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맨 진시황제>
민중의 고통을 딛고 만리장성이 놀랍게도 빨리 세워지자 여러 가지 전설이 생겨났는데,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황제의 능력이다. 한 예로 진시황에게 빨간 갈기에 밤에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꼬리와 빛을 발하는 눈을 가진 흑마가 있었다. 그 말은 하루에 1,200리(480킬로미터)를 달릴 수 있으며 진시황이 그 말을 타고 중국 북방 국경선을 1.6킬로미터를 달릴 때 겨우 9〜10번밖에 땅에 발이 닿지 않았다고 한다. 여기에서 리(里)는 과거의 길이 단위로 1리는 500미터다.
놀라운 것은 말이 밟고 달려간 자리마다 망루들이 차례로 솟아올랐으므로 단 하루 사이에 광대한 성벽이 세워졌다고 한다. 진시황이 사용한 놀라운 도구 이야기도 있다. 그가 사용한 삽은 세 번이면 1.6킬로미터의 흙무더기를 떠낼 수 있으며 마술의 채찍은 한번만 내리치면 산을 하나 옮겨 놓을 수 있었다고 한다.
만리장성이 구불구불한 것도 전설이 있다. 진시황의 나는 말의 고리에 무거운 돌을 달아 북방 국경선을 마음대로 달리게 한 후 생긴 자국을 따라 성벽을 건설했다는 것이다. 가장 많이 굽어진 곳의 성벽은 무더운 오후 그곳에 기대어 잔 용의 무게 때문에 휘었다고 한다. 심지어는 어마어마하게 큰 용이 그 지역을 날아가다가 지쳐 떨어져 그것이 만리장성이 되었다는 전설도 있다.
현재 우리들이 볼 수 있는 장성은 대부분 명나라 시기에 건축한 것이지만 만약 역대 각 시기에 축조한 장성을 모두 계산한다면 10여만 리나 된다. 장성을 건축하기에 소요된 돌, 벽돌을 계산하기위해 높이 5미터, 두께 1미터가 되는 벽을 쌓았다고 가정한다면 지구를 한 바퀴 돌고도 남으며 높이 5미터, 두께 35센티미터가 되는 길을 닦는다면 지구를 서너 바퀴를 돌 수 있다고 하니 얼마나 거대한 역사인지를 알 수 있다.
당시에 성벽을 쌓을 때, 가장 먼저 고려한 것은 지형으로 절벽, 골짜기, 좁은 개울 등 온갖 자연적 특징을 방어에 유리하도록 활용했다. 천혜의 요새처럼 방어적 이점이 있는 산악지역은 군데군데 초소를 세우거나 성벽을 쌓아 고갯길을 막았다.
이때 중국에서 천재적인 전략가가 태어났는데, 그가 바로 진시황제이다. 진나라 자체가 북방 기마민족이라고 볼 수도 있는 감숙성 지역에서 발원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몽골 초원이 구사하는 기마술을 재빨리 전투에 응용할 수 있었다. 다른 국가가 기마부대의 필요성을 인식하면서도 야만적이라는 생각에 기마술 도입에 소극적일 때, 시황제는 이들의 장점을 도입했고 결국 기원전 221년에 중국을 통일했다.
사실 만리장성이라는 말은 근래에 생긴 것으로 애초에는 요새를 뜻하는 완(垸), 변경을 의미하는 색(塞), 장벽을 뜻하는 장(墻), 변진(邊鎭), 국경의 부대 혹은 국경의 성을 의미하는 변경(邊境) 등으로 불렸다. 특히 명나라 초반까지만 해도 장성이란 말이 등장하지 않는데, 이는 몇 천 킬로미터나 되는 만리장성의 성벽이 하나로 연결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리장성 하면 진시황제를 떠올리는 이유는 진시황제 때 비로소 만리장성이라는 개념이 태어났기 때문이다. 진나라 이전에는 각 제후국이 자체 방어를 위해 나름대로의 전략과 전술을 토대로 장성을 건축했다. 이는 각 제후국의 적군이 서로 달라 굳이 통일적으로 장성을 쌓을 필요가 없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는 이전에 각 제후국이 건설한 성벽을 보강하거나 연결하는 것이 가능했다. 이로써 진정한 의미의 만리장성 개념이 태어난 것이다.
