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중국의 자존심

중국의 자존심(19) : 진시황릉(1)

Que sais 2021. 1. 15.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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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제, 만리장성과 같은 특급 소재를 영화계에서 가만둘 리 만무인데 가장 공력을 들이는 곳은 중국임은 틀림없다. 그중 일반 대중에게 잘 알려진 영화는 중국의 간판스타인 장예모와 공리가 주연으로 1989년에 출시한 진용이다.

 

주인공 몽천방(장예모)은 진시황제 암살 시도를 물리쳐 총애받는 장군이었는데불로불사을 찾기 위해 서복과 떠나야하는 동남동녀 중 한 명인 한동아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이들의 사랑은 발각되어 한동아사형 언도를 받는다. 동남동녀만 불로초를 찾을 수 있는데 동아가 남자와 접했으니 처벌은 피할 수 없는데 한동아몽천방에게 키스하며 입으로 불사약을 전해주고 불로 뛰어들어 죽는다.

반면 몽천방은 진흙이 발라진 채로 불에 구워져 인간 병마용이 되지만 불사약을 먹었으므로 죽지는 않는데 1930년대 진시황릉 도굴꾼에 의해 우연히 몽천방이 깨어난다. 한마디로 2000년을 뛰어넘는데 그 앞에 주리리가 나타난다. 몽천방은 그녀가 한동아의 환생이라며 쫓아다니는데 주리리가 이를 알 리 없다. 그런데 주리리가 도굴꾼의 도굴에 휘말리며 죽게 되기 직전에야 자기가 옛날 한동아의 환생임을 깨닫고 몽천방에게 다음 생을 기약하는 말을 남긴다. 다시 시간이 흘러 1990년대에 세계 각국 관광객들이 병마용을 보러 오고, 그중에는 일본인 단체 관광객으로 온 여자가 있는데 그녀는 바로 한동아와 주리리의 환생이다. 병마용갱 발굴 현장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는 몽천방은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차리고 놀라서 응시한다.’

 

영화 자체는 진시황제와 불로초, 진시황제의 능묘, 병마용갱 등을 환생이라는 트릭으로 버무렸는데 중국의 절대 황제의 이야기를 애절한 사랑이야기로 변형시켰다하여 큰 화제를 일으킨 작품이다. 그런데 바로 이런 영화가 나올 수 있었던 배경은 중국에 현존하는 진시황제의 능에서 비롯된다.

중화인민공화국 산시성 시안 린퉁구 원산원(驪山園)에 거대한 야산을 여산 또는 역산(酈山)이라 부르는데 이것이 중국 최초의 황제 진시황제의 묘지. 바로 진시황릉(秦始皇陵)이다.

기원전 246년에 착공하여 기원전 208년까지 38년간 공사를 했는데 지금 보이는 것은 야트막한 피라미드형으로 그래도 76m라는 높이를 자랑한다.

학자들은 진시황릉이 당시 진나라의 수도였던 함양의 모양을 본떠 만들었는데 외성과 내성으로 나뉘어져 있음을 확인했다. 외성의 둘레는 6.3km이고, 내성의 둘레는 2.5km인데 현재 일반인들에게 보이는 곳은 당시 내성이었던 부분의 남서쪽에 위치하며,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관이 들어있는 매장실은 아직까지 발굴되지 않았지만 원진시황릉2단의 방분(方墳) 즉 사각으로 구성된 분구(墳邱)로, 능묘로 능묘의 기초가 되는 밑바닥 부분은 동서의 길이가 345미터, 남북의 길이가 350미터다. 그 둘레가 무려 1,410미터에 달하는 대규모 능으로 주위에는 이중의 성벽이 둘러쳐져 있다.

진시황제의 거대한 무덤에 관한 이야기는 옛날부터 입에서 입을 통해 전해져 내려왔는데 사마천의 󰡔사기󰡕에 적힌 진시황릉 관련 기록은 다음과 같다.

 

‘9, 시황제여산(酈山)에 매장했다.

시황제가 처음 즉위했을 때 여산을 공사했고, 천하를 통일하자 전국의 죄수 70만여 명에게 지하수가 3번 돌 정도로 구덩이를 깊게 파게 하고 구리를 부어 외곽을 만들었다.

