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중국의 자존심

중국의 자존심(13) : 만리장성(2)

Que sais 2021. 1. 14.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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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마부대의 등장>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은 그동안 중국인의 부단한 침입으로 피해를 보았던 북방 민족에게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각 제후국이 북방에 신경 쓰지 못하는 동안 세력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그들은 과거의 힘없는 세력이 아니라 중국의 제후국을 공격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집단으로 성장했다. 기원전 660, 위나라저족의 침입으로 거의 멸망 단계까지 간 것도 이런 여파 때문이다.

중국과 접해 있던 저족(氐族)과 융족 즉 현재의 섬서성, 산서성, 하북성에 살던 이들은 계속해서 중국과 혈투를 벌였고, 이는 보다 북쪽에 있는 순수 유목민에게 더 큰 기회를 주었다. 그들은 저족이나 융족과 달리 중국에서 멀리 떨어진 초원지대에 머물며 세력을 키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국시대에 저족과 융족이 멸망하자 이것은 전통 초원민족기마 전사들과 소위 국경이 맞닥뜨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초원민족의 잠재력과 전력이 저족이나 융족과는 차원이 다를 만큼 뛰어났다는 점이다. 당시 몽골 초원의 생활방식은 더욱 유목적이고 호전적으로 변해 있었다.

중국인도 유목민을 지칭하는 ()라는 용어를 사용할 정도로 그들이 경계의 대상이라는 것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이들을 큰 틀에서 북적 또는 흉노로 부르기도 하는데 이들의 전력이 상상을 초월할 만큼 급상승하자 중국은 살아남기 위해 급히 머리를 굴렸다. 전국시대의 각 제후국은 두 가지 면에서 결정적 전술을 개발했다. 하나는 초원지대를 누비는 유목민과 전투를 할 수 있는 기술을 확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유목민이 중국 영토를 침입할 수 없도록 수비막을 만드는 것이다.

북방의 기마부대와 상대를 하려면 기마부대를 만드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기마민족이 아닌 전국시대 각국이 기마부대를 만드는 것이 간단한 일이 아니다. 더불어 전국시대 각국이 기마부대를 만들었다고 해서 북방의 정통 기마부대를 격파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전국시대의 각국은 북방 기마족에 비해 인해전술과 막대한 군수지원이 원활하므로 전투에 매우 유리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아무리 여건이 좋더라도 북방의 기마부대와 전투했을 때 승리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이에 북방 기마족의 공격 의지를 꺾는 전술이 부각됐는데 그것이 바로 기마부대를 막을 수 있는 성벽이다. 이들 성벽북방 기마족을 막는 것은 물론 다른 나라의 공격도 차단할 수 있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이것이 기원전 4세기경에 유목민과 국경을 접하고 있던 , , , 연나라가 모두 성벽을 쌓는 데 열중한 이유다.

 

<전국시대의 장성>

장성은 진시황제가 태어나기 전 즉 전국시대부터 존재했다.

학자들은 전국시대에 중국 최초로 건설된 장성초나라가 쌓은 장성으로 설명한다. 초나라는 남방의 광대한 영토를 바탕으로 중원국가들의 영토를 빼앗으면서 서서히 북진하였다. 이중 중요한 것은 과거에 중원이라 부르는 하남성 일대인데 하남성 일대는 국경으로 삼을 만한 자연경계가 없다. 더불어 초나라가 차지한 이 영토는 삼면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므로 초나라는 이 영토를 보호하기 위해 300km가 넘는 장성으로 영토 전체를 둘러싸는 형태의 장성을 건설하였다. 이것이 장성의 효시라 할 수 있다.

이후 장성 건설은 전국시대 강대국들의 트렌드가 되었다.

전국시대 초기, 재빠르게 성장한 위나라는 서쪽의 강국 진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서쪽에 장성을 쌓았다. 이 장성은 지금의 함곡관보다 훨씬 서쪽에 있으며, 지금의 서안시 동쪽에 위치한 화산 북쪽에 그 유적이 남아있다. 길이는 대략 60km 정도로, 진령산맥과 진북산맥을 잇는 형태로 건설하였다.

제나라도 남쪽에 장성을 건설했는데, 이는 당시 강국이었던 오와 월, 그리고 초나라를 견제하기 위해서다. 한나라 또한 위나라와 접경지대에 짧은 장성을 건설하였다.

한편, 조나라는 적극적으로 장성을 활용했는데, 그 영토 자체가 유목과 농경의 경계지를 대부분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목민족과 접촉은 때때로 큰 문제점을 일으키므로 조나라는 이들을 적극적으로 막아야했다. 그런데 조나라도 유목민족의 남하를 막을 만한 자연지형이 없었으므로 장성 건설은 필수였다.

북방민족과 접해있던 연나라도 기동성이 우수한 유목민족을 견제하기 위해 북쪽 국경에 장성을 쌓았다. 진시황제의 본향인 진나라 역시 전국시대 때부터 적극적으로 장성을 활용했다. 건국 초기 때부터 상대해온 오랑캐인 융적, 그리고 북방의 흉노 등의 유목민족을 상대하기 위해서였다.

전국시대에 이러한 장성 축조의 목적은 크게 두 가지 정도로 요약된다.

첫째는 자국 영토와 인구를 보호하는 것이다. 최초로 장성을 건설한 초나라가 장성을 건설한 이유를 다른 나라들이 도입한 것이다. 장성은 그 자체가 영토를 둘러싸 보호하기도 하지만, 적의 침입과 기동로를 제한하고 아군의 빠른 대응을 가능케 해준다. 한마디로 영토와 인구 보호에 효과적이었다.