만리장성에서 성(城)은 원래 ‘흙(土)으로 이룬다(成)’는 글자의 뜻처럼 흙벽을 의미한다. 유럽이나 일본에서 생각하는 성(城)의 개념과 다른 것이다. 한마디로 장성은 ‘길게 흙으로 이뤄진 것’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흙으로 만든 성벽은 비가 오면 흘러내리기 십상이고 겨울의 혹독한 추위에 갈라지기 일쑤다. 따라서 주기적으로 보수를 하지 않으면 몇 년 지나지 않아 붕괴되기 쉽다. 실제로 현재 북중국과 몽골의 여러 장소에 성벽을 건설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대부분은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
진시황제가 통일을 하자마자 왜 만리장성을 건설했는가에 대한 질문에 가장 그럴 듯하면서도 또한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설은 기원전 215년에 등장한 ‘진을 멸망시키는 것은 망진자호(亡秦者胡)’라는 점술 때문이라는 것이다.
‘호’가 북방 유목민족을 의미한다고 생각한 황제가 즉시 몽염의 부대로 오르도스에서 이들을 몰아내고 성벽을 쌓았다는 얘기다. 학자들은 진나라가 멸망한 근본 원인을 진시황의 아들 호해의 무능과 환관 조고의 권력 남용으로 보고 있는데, 흥미롭게도 호해 역시 ‘호(胡)’를 사용한다.
<만리장성 건설의 미스터리>
만리장성은 중국이 세계에 자랑하는 위대한 시설로 그동안 설명된 만리장성 건설이유는 간단하다. 진시황제가 북방의 위협을 제거해야 중국 즉 중원이 평안하므로 그가 통일하기 전에 건설된 만리장성을 연결하여 명실상부한 중국 북방과 격리조치했다는 것이다. 즉 거대한 만리장성은 오로지 북방 이민족이 중국을 침략하는 불상사를 원천적으로 막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시황제의 만리장선은 전국시대 각 나라에서 각 국가의 정황에 따라 장성을 건설한 것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일부 학자들이 만리장성이 북방의 이민족이 침공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진시황에 의해 건설됐다는 말에 이의를 제기했다. 즉 그렇게 간단한 목적으로 어마어마한 만리장성 즉 ‘그레이트 방화벽’을 건설한다는 것에 허점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만리장성을 건설하는데 대차대조표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경제성이 너무 없다는 뜻이다. 이 질문에 이스라엘 히브리 대학의 고고학자 기데오 세라 라비(Gideon S. Lavi) 박사가 도전했다.
라비 박사의 결론은 다소 엉뚱하다. 그의 결론은 만리장성이 사람들의 감시를 위해 건조되었다는 것이다. 라비 박사는 만리장성의 일부로 737킬로미터에 달하는 ‘북방선(Northern Line)’에 초점을 맞추었다.
라비 박사는 2년 동안, 드론의 공중 촬영과 위성 사진을 이용하여 북방선을 조사한 결과, 북방선이 군사적 효용도가 매우 낮다는 것을 발견했다.
‘북방선은 대체로 전망이 나쁜 골짜기의 저지대에 건축되어 있고, 벽의 높이도 낮고, 길 근처에 있다.’
이 말은 군사적으로 절대 불리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구나 북방선에는 탑과 요새도 건설되지 않았다. 라비 박사는 이런 내용을 볼 때 북방선은 적의 침공을 막기 위한 것이 아니라 중국 국내 사정과는 무관하게 이동하는 유목민과 가축의 이동을 제한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했다. 한마디로 유목민에 과세하고 무역을 단속하기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뜻이다.
라비 박사는 중국 북방은 지역적 위치상 때때로 큰 한파가 몰리므로 가축을 추위와 아사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남하했는데 장성에서 이들 유목민의 입국을 관리하거나 또는 과세하기 위해 장성을 건설했다는 것이다.