궁궐과 여러 관리, 진기한 보물들을 가득 매장하였다.

장인에게 기계 쇠뇌를 만들게 하여 (묘에) 접근하는 자가 있으면 그를 쏘게 하였다.

수은으로 여러 개울, 강과 바다를 만들고, 기계로 수은을 주입하였다.

위로는 하늘의 모습을, 아래로는 땅의 형상을 갖추었다.

인어(人魚)의 기름으로 초를 만들어, 영구히 꺼지지 않게 하였다.

이세황제가 말하기를 "자식이 없는, 선제의 후궁을 내쫓는 것은 옳지 않다." 명령을 내려 그들을 모두 죽게 하니, 죽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매장을 끝내자 누군가 말하기를 "장인이 기계를 만들었고, 모든 노예가 그 사실을 알고 있는데, 노예가 많아 (사실이) 누설될 것입니다."

장례가 끝나고 보물 등을 이미 다 감추어 놓자, 묘의 가운데 통로를 폐쇄하고 바깥문도 폐쇄하여 장인과 노예들이 나오지 못하게 하니, 다시는 빠져나오는 사람들이 없었으며, 능에 풀과 나무를 심으니 그 모습이 마치 산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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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의 글을 토대로 진시황릉의 현궁(玄宮)을 풀어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그해(기원전 210) 9진시황을 여산에 매장했다. 시황은 즉위하자마자 공사를 벌였고 천하를 통일한 후에는 70만이 넘는 노동력을 징발하여 우물 3개를 파 들어갈 정도로 땅을 깊이 파고 구리 녹인 물을 부어 틈새를 메우고 외관(外棺)을 설치했다. 모형으로 만든 궁관, 백관, 기이한 물품, 희기한 동물 등을 운반해 그 안을 가득채웠다. 장인이 자동으로 발사되는 활을 만들어 접근하는 자가 있으면 쏘게 했다. 하천과 강 그리고 바다를 만들어 기계장치로 수은을 흘려보냈다. (천장)에는 천문(하늘) 도형을 장식하고 아래(바닥)에는 지리()의 모형을 설치했다. 인어(人魚)기름으로 양초를 만들고 불을 밝혀 오랫동안 꺼지지 않게 했다.’

 

그러나 그동안 고고학계에서는 적어도 사마천이 적은 현궁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진나라를 멸망시킨 항우의 군대진시황제의 능을 철저하게 약탈하고 파괴했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진시황릉에 엄청난 보물이 매장되어 있다는 기록에 따라 진을 멸망시킨 항우는 제일 먼저 진시황릉을 파헤쳤다. 󰡔한서(漢書)󰡕 「초원왕열전에 보면 항우가 관중(關中)에 들어와 진시황릉을 발굴하니 30만 명이 30일간 재물을 옮겼으나 다하지 못했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시황릉 주변에는 지금도 기와조각, 자갈, , 초토가 남아 있어 당시의 상황을 증명하고 있다.

그런데 항우가 진시황 능원을 불태우고 재물을 약탈했지만 완전히 파괴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학자들은 항우가 진시황제의 능원을 불태웠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진짜 능묘를 파헤치지는 못했다고 설명한다. 사실 과거 절대 군주가 자신들이 들어갈 능묘에 엄청난 보물들을 함께 매장하지만 이를 후대 누군가가 도굴하리라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대부분 가짜 능묘를 함께 건설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묘수가 발휘된다.

가짜 능묘에도 엄청난 보화를 부장하는 것이다. 이는 후대에 선대의 무덤을 파헤칠 사람이라면 대부분 후대의 집권자들이거나 또는 정복자로 들어온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이 무덤을 파헤쳤는데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면 가짜묘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리고 진짜 묘를 수색할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런 면에서 항우가 불태운 진시황제의 능원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항우가 진시황제의 능묘라 알려진 곳을 불태우고 그 속에 들어있는 부장품들을 획득한 것으로 만족했다는 것은 항우조차 자신이 불태운 능묘를 진짜로 보았다는 뜻이다.

여하튼 현재 진짜 능묘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면 진시황제의 작전이 성공했다는 뜻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유방진시황제의 능묘를 탐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항우가 진시황제의 능묘를 완전 파괴했다는 것을 듣고 굳이 진시황제의 능묘를 찾으려 할 필요는 없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유방은 항우를 격퇴하자 진시황릉에 군대를 파견해 능원을 보호하도록 했다.