둘째는 북방 유목민족과의 경계선 확립이다. 장성과 경보체제를 갖추면 아무래도 유목민족이 남하하기 어려워진다. 그전에는 주요 감시망을 피해서 목축 동물들을 데리고 내려와 눌러 살면 그만이었지만, 장성 축조 이후에는 대규모 군사행동을 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연경계가 부족한 지역에 장성을 건설함으로써 북방유목민들이 내려오는 한계를 설정하고 그를 통해서 수월하게 국경을 통제하자는 것이다. 특히 북방민족과 직접 영토가 접해있는 , , 연나라로서는 장성 건설이 필수였다.

그런데 진시황제가 통일한 후 장성 건설은 기존 각국이 쌓았던 장성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우선 진시황제의 만리장성 건설을 실제로 수행한 인물은 유능한 참모이자 장군인 몽염(夢恬)이다. 사마천은 󰡔사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진이 천하를 통일한 뒤 몽염에게 30만 대군을 내주어 북쪽의 융족과 적족을 몰아내게 했다. 몽염은 그들로부터 황하 이남을 빼았고 그곳의 골짜기와 언덕에 장성을 쌓았다. 그 성은 임조(臨洮) 감숙성 난주에서 시작해 요동 땅까지 이어지며 전체 길이는 1만 리도 넘는다.’

 

만리장성 건설이 어려웠던 이유는 해발 고도가 2,0003,000미터에 달하는 산지를 이리저리 돌면서 성을 건설해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기존에 장성이 건설되어 있던 구간은 보수공사로 끝냈지만, 그래도 몇 천 킬로미터를 이어야 하는 거리였다.

고고학자들이 진나라 성벽이라 단정하는 내몽골 소재의 성벽은 높이가 토대로부터 33.5미터이지만 실용적으로 흙과 돌을 섞어서 다졌으므로 엄청난 공력이 필요하다. 만리장성 건설이 당대에 얼마나 엄청난 역사이자 어려운 일이었는지는 중국의 4대 민간 전설 중 하나인 맹강녀 전설로도 알 수 있다.

 

진시황 때, 맹강녀의 남편 범희양축성(築城) 노역에 징용되었다. 한 전설에는 맹강녀의 남편이 결혼 초에 진나라의 징병관에게 끌려갔다고 한다. 오랫동안 남편의 소식을 듣지 못하던 어느 날, 맹강녀의 꿈에 남편이 만리장성에서 일하다 죽는 모습이 나타났다. 급히 겨울옷을 만든 맹강녀가 몇 달에 걸쳐 만리장성 현장에 도착했지만, 이미 사망한 남편의 시신마저 찾을 길이 없었다. 축성 노역에 동원된 사람이 죽으면 성채 속에 묻는 것이 당시의 관례였기 때문이다. 맹강녀가 성벽 앞에 옷을 놓고 며칠을 엎드려 대성통곡하자 성채가 무너지면서 남편의 시신이 나왔다. 맹강녀는 시신을 거둔 뒤 바다에 뛰어들어 자살했다.’

 

얼마나 크게 울었으면 장성이 무너졌을까 싶기도 하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당시 만리장성 공사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공사현장을 뒤흔들 만큼 울음이 터져 나왔을까 하고 생각해볼 수도 있다.

어쨌든 산해관 인근에는 맹강녀묘, 맹강사당(孟姜祠堂), 맹강녀원(孟姜女苑)이 있으며 바다 쪽으로 불쑥 튀어나온 바위 네 개가 맹강녀의 묘라고도 한다. 맹강녀원 내에는 남편을 위해 천리 길을 울며 장성에 도착했다는 전설에 따라 겨울옷 만들기’, ‘장정들의 장성 축조’, ‘망부석20개 장면이 그려진 그림이 있다.

만리장성 쌓기가 만만치 않은 것은 우선 만리장성을 쌓는 곳이 험지인데다 기후가 상당히 나쁜 지역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폭우, 폭염, 우박 등이 쏟아지는 곳에서 작업해야 하는데 비위생적인 숙소에서 먹고 자야하므로 상당수가 이를 견디지 못했다.

더구나 식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만리장성을 쌓는 곳 자체가 토질이 좋지 못하므로 현지에서 식량을 생산하여 공급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따라서 식량을 먼 곳에서 운반해야 했는데 운반도중 산적에게 빼앗기기 다반사였고 운송 도중에 먹어야 했다. 한 자료에 의하면 산동성에서 182섬의 곡식을 보냈는데 막상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1섬만 전달되었다고 한다.

굶주림 때문에 공사 현장의 사망률은 매우 높았는데 맹강녀의 남편이 만리장성을 쌓다가 사망하여 장성 안에 매몰된 것은 당시 공사 여건으로 볼 때 그다지 냉혹한 것은 아니었다. 장성을 쌓는 곳 자체가 주로 험난한 곳을 선택했으므로 일일이 장사를 지내주는 것이 간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록에 의하면 공사 중에 사망한 사람의 경우 대부분 성의 기초공사를 위해 파놓은 구덩이 속에 던져지거나 거대한 공사로 화가 난 북쪽의 신들을 달랜다는 명목으로 성벽 속에 파묻었다고 한다.

장성 축조에 희생된 사람들 중에는 죄수들뿐 아니라 군인, 강제 노역에 동원된 일반 백성들도 상당수 였다. 이들 상당수가 희생되었으므로 일각에서 만리장성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긴 공동묘지라는 말이 결코 허언이 아님은 물론이다.

만리장성을 건설하기 위해 인명이 무수히 희생되었다는 것은 다음 시로도 알 수 있다.

 

아들이 있어도 키우지 마라.

딸이 있으면 말린 고기는 그 애에게 먹이게.

알겠는가, 만리장성이 해골 위에 세워졌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