다. 이는 주술적인 차원이 아니라 당시의 의학수준에서 비롯된 것이다. 시황제 주변에는 불로장생의 약을 구할 수 있다고 현혹하는 수많은 도사가 들끓었다. 후생과 노생도 그런 도사였고 앞서 불로초를 구하러 떠났다고 말한 서복 역시 그런 인물 중 하나였다.

방사서복(徐福)은 젊은 남녀를 끌고 신비로운 불사의 땅이라는 삼신산(三神山)에서 불로초를 구해 오겠다고 했는데 삼신산이 한반도의 지리산, 한라산, 금강산을 의미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 서복이 불로초를 구하러 온 것이 한반도라는 뜻이다. 그러나 국내의 많은 학자들이 이 주장에 반론을 제기하는데 이 부분은 <서불과차>에서 다루었으므로 참조하기 바란다.

 

서 복

여하튼 시황제는 방사들의 말을 믿고 많은 자금을 내주었다. 서복의 경우 불로초를 얻기 위해 동남동녀 각 500명을 대동했다는 것을 볼 때 그야말로 파격적인 대우를 해주었음을 알 수 있다. 후생과 노생 역시 불로불사의 약을 가져다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진시황으로부터 많은 돈을 뜯어냈지만, 세상에 그런 약이 있을리 없다. 그들은 자신의 죄가 탄로 날 것을 우려해 마지막 수단을 강구하는데 그냥 도망갈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이 도망가는 이유황제의 부덕을 꼽았다. 한마디로 돈은 모두 챙긴 후 황제가 부덕해서 도망간다는 뜻이다.

그들이 황제를 비판한 글은 지금도 남아 있다.

 

시황제의 사람됨은 천성이 강철 같고 포악하며 자신만만하다. 제후의 몸으로 천하를 병합하고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이뤘던 터라 고금을 막론하고 자신보다 나은 사람이 없다고 생각한다. 오로지 옥리만 신임하고 총애하며 박사가 70명이나 있는데도 그저 숫자만 채우고 있을 뿐 쓰지 않는다.

승상 이하 여러 대신도 황제가 결정한 사항만 받아들인다. 황제가 형벌과 사형으로 위엄을 과시하기 때문에 백성은 죄를 지을까 두려워하고 신하들은 녹봉만 유지하려 애쓸 뿐 누구 하나 충심으로 황제의 잘못을 간하지 않는다. 이에 따라 황제는 날로 교만해지고 신하들은 그 위세에 눌려 거짓말로 비위를 맞추기에 급급하다.

진의 법률은 가혹해 방사들은 두 가지 방술을 겸할 수 없고 또한 효험이 없으면 사형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도 별자리로 점을 쳐 길흉을 예지하는 자가 300명이나 된다. 이들은 모두 선량하지만 황제의 비위를 거스를까 두려워 아첨만 하고 감히 황제의 과실을 직언하지 않는다.

천하의 일은 대소를 막론하고 모두 황제가 결정하며, 저울로 결재서류의 무게를 달아 밤낮으로 결재해야 할 분량을 정해 놓고 그것을 모두 처리하기 전에는 쉬지 않았다. 권세를 탐하는 정도가 이쯤 되니 선약을 구한다 해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자신에게 수많은 자금을 받아간 자들이 이런 악담을 하며 도망을 쳤으니 화가 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더불어 그가 늦게까지 열심히 일한다는 것 자체가 권세를 탐한다고 악평하니 화가 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진시황제로부터 수많은 자금을 뜯어낸 당사자들이 그가 선약을 구할 수 없을 거라는 말은 그야말로 모욕 중의 모욕이었다. 그들이 도망쳤다는 소식을 듣고 대노한 진시황제는 어사대(御史隊)를 파견해 함양 내의 모든 유생을 검열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금기사항을 위반한 사실이 있는 460명을 찾아내 모두 생매장시켰다. 이것이 그 유명한 갱유.

그런데 흥미로운 이야기도 있다. 진시황제의 진나라가 멸망한 후 항우와 유방간의 초한전쟁항우가 유학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자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시황제 그놈이 왜 그렇게 너희들을 탄압했는지 알겠다.’

 

항우가 보아도 당시의 방사들이 얼마나 큰 문제를 갖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진시황생매장 시킨 460명의 사람들은 현대인들이 흔히 말하는 유학자들이 아닌 도사라 칭하는 자들이라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즉 이들은 진시황제의 불로불사의 꿈을 이용해 많은 돈을 받아낸 뒤 그를 속여 농락하였다. 이 말은 갱유를 당한 사람들은 진시황을 속인 사람들이지 그저 학문의 길을 걷는 학자들이 아니라는 말이다. 청나라 때의 학자인 양옥승은 이렇게 말하기도 하였다.

 

분서갱유진시황제의 죄악으로 단정하는 세상의 논단에 대해 나는 항상 실상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생매장 당한 자들은 대부분 도사임은 분명하지만 이중 진시황제의 정책에 불만을 표시했던 일부 지식인들도 포함되었을 것은 틀림없다.’

