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중국의 자존심

중국의 자존심(11), 진시황제 저격 창해역사는 한국인(2)

Que sais 2021. 1. 13.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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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제의 암살 창해역사>

진시황에 등장하는 암살자로 형가와 못지않게 유명한 사람이 장자방으로 보다 알려진 장량(張良, 기원전 250기원전 186)창해역사. 장량은 통일진나라가 멸망하는 한의 쟁패 때부터 한고조 유방의 정치가 및 전략가로 활약했다. 본래 한나라의 귀족 출신으로, 유방의 막료로 활약하며 그의 천하통일에 크게 공헌했고 이 공으로 유후(留侯)에 봉해졌다.

여하튼 기원전 230진나라의 군사력에, 장량의 조국인 한나라가 멸망하는데 장량의 아버지나 할아버지는 고관대작이었으나 그는 나이가 어려 벼슬을 하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장량이 유력 가문 출신이었으므로 진나라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 자신의 재산을 털어 유능한 자객을 찾으러 다녔다. 목적은 진나라의 진시황(秦始皇)암살하는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장량은 회양(淮陽)에서 동쪽으로 가서 '창해군(倉海君)'이란 인물을 만났으며, 그에게 역사(力士)를 소개받았는데 그가 곧 창해역사(滄海力士)라 불리는 인물이다. 장량창해역사를 위해 120근이나 되는 철추를 만들어주어 진시황을 죽이려 했으나 실패하자 하비성으로 도망쳤다.’

 

단 한 줄에 관한 내용이지만 사마천의 사기에 적혀있으므로 비중이 높을 수밖에 없는데 여하튼 장량으로부터 120근의 철퇴를 받은 창해역사는 마침 진시황이 동쪽으로 순수(巡狩)하러 나오는 시기를 노려, 지금의 하남성 원양현(原陽縣) 동남쪽인 박랑사(博浪沙)에서 황제를 저격했다. 박랑사는 황하 북부 하남성에 있는 지명으로 진시황제가 가는 길목으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다.

그런데 36량의 마차가 박랑사로 접근하는데 36량 모두 똑같은 4필 마차였다. 원래 규정에 의하면 황제6필의 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신하들은 4필 마차를 탄다. 그런데 6필 마차는 없지만 그 중의 한 마차에 시황제가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어느 마차에 시황제가 타고 있는지 알 수 없던 장량창해역사에게 가장 호화롭게 보이는 중간 마차를 공격하라고 했다. 마차는 창해역사의 120근 대철추 한방에 박살나고 타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죽었으나, 부서진 마차에는 시황제가 타고 있지 않았다. 이때 대철추에 맞은 마차를 부거(副車)라고 한다.

진시황은 자객에 항상 노출될 위험이 있으므로 수레를 모두 4필마로 바꾸고 수시로 바꿔 탔기 때문에 장량과 창해 역사가 어느 마차에 시황제가 타고 있는지 판단하지 못한 것이다. 시황제는 암살에서 벗어나자 전국에 10일 내로 관련자를 체포하라는 어명을 내렸다고 하는데 이후 장량의 이야기는 나오지만 창해역사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장량은 이름과 성을 모두 바꾸고 하비(下邳)로 들어가 몸을 감추었다. 아쉬운 것은 진시황제를 공격한 창해역사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는데 만약 그가 체포되었다면 곱게 죽지는 못했을 것이다.

유방이 한나라를 건국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장자방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내용이 많은데 진시황제 암살에 실패한 후 하비에 은거하였고 결국 유방을 만나 항우와의 혈투에서 승리하여 한나라가 건국되는데 큰 역할을 한다.

여하튼 장량의 이런 행동은 후대인들에게 큰 인상을 주어 장량을 중국의 역대 최고의 의사 중 한 명으로 꼽힌다. 남송(南宋)의 충신으로 손꼽히는 문천상(文天祥)정기가(正氣歌)서 역대 의사들의 행동을 거론하면서, 장자방의 일화를 '진나라 장량의 추(在秦張良椎)'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막상 한국인에게 이들 이야기가 큰 주목을 받는 것은 창해역사한국인과 연계된다는 주장이다. 우선 창해라는 지명이 은 진나라에는 없는 군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사기집해에서는 '창해군''동이의 군장'으로 추측하였고, 당나라 시대의 인물 사마정사기색은에서 한나라 때 동이의 예군() 남려우거(右渠)를 배반하고 예인 28명을 데리고 투항하자, 그곳에 '창해군'을 설치한 것을 근거로 예맥계 이민족으로 보았다. 또한 사기<동이열전>한무제창해군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제가 설치한 창해군의 위치에 대해서는 학설이 분분한데 압록강에서 동해안까지 다양하다. 창해군(蒼海郡)은 기원전 128년에 설치되어 3년 만에 폐지되었는데 만약 장량의 시대 이전부터 한반도의 특정 지역창해라는 지명이나 집단명으로 사용했고 이것이 한무제창해군(蒼海郡)이라는 행정명을 붙이는데 영향을 끼쳤다면 연관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 초한쟁패 때 혹은 그 이전부터 '창해'를 자칭하는 무리가 있었고, 후에 한무제에게 귀의한 이들이 이 이름을 계승해 창해군이 설치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반면, 장량이 만났다던 창해군()나라의 현인이었다는 설도 있고 남쪽의 이민족 제오(諸奧)의 군장으로서 월나라가 초나라에게 멸망하자 월왕 무강(無彊)의 아들이 독립하여 스스로를 창해군(倉海君)이라고 칭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그 사람을 가리킨다는 설도 있다.

