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중국의 자존심

중국의 자존심(12) : 만리장성(1)

Que sais 2021. 1. 14. 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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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유산이자 200777, ‘신세계 7대 불가사의중 하나로 선정된 만리장성은 총길이가 5,0006,000킬로미터로 알려져 있다. 근래 중국이 만리장성을 전국시대를 포함하여 중국에서 건설된 장성을 모두 합하여 약 12,000킬로미터가 된다고 설명하기도 하지만 이들 안에는 고구려가 건설한 것까지 포함되어 있어 논란의 여지가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정통적인 만리장성산동의 산해관(山海關)에서 출발해 서쪽으로 북경과 대동을 거친 다음 남쪽으로 황하를 넘는 이 장성은 협서성과 오르도스의 경계를 따라 남서를 향해 달리다 다시 황하를 넘는다. 이어 그곳으로부터 실크로드의 북서쪽으로 연결되어 하서주랑(河西走廊)의 자위관(嘉浴關)에서 종료된다.

그러므로 산해관이 첫 번째 성문이고 자위관이 북서쪽 끝의 마지막 성문이다. 중국인들이 만리장성이라고 부르는 거대한 방어용 성벽을 유럽인은 중국의 성벽(Wall of China)혹은 대성벽(Great Wall)이라고 부른다.

1935, 장제스(蔣介石)에게 밀린 마오쩌둥은 공산당원들을 규합하기 위해 만리장성을 이용했다.

 

장성에 가보지 않은 사람은 대장부가 아니다(不到長城非好漢).’

 

위 글은 팔달령 입구에 비석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이는 만리장성에 대장부로서 지녀야 할 역사의식과 호연지기, 고난 극복의 지혜 그리고 도전정신이 녹아 있다는 의미다. 또한 1972, 미국의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 대통령은 중국과 미국 간 외교 돌파구를 열기 위해 만리장성을 방문해 이렇게 선언했다.

 

장성은 위대한 성벽이며 위대한 민족이라야 이런 것을 건설할 수 있다.’

 

하지만 만리장성은 진시황제가 그동안 폭군 중의 폭군으로 지목된 근본 요인 중 하나다. 실제로 고대 중국에서 진나라 멸망의 원인을 거론할 때 가장 먼저 꼽는 것이 그의 무모한 만리장성 건설이다.

학자들은 역사적 사실만 놓고 보면 만리장성 건설진나라의 멸망을 초래했다는 말은 틀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2세 황제인 호해가 즉위한 다음, 실권을 장악한 조고의 전횡으로 백성들은 심한 고통에 시달렸는데 그 큰 원인 중 하나가 만리장성 건설이다.

한편 기원전 2097, 진승과 오광은 빈민 900명과 함께 징집을 당해 만리장성을 건설하는 어양(漁陽) 지금의 북경 밀운현(密雲縣) 서남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진승은 양성(陽城) 현재의 하남성 상수(商水)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남의 집 머슴살이를 했고, 오광은 양하(陽夏) 지금의 하남성 태강(太康))의 가난한 농민 출신이었다. 진승은 비록 머슴살이를 했지만 상당한 지략과 용기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번은 그가 친구와 함께 논을 갈다가 언젠가 부귀하게 되면 자네를 절대 잊지 않겠네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친구는 코웃음을 치며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는 주제에 어떻게 부귀해질 수 있단 말인가?”’고 대답했다. 그러자 진승은 길게 탄식하며 그만두지. 참새가 어찌 봉황의 뜻을 알겠는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어쨌든 진승은 머슴이면서도 보통사람과 다소 다른 대우를 받은 듯, 오광과 함께 빈민들의 대장이 되어 집결지인 어양으로 향했다. 그런데 어양으로 가는 도중 대택향(大澤鄕) 현재의 안휘성 숙현(宿縣) 동남 부근에서 뜻밖에도 폭우를 만났다. 문제는 며칠을 계속해서 내린 폭우 때문에 예정된 기간 내에 목적지인 어양에 도착하는 것이 불가능했다는 점이다.

진나라의 법에 따르면 징집된 사람이 예정된 기간 내에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하면 사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었다고 알려진다. 평소 진나라의 법 집행을 볼 때 다소 과장된 것으로 보이지만, 어쨌든 졸지에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게 된 진승과 오광은 함께 온 사람들에게 외쳤다.

