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중국의 자존심

중국의 자존심(15) : 만리장성(4)

Que sais 2021. 1. 15. 0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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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제의 만리장성>

학계에서는 진시황제가 만리장성을 쌓은 목적에 대해 두 가지 가설을 제시한다.

첫째, 진나라가 북방 유목민의 공격으로부터 중국인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공격하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았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만리장성은 수비용이 아니라 공격용이라는 것으로 그동안 알려진 내용과는 전혀 다르다. 물론 여기에는 상당한 근거가 있다.

근래에 만리장성을 정밀 조사한 학자들은 매우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북방에 건설된 성벽들이 농경지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고 초원과 상당히 가까이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연나라의 성벽은 오늘날의 몽골 안쪽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이는 성벽이 외국의 영토를 점령하기 위한 시설임을 한눈에 보여준다. 성벽을 쌓으면 유목민을 그들의 영토에서 몰아내거나 정착시켜 통제하고 그들의 전략적 이점을 손쉽게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혈투를 벌이던 각 제후국은 전투에서 기동력 확보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했고, 이로써 기마부대를 확보하는 것이 승리의 관건임을 간파했다. 그런데 기마부대를 확보하려면 말을 사육해야 했는데, 말은 아무 곳에서나 간단하게 사육할 수 있는 동물이 아니다. 이는 곧 말을 확보하려면 말을 사육할 줄 아는 유목민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유목민이 호락호락 중국인의 입맛에 맞게 말과 기사를 공급할 리는 없었다. 따라서 중국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그동안 상대조차 하지 않던 유목민을 우군으로 확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예 그들의 거주지역을 점령해 직접 그들을 통제하는 것이다. 물론 중국인이 쉽게 생각한 것은 후자.

그러나 세상만사가 맘먹은 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초원지대 가까이에 성벽을 쌓아 일부 유목민을 흡수하긴 했지만, 관리비가 엄청나게 많이 들었다. 더욱이 그들이 흡수하지 못한 유목민이 근거지 가까이에 있어 유목민의 공격을 받기가 더욱 쉬웠다.

무엇보다 아이러니한 것은 전국시대의 성벽이 그동안 소규모 부족으로 나뉘어 있던 초원지대 부족을 결집시키도록 유도했다는 점이다. 이로써 중국은 이후 수백 년간 흉노 등과 지루한 혈투를 벌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쨌든 진시황은 그동안 각 제후국이 관리하던 장성을 하나로 통합시켰다.

나아가 기마민족의 약점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그는 자체적으로 말과 기수를 육성해 북방 기마민족과 대등한 전력을 확보하겠다는 생각을 실천에 옮겼다. 일단 장성이 기마민족의 기습 공격을 어느 정도 막아주면 그가 육성한 기마부대로 얼마든지 그들을 격퇴할 수 있다는 전략이었다.

바로 이것이 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하자마자 만리장성을 쌓게 된 기본 요인이라 할 수 있다. 보다 호전적인 북방 기마민족의 공격을 막는 동시에 통일된 중국 내에서 일어날지도 모를 각종 반란을 보다 신속하게 응징하기 위해 장성 내에 기마부대를 육성할 근거지를 확보했던 셈이다. 결국 널리 알려진 것처럼 수비형 만리장성이라는 말은 중국인의 호전성을 북방 기마민족에게 떠넘기기 위한 세기의 홍보 전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둘째, 통일 후 전쟁에 동원되었던 많은 병사와 불평분자들의 안정된 생활을 보장해 주기 위해 대형공사를 벌였다. 장성은 쌓는 것 자체가 경비가 막대하게 드는 사업이다. 실제로 장성의 유적을 보면 버드나무와 갈대를 단단히 묶은 것과 점토가 교대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어떤 지점에서는 3킬로미터 높이의 산꼭대기를 타넘어 장성을 세우기도 했다. 이 장성에 오르려면 줄로 끌어올리거나 노새의 꼬리를 이용해야 한다. 기중기가 없던 그 시대에 2톤이나 되는 화강암 석재를 어떻게 그 높이까지 운반할 수 있었는지는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쨌든 통일 전쟁에 동원된 방대한 군대를 유지하는 것보다 대규모 성벽을 건설군사들에게 일거리를 제공하고 전쟁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인 일이었다. 무엇보다 진나라의 체제와 충돌하는 죄수들을 흡수해 이들을 산업역군으로 만들 수도 있었다. 한마디로 만리장성은 실업자 구제와 강제노동수용소 개념을 접목시켜 건설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장성을 건설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새로 창설된 국가라면 여러 가지 의미에서 시도해 볼 만한 대형사업이다. 한 예로 기원전 213형사재판을 담당하면서 공정을 기하지 못한 법관들을 만리장성 쌓는 곳으로 유배 보내 노역시켰다라는 글이 있다.