 

여하튼 진사황제 때 죽임을 당한 자들은 대개 정통학자가 아니라 술수를 쓰던 도사라는 뜻인데 이것조차 이설(異說)이 많아 후세 유학자가 꾸며낸 것으로 추측하는 학자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분서와는 달리 그들을 생매장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분서갱유 장소

그런데 놀라운 지적도 제기된다. 갱유로 매장된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다른 황제들이 자행한 살인에 비하면 460명이라는 숫자는 새 발의 피라는 주장이다. 봉건 전제군주 정치에서는 군주의 권한이 절대적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시황제의 행동이 결코 특이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한 군주가 죽었을 때 수많은 신하와 처첩을 산 채로 묻는 순장제도를 미화한 고대 군주들이 더욱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진시황제의 선임인 진무공이 죽었을 때는 모두 66명이 순장되고, 진목공 때는 그 수가 177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진목공과 함께 순장된 엄식, 중항, 침호진나라의 현신이었음에도 산 채로 매장되었다.

순장제도는 진나라에서만 200년이나 계속되었는데 당시 순장된 사람은 갱유처럼 다소 문제가 있던 유생 등이 아니라 그야말로 충실한 신하는 물론 정부의 고관들이었다. 그런데도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사람들이 비난받지 않는 이유는 당시의 관습과 제도를 따른 것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진시황제의 분서갱유가 올바른 처사라는 얘기는 아니지만 일부 학자들은 통일된 진나라의 통치가 15년도 지탱하지 못한 데다 살해당한 사람들이 설사 방사라 해도 책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이므로 이들을 빗대어 지나치게 폭군의 이미지를 부각시켰다고 설명한다. 이를 역으로 설명하면 진시황제는 전국시대라는 중국 대륙의 혼란을 종식시킨 유능한 사람이었지만 분서갱유로 인하여 폭군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탄력 있게 운용된 법가사상>

진나라의 통치가 매우 암울하고 억압적이었다고 많이 알려졌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자료도 많이 남아있다. 근래의 연구 자료에 의하면 시황제는 단순히 법가사상만으로 통치하는 것은 충분치 못하며 또한 위험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고 있었다. 이에 따라 그는 법가사상을 수정 및 보완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유가의 덕치(德治)와 도가의 무위(無爲)사상을 흡수했다.

 

여불위

실제로 진시황제가 등극한 초창기에 집정을 맡은 여불위형벌과 덕, 회유와 진압을 함께 사용해 정책을 수립했다.

진시황제를 매우 미워한 사마천󰡔사기󰡕 <진본기(秦本紀)>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온다.

 

죄인을 사면하고 선왕시대에 공을 세운 공신에게 상을 내렸으며 친족에게 덕을 베풀고 백성에게도 널리 은혜를 베풀었다.’

 

진나라 시절의 지방 하급관리 묘에서 나온 기록도 법가사상이 마냥 난폭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음을 잘 보여준다. 그는 형사사건을 전담하던 관리로 그의 묘지에서 직무수행의 규범집이 출토되었다.

 

조정의 부역에 징발된 인원이 도착하지 않으면 담당자는 2갑의 벌금을 부과하고 3일에서 5일 안에 도착하면 견책, 6일부터 10일까지는 1순의 벌금을 부과한다. 10일을 넘기면 1갑의 벌금에 처한다.’

 

이것은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무조건 사형에 처한다는 일벌백계주의가 진나라의 통치이념이 아니었음을 잘 보여주는 증거다. 따라서 사가들은 부역을 가다가 홍수를 만나 길이 끊기는 바람에 제 날짜에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한 진승(陳勝)과 오광(吳廣) 일당이 남긴 어차피 죽을 바에는 반란을 일으켜 살 길을 찾자라는 고사는 사실과 다르거나 또 다른 이유가 있었음이 분명하다고 주장한다.

사가들이 놀라는 또 다른 점은 진나라에서 용의자를 심문할 때 의외로 조리 있게 했다는 것이다. 이규조의 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문할 때는 당사자의 말을 모두 듣고 그것을 기록해 두어야 한다. 각자에게 진술을 시킬 때는 거짓을 고하는 것이 명백하더라도 그 자리에서 일일이 힐문해서는 안 된다. 진술이 모두 끝나고 달리 변명이 없다면 그때 비로소 진술 기록을 근거로 해서 심문하라. 심문할 때 대답을 못하고 범인임이 명백한데도 계속 거짓을 고하며 말을 바꾸면서 죄상을 인정치 않을 경우, 그 태도가 규정에 비추어 고문을 가하지 않으면 자백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될 때에 한해 고문하라. 다만 고문할 때는 그 이유를 보고서에 명기해 두어야 한다.’

 

피의자가 진술한 내용을 근거모순점을 찾아내 범행을 자백하도록 유도해야 한다는 심문 태도를 볼 때, 과거 우리나라에서 자행된 고문 행태가 오히려 부끄러울 지경이라는 지적도 있다. 이처럼 진나라의 체제가 형벌을 엄격히 한 것은 사실이지만, 나름대로 합리적인 법 운영과 잘 짜인 관료조직이 진나라를 강대국으로 만든 요인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관료조직은 한나라를 비롯해 후대로 계승되면서 개량되고 정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