 

어차피 우리는 죽을 목숨들이니 죽을 때 죽더라도 이름이나 한번 떨쳐봅시다. 왕후장상의 씨가 어디 따로 있답디까!’

 

진승은 죽음을 눈앞에 둔 절박한 상황에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농민봉기를 시도한 것이다. 그들의 봉기는 민중의 호응을 얻어 정부군을 격파하면서 급속도로 세력이 늘어났다. 하지만 그들은 당대 기득권자들의 지지를 얻어내지 못했고 결국 토벌해야 할 반란세력으로 몰리고 말았다.

결론을 말하자면 유방과 항우가 그들을 토벌하겠다는 명분으로 세력을 얻어 중국의 패권을 놓고 혈투를 벌였고, 여기서 유방이 승리를 거둬 한고조가 되었다.

이 점만 놓고 보면 진나라가 멸망한 단초가 무엇이든 만리장성이 큰 몫을 한 것만은 사실이다.

만리장성 건설이 민중을 도탄에 빠뜨렸고 그 탓에 반란이 일어나 그 여파로 진나라가 멸망했다는 설명이 되기 때문이다. 그동안 만리장성이 진시황제의 불명예의 상징으로 부각된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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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의 지지를 받은 장성 건설>

대부분 만리장성이 진시황제로부터 건설되었다고 생각하지만 그가 최초의 발명자는 아니다.

중국 역사에서 만리장성의 기원은 매우 오래전으로 올라간다. 중국이 농경사회를 거쳐 문명사회로 들어가는 동안 북쪽에는 지형적으로 중국과 다른 , (), 흉노, 몽골, 동호, 만주족 등 연대에 따라 수많은 이름으로 불린 소위 야만족이 살고 있었다.

중국에서 국가라는 형태가 나타나는 기원전 3000년 전인데 당대의 거주 상황은 현재와 매우 다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당대에 중국인과 유목민으로 완전하게 분리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실제로 중국은 최초의 국가현 요령성 우하량홍산 지역에서 기원전 3000년경에 세워졌다고 추정하며 이를 신비의 왕국 또는 신비의 여왕국이라 부른다. 이들 지역은 과거부터 중국인과 다소 다른 동이족고조선의 근거지로 비정하는 곳인데 이 당시 중국인, 한국인이 분류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단지 이들 지역에서도 단군 고조선 시대로 올라가는 4000년 이전의 하가점하층 문화의 인골동이족의 특징을 갖고 있는 반면 3500년 전인 하가점상층 문화에서는 현 중국인들의 인골이 발견된다. 이는 기후변화로 하가점하층문화의 동이족이 중원으로 내려와 하나라를 멸망시키고 ()나라를 건설했고 동이족이 그동안 근거했던 홍산문화지역에 중국인 특성을 가진 사람들이 빈터가 된 하가점상층문화를 이루었다고 추정한다. 물론 이곳에서 동이족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동이와 화하가 함께 살았다는 뜻으로 이는 현대인들이 지적하는 중국인, 한국인이 분류되지 않고 함께 살았음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하가점하층문화4000여 년 전의 고조선 초창기에는 돼지 등이 발견되는데 이는 농경문화의 중요한 징표다. 그런데 3500년경의 하가점상층문화에서는 돼지가 아니라 , 염소 등이 발견된다. 이는 기후변화로 농경이 불가능하여 양, 염소를 키우는 유목지역으로 변경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과거 즉 고조선 초기 농경문화가 유목문화로 변화했으며 이들이 북방기마민족의 시원이 되는데 그 큰 주축이 동이족임은 물론이다.

장성 건설에 한정한다면 매우 오래전부터 중국 중원장성이 건설되었다고 생각한다.

기원전 200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상나라가 있던 중원 즉 현재 하남성 정주(鄭洲) 북쪽 약 7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 성벽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기원전 2000년 전이라 하면 진시황제보다 무려 2,000년이나 앞선 시기인데 이때 북방과 중원이라는 개념이 별로 없으므로 자체적으로 필요에 의해 성벽이 건설되었다고 추정한다.