여기에서 김기협 박사만리장성 건설의 특이성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적었다.

중국인은 화하(華夏)를 천하의 중심으로 보며 사방의 오랑캐를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으로 불렀다. 이들 모두 중국에 위협세력임에도 불구하고 만리장성은 큰 틀에서 북적에 집중된다. 이는 서융도 춘추시대 이전에 강력한 세력이었지만 북적(北狄)의 한 종속변수처럼 되어 독자적으로 중원에 위협을 가할 수 없었다.

그런데 중국의 남쪽으로 장성같은 것이 필요치 않은 것은 소위 화하 남쪽으로 농업 기반의 중화문명이 계속 확장되어 나갔기 때문에 '문명의 충돌'이 크게 일어날 리가 없었다.

반면 북쪽과 서쪽 초원지대는 화하의 농업진출이 불가능했다.

여기에서 쥴리아 로벨 박사가 장성에 방어적 기능만이 아니라 공격적 기능도 있다는 것인데 로벨 박사중화의 농업지역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장성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북적 즉 흉노 지역 인근만리장성을 쌓는 것은 이해되는데 장성의 서쪽 끝은 가욕관으로 알려지는데 이곳은 유목지역 안으로 깊숙이 뻗어 들어가 있는 지역이다. 이것은 중국으로 보아 서역(西域)과의 교역이 매우 중요했기 때문이다. 2000년 전에 서역과의 교류가 있었다는 말에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중국과 서역과의 교역이 매우 활발했다는 것은 여러 가지 증거가 있다. 로마에서 중국의 비단을 사용했다는 것이 그 증거다. 한마디로 이 교역로를 보호하기 위해 그 먼거리 장성을 쌓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더욱 눈에 띄는 로벨 박사의 지적은 장성의 기능으로 오랑캐가 못 들어오게 막는 기능만이 아니라 중국인이 못 나가게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백성은 국가의 중요한 자원이므로 백성이 마음대로 떠나서는 국가에 손실이 된다. 농업기술의 발달에 따라 전에 유목지역이던 지역도 농지 개간이 가능해지면서 농경지역이 북쪽으로 확장되는데, 그 확장을 국가가 통제하지 못하면 인적 자원이 유출될 뿐 아니라 국가 외부 인접지역에 큰 경제권이 자라나 국가체제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유방의 굴욕>

진시황제가 역사상 가장 큰 역사(役事)를 진행하며 국내를 안정시키자 진나라를 넘볼 외부세력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황제가 천하를 통일한 지 10여 년 만에 갑자기 사망하면서 호혜가 2세황제가 되었지만 곧바로 멸망한다. 이후 혼란이 거듭되다가 기원전 202년 유방이 재위 5년에 황제로 칭하며 통일 중국인 한나라를 세웠다.

한나라가 중국을 통일했을 무렵, 북방 기마민족 중 중국을 견제하고 대항할 수 있었던 유일한 강대국은 당대에 중국의 3배나 되는 거대한 제국을 통치하고 있는 흉노 소위 북적이었다. 그런데 유방 역시 시황제처럼 신생국가를 안정시키려면 최소한 북방 기마민족이 한나라를 넘보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나라와 한나라는 상황이 다소 달랐다.