특히 북방선 인근에 사각형이나 원형의 구조물이 있는데 사각형은 북방선에 근무하던 사람들의 거주지이고 원형은 북방선에 근무하던 사람들이 유목민으로부터 몰수하거나 세금으로 징수된 가축을 수용하는 동물사옥이라고 추정했다.
이런 설명이 상당한 파문을 가져온 것은 사실 만리장성에 대해 그동안 주장된 내용에 여러 가지 허점이 있기 때문이다. 만리장성이 건설 목적이 방어를 목적으로 했다면 만리장성을 지키기 위한 기본 병력이 상주해야한다. 로마가 영국에 건설한 아드리안 성벽 즉 현재의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국경에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쌓았는데 길이는 약 117킬로미터다. 이때 대체로 약 1킬로미터 당 1개 중대 즉 100명 정도의 상주인원을 배치했다.
그렇다면 만리장성의 길이를 5,000킬로미터로 계상하여 1킬로미터마다 적어도 50명을 배치한다고 하면 25만 명의 인원이 필요하다. 그런데 초창기 만리장성을 보면 탑이나 봉화대 등이 거의 없고 그런 인원을 상주시킨 적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방민족의 침투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놀부심보나 다름없다고 <나무위키>는 적었다. 그동안의 중국을 비롯하여 각지의 전투를 보면 해자, 창검벽, 외곽성벽, 이중성벽 등등 온갖 방호시설로 철통같이 준비해도 함락되는 경우가 부지기수이다.
그런데 성벽 한 겹 둘러놓고 군대의 침공을 막아내겠다는 것은 상식이 아니라는 뜻이다. 만리장성의 역할이 북방 기마민족의 남침에 대한 방어선이 아니라 동서 교역을 하는 상단을 보호하는 가도와 역참으로서의 역할이 더 중요했었다는 주장인데, 이는 이스라엘의 라비 박사의 주장과 견해를 같이한다.
그러나 중요한 길목을 통제하고 대규모 적의 침공을 최소 지연시키거나 최대 방어하는 용도 자체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만리장성의 역할은 철옹성 같은 방어요새의 구축이 아니라 경계의 구축이라고 설명한다.
사실 중국의 역사에서 북방민족의 침입시 만리장성에서 처절한 전투를 한 적은 없다. 기마로 무장한 북방의 공격을 만리장성에서 막는다는 것이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이 말은 일부 만리장성 구간의 방어력이 상당하다면 북방 기마족은 그런 곳을 굳이 넘으려하지 않고 방어에 취약적인 곳을 통해 중원으로 들어왔다.
이 문제에 관한 한 만리장성을 쌓은 중국측도 바보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만약 장성이 없었다면 중원에서 기마족의 침공 및 약탈에 더 시달렸을 것임이 자명하다는데는 공감한다. 즉 만리장성은 유목과 농경을 나누는 경계선이다. 화북과 몽골고원에는 지형을 이용할 수 있는 방어선이 부족하기 때문에, 인위적인 경계선을 만들어놓고 그것을 기준삼아서 유목 민족과 농경 민족을 구분해두었다는 것이다.
사실 역사상 만리장성을 돌파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과가 용이한 길목은 한정되어 있으므로 나름대로 군사적인 역할을 한 것도 사실이다. 즉 우회로를 찾는다는 자체가 큰 방어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명-청의 전투에서 청나라는 만리장성을 돌파하는데 문제가 없지만 만리장성을 돌파한 다음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급선이 길어지면 치명상을 입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청나라는 산해관을 통과한 다음 본격적으로 공격에 나섰다.
여하튼 큰 틀에서 북방에 사는 유목민들의 침략에 대비한 방어를 철저하기 위한 것으로 포장할 수는 있지만 그렇게도 어렵게 만리장성을 건설한 것은 세금을 받는 등 경제적인 효과가 충분히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이는 만리장성을 한 가지 단순한 이유로만 설명하는 것이 간단치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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