그런데 기원전 15001600년경부터 소위 지금의 유목민이 살고 있던 지역에 심각한 기후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광대한 몽골 평원이 건조해지면서 초원으로 변한 것이다. 하가점상층문화와 하가점하층문화가 절대적으로 차별화되는 이유로 이러한 변화는 초기 정착농경에서 유목목축으로 변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을 뜻한다. 문제는 유목목축 생활의 경우, 농경생활로 엄격하게 통제된 소위 남쪽 중국과 다른 생활방식을 필요로 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초원이 건조해지자 농경생활을 포기하고 가축사육 특히 말과 양을 키우고 수렵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가축이 먹고사는 풀밭이 계절에 따라 변하므로 이들은 풀밭을 찾아 떠돌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광활한 지역에서 마음에 드는 목초지를 찾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당연히 넓은 초지에 풀어놓은 가축을 통제하기 위해 숙련된 기마술 즉 빠른 기동성이 필요해졌다.

그런데 이들의 단점은 생활의 모든 부분을 가축에게만 의존할 수 없다는 점이다. 가축을 통해 식량과 의복 등 일상용품은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지만, 곡물을 비롯해 공구를 만들 수 있는 금속 재료남부지역으로부터 조달해야 했다.

이 말은 기원전 1000년경이 되자 농경민과 유목민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이 간단치 않다는 것을 뜻한다. 당대에 가장 큰 갈등이 일어났던 지역은 중국 평원과 본격적인 초원 사이에 있는 오르도스 지방이다. 오르도스는 목축과 농경이 가능한 곳으로 두 사회 모두에게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이에 따라 이후 이곳을 장악하기 위한 수많은 분쟁이 일어나게 된다.

중국인은 북쪽의 이웃들을 도저히 통제할 수 없을 만큼 폭력적이고 야만스러운 침입자로 규정했다.

그들은 북방 민족이 음악도 알아듣지 못하고 색맹이며 배신을 잘하는 종족이라고 비웃으며 점점 상종하지 않으려 했다. 유목민은 농경민보다 열등한 존재로 교역이나 외교의 상대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문제는 멸시하는 것까지는 그렇다고 해도 교역을 봉쇄하면 유목민이 필요로 하는 물자를 구할 수 없다는 점이다. 당연히 그들은 필요한 물자를 구하기 위해 약탈이나 습격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현존하는 기록을 보면 중국인은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고 유목민은 탐욕스럽고 공격적인 무리로 그려져 있다. 다음의 몇 가지 기록이 유목민에 대한 중국인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보여준다.

 

날짐승과 길짐승(禽獸)

관용을 베풀 필요가 없는 늑대

탐욕스럽게 이윤만 얻으려 하고 외양은 인간이지만 내면은 짐승

인간이라기보다 야생 짐승처럼 산다

 

하지만 이들 기록은 중국이 일방적으로 기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유목민은 기본적으로 문자를 사용하지 않아 기록을 남길 수 없었고, 그 탓에 당시의 기록은 철저히 중국인의 관점에서 다뤄졌다는 설명이다.

근래의 고고학 연구는 중국인의 이런 일방적인 사고방식이 얼마나 과장된 것인지 잘 보여준다.

학자들은 기원전 1000년경까지 만리장성 주변에 살던 주민들이 남긴 고고학적 유물 가운데 전쟁에 관계된 것이 별로 없다는 다소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특히 중앙아시아에서 발굴한 무덤에서는 목축의 흔적만 발견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발견되는 유물들이 상당히 세련된 채색 항아리, 제례용 그릇, 옥 제품 등이라는 점이다. 무덤에서 무기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은 이들이 타인을 공격하는 일이 없었음을 의미한다.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전제국가 ()나라()이라는 변방의 주민들과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는데, 그 이유는 인신 희생에 쓸 제물노예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이는 상나라가 오히려 유목민들을 괴롭혔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학자들은 중국 변방의 주민들이 중국을 공격한 경우보다 중국이 공격한 경우가 많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승자가 있으면 패자도 있는 법이다. 특히 고대에 패자의 운명은 승자와 극명하게 갈렸고, 패자가 절치부심해 과거의 실패를 만회하려 애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당시에는 상황에 따라 타협하거나 협상할 여지가 전혀 없었다.

전쟁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었기 때문에 현명한 군주는 적군의 기습에 대비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바로 이런 목적으로 생겨난 것이 자기 국가를 지키는 장성이란 개념이다. 한 국가가 장성이라는 아이디어를 도입하자 인근 국가들도 장성을 쌓기 시작했다. 춘추전국시대의 장성은 북방 민족의 침입을 막으려는 이유도 있었지만, 이웃나라와의 패권 다툼이나 생존을 위해 쌓았다. 이 때문에 장성 건설은 백성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