진시황제는 만리장성만으로는 강력한 흉노에 대항하는 데 미흡하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진시황제는 자체적으로 강력한 기마군단을 육성흉노를 견제했다. 유방 역시 만약 흉노가 공격을 해오면 만리장성이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설사 만리장성이 강력하게 구축되었을지라도 전략적인 면에서 효과적일 수 없다는 것역사가 증명한다. 칭기즈칸이 중국을 정복할 때 만리장성은 그다지 장애물 구실을 하지 못했다. 어느 왕조보다 장성을 쌓는 데 공을 들인 명나라 역시 동북지방의 만주족을 막는 데 역부족이었다. 조금만 우회하면 취약 지점과 허점이 고스란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유방도 이를 잘 알았고 만리장성은 시간을 조금 벌어주는 정도의 기능밖에 기대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말의 진격을 다소 지연시킬 뿐이었던 것이다. 결국 유방강수를 두기로 했다. 우선 노관을 위치적으로 흉노와 접한 산동지역의 ()으로 봉해 흉노와 대치하게 했다. 그런데 노관은 기원전 201흉노에게 투항하고 말았다.

유방은 흉노의 공격을 사전에 봉쇄하기 위해 보다 대담한 작전을 구사했다. 30만 대군을 동원흉노의 시조로 알려진 묵특선우(冒頓單于, 기원전 209174)를 공격했다. 선우탱리고도선우(撑犂孤塗單于)의 약어로 탱리(撑犂)는 터키-몽골어에서 하늘을 뜻하는 탱그리(Tengri)의 음역이며 고도(孤塗)아들이란 뜻으로 흉노의 왕을 의미한다.

하지만 기원전 200년의 공격은 엄청난 재앙으로 끝났다. 30퍼센트가 넘는 유방의 군사들이 동상(凍傷)에 걸려 전력에서 이탈하자, 묵특은 자신의 군대가 허약한 것처럼 위장해 유방의 공격을 유도했다. 유방이 이 미끼를 덥석 물자 묵특은 기습 공격을 감행했고 대패한 유방백등산에서 일주일간 포위되었다.

패배에 직면한 유방은 천하를 통일한 자로서의 자존심을 꺾고 협상을 해 포위에서 풀려났다. 전해 오는 얘기로는 유방이 묵특의 왕비연지에게 사람을 보내 포위를 풀지 않으면 중국의 미인들을 잔뜩 보내 묵특을 연지와 떼어놓겠다고 위협했다고 한다.

어쨌든 묵특은 유방과의 협상에 응했고 당시 흉노와 한이 맺은 화친의 골자를 보면 한이 흉노의 속국이나 마찬가지였음을 알 수 있다.

첫째, 한의 공주를 흉노의 선우에게 의무적으로 출가시킨다. 이 관례는 문제(文帝, 기원전 179157) 때까지 계속되었다.

둘째, 한이 매년 , 비단, 곡물을 포함한 일정량의 조공을 바친다.

셋째, 한과 흉노가 형제맹약(兄弟盟約)을 맺어 동등한 지위를 갖는다.

넷째, 만리장성을 경계로 양국이 서로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는다.

이 합의는 기원전 198년 가을, 중국 종실의 공주가 흉노에 도착함으로써 발효되었다.

특기할 만한 일은 양국 조정(朝廷)왕위 변동이 있을 때는 새로운 혼인으로 동맹을 갱신했다는 점이다. 또한 중국이 흉노에 보내는 조공의 양도 한과 흉노간의 역학관계에 따라 수시로 변했는데 일반적으로 한의 조공은 매년 증가되었다. 기원전 192년부터 135년까지 적어도 아홉 차례에 걸쳐 한이 흉노에게 바친 조공이 증가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음을 볼 때, 한이 흉노의 속국이나 마찬가지였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