 

<강원도의 창해>

강릉에서는 여용사창해역사(滄海力士)라고도 한다. 여기서 창해예국을 가리킨다. 창해역사고대 예국의 신화적 인물로 강릉 지역의 마을신인 육성황신(肉城隍神) 가운데 한명이기도 하다. 창해역사와 관련한 이야기는 사마천의 사기』「장량열전(張良列傳), 홍직필의 창해역사 유허기가 있는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이 조선시대 학자 홍만종이 쓴 순오지의 글이다.

 

예국의 노파가 시냇가에서 호박만한 알이 떠내려 오는 것을 주워 두었더니, 얼마 안 되어 알이 두 쪽 나며 남자아이가 나왔다. 그 아이 얼굴이 보통 사람이 아니었으며, 6세가 되자 키가 8척이나 되고 얼굴빛이 검어서 성인과 같았으므로 검을 ()자를 성으로 삼고 이름은 용사라 불렀다. 여용사가 예국의 호랑이를 퇴치하기도 하고, 만 근이나 되는 종을 옮기는 등 괴력을 발휘하자 왕은 상객으로 대우하였으며 그가 죽은 곳은 알지 못한다.‘

 

홍만종은 여러 기록을 예로 들면서 예국이 예전에 강릉에 있었으며, 진한시대부터 중국과 상통하였고, 오대산에 창해군이라는 옛터가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 믿을만하다며 창해 역사한국 사람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또한 강릉에 있던 동예는 실직곡국, 파조국과 함께 창해삼국이라 불렸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주로 강원도 지역에서 전승되는 설화로서 창해역사의 탄생담·장량(張良)과 창해역사등이 채록되어 있다.

설화에 의하면, 창해역사는 고향이 강원도 강릉이다. 강릉 남대천에 큰 두레박이 떠내려가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건져다가 열어 보니 얼굴이 검은 한 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가 곧 창해역사라는 것이다. 창해역사는 힘이 천하장사였는데, 장자방이 진시황을 제거하려고 천하를 두루 다니며 힘 센 사람을 찾다가, 강릉에 이르러 창해역사를 만나 진시황을 없애 달라고 당부를 하였다는 것이다.

창해역사는 천 근 짜리 철퇴를 들고 진시황이 행차하는 길목에 숨어 있다가 진시황이 탄 가장 화려한 수레를 공격하였는데, 진시황은 다른 수레에 타고 있었기에 죽음을 모면하였다는 내용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창해역사는 즉시 모래밭을 뚫고 삼 십 리를 달아나 사라졌다고 한다. 그런데 적어도 열흘 동안 붙잡히지 않았지만 결국 붙잡혔을 것이라는 설명도 있다.

창해역사의 성은 여씨 또는 박씨로도 나타나며 창해역사가 검게 보이므로 검을 여()가 성씨라고도 하고, 예국(濊國)의 평민이라고도 한다. 한편, 아산시에서 채록된 자료에는 강원도 박가의 아들 삼 형제 중 맏이라고 하여 성이 박씨 임을 주장하고 있다.

이처럼 설화에서는 창해역사를 우리나라 인물로 설정하고 그 고향과 성씨를 구체화하고 있는데 이같은 설화는 창해(滄海)라는 말이 본래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말이고, 창해역사의 신원이 역사에서 분명히 밝혀져 있지 않은 데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강릉지역의 탈놀이강릉관노가면극에 등장하는 시시딱딱이창해역사를 형상화한 것이라는 설명도 있다.

사실 당대에 폭군으로 알려진 진시황을 공격한 창해역사의 행위처럼 매력있는 주제는 많지 않다. 그러므로 창해역사를 한국인으로 만듦으로써 민족적 긍지를 살리려고 한 것은 충분히 이해되는 일이다.

창해 역사가 사용했다는 철퇴는 놀랍게도 사진과 기록으로 남아있다.

<황성신문> 19091027일자 기사에는 영국의 허버트 키치너 육군 원수가 한국의 궁내부 박물관에 들려서 창해역사의 철추를 잠시 빌려갔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철추에 대한 행방<동아일보> 1929117일에 등장한다. <동아일보>1909116일자 <대한민보>를 인용하면서 허버트 키치너 원수철추를 돌려주었다고 적었다. 현대에 사는 사람으로 이 철퇴가 진시황 암살에 사용된 철퇴라고 보지는 않겠지만 그만큼 한국인들이 창해역사에 대해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한편 강릉의 대창리에는 창해역사의 출생지가 이곳이라며 1991년에 설치한 유허비가 있다.

 

참고문헌 :

'창해역사설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형가', 위키백과

'창해역사', 나무위키

http://www.skyedaily.com/news/news_spot.html?ID=67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