항우와 유방은 누가 먼저 관중에 들어가더라도 약탈을 하지 않기로 약조했다. 그러나 먼저 들어간 항우가 약조를 지키지 않았음을 알고 유방은 자신이 항우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의미에서 진시황릉을 보호했다고 볼 수 있는데 사실 유방으로서는 결코 나쁜 카드가 아니다.

당나라 말기황소의 난을 일으킨 황소의 군대는 공개적으로 진시황릉을 도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들은 진시황릉에 매장되어 있을 엄청난 재보를 확보하여 군비와 병기의 부족을 충당하고자 한 것이다. 청나라가 멸망하고 군벌들의 혼전이 벌어질 때도 섬서 지방의 군벌이 군비를 충당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진시황릉을 도굴했지만 모두 실속이 없었음은 물론이다.

 

<지하도시 진시황릉>

수많은 후대의 집권자들이 진시황릉에 눈독을 들였지만 결론은 진시황릉은 온전했다는 뜻이다.

그것은 진시황릉이 상상을 초래하는 규모이기 때문이다. 진시황릉이 얼마나 거대한 규모였는가는 2002시안(西安) 병마용 박물관팀이 밝혀냈다. 진시황제의 묘만해도 전체 면적이 2제곱킬로미터에 달하고 지하 4층의 거대한 궁전으로 되어 있으며 묘역 안팎에는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을 쌓아 당시 도읍지인 시안의 모습을 담았다. 묘역 외성곽 길이만 12킬로미터에 달해 무덤이라기보다 하나의 지하도시에 가깝다.

봉토 아래의 지하궁전도 동서로 485미터, 남북으로 515미터로 총면적이 25만 제곱미터으로 알려지는데 25만 제곱미터는 약 8만 평이나 된다. 현재처럼 첨단 발굴 장비를 갖고 있더라도 정확한 발굴 위치를 모른다면 무잡이로 땅을 파헤쳐야하는데 이것이 간단한 일은 아니다.

진시황릉은 당시 진시황의 궁전을 그대로 축소, 복제한 모형으로 건축했다. 거대한 봉우리가 중앙에 있고, 내성과 외성이 이를 차례대로 둘러싸며 보호하고 있다. 특히 내성과 외성 안팎 여러 곳에 병마용과 유물들이 묻혀있다. 내성벽 내부의 서쪽 부근에서 청동 마차와 말들이 발견되었으며 내성벽 안에서는 황제들을 모시던 관리들과 행정 각료들의 모습을 본 딴 인형들이 발굴되었다. 또한 외성과 내성 안 사이의 공간에서는 무희들과 광대들의 인형들이 출토되었다.

외성벽 북쪽에서는 황실 정원이 있는데, 이 정원에서 청동으로 만든 학과 거위, 오리, 그리고 악사들의 모형이 발굴되었고 외성 바깥쪽으로 말들이 산 채로 매장되었다. 이는 마치 말을 타고 곧바로 성을 나갈 수 있는 차비를 차린 것이다.

더불어 진시황릉 서쪽에서 능을 건설하기 위해 동원되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유해가 발견되었다. 사마천의 글에 수많은 사람들이 생매장되었다는 것이 확인된 것이다.

큰 틀에서 중앙부분에 묘실이 있을 것으로 추정했지만 이를 확인하는 것이 간단한 일은 아니다.

그런데 2003, ‘863 고고원격탐사지구물리종합탐사기술프로젝트팀이 완벽히 방수처리 된 묘실(墓室)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지하궁전 형태로 만들어진 이 묘실은 해발 470480미터 지대에 높이가 15미터 정도이고 동서 80미터, 남북 50미터의 크기라고 유사의(劉士毅)박사는 설명했다. 그러나 아직 묘실 내부의 소장품과 도굴 여부에 대해서는 확인되지 않았다. 특히 영묘의 거대한 구조물은 사라져 버렸으며, 오직 꼭대기가 떨어져 나간 피라미드와 닮은 나무 둔덕만 350제곱미터의 토대 위에 남아 있지만 현재까지 세계에서 가장 큰 분묘로서의 위용은 사라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