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중국의 자존심

중국의 자존심(20) : 진시황릉(2)

Que sais 2021. 1. 15. 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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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되지 않는 진시황릉>

진시황제흉노와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았고 농업 생산량을 늘리기 위하여 관개 시설을 고치면서 중국 역사상 저수지처음으로 만들었다. 또한 중국 대륙의 남북을 이어주는 운하를 건설하여 현재도 활용하는 교통망이 되었다.

이들 대형 공사가 국민들의 고통 속에서 이루어졌으므로 진시황제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내리게 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특히 황제가 역사상 가장 사치스런 궁전인 아방궁(阿房宮)궁전 270, 죽은 뒤 묻힐 자신의 거대한 묘를 건설하여 더욱 큰 많은 비난을 받았다. 바로 그 현장이 세계를 놀라게 하는 진시황릉이다.

진시황릉의 공사가 상상을 초래했다는 것은 여러 기록으로도 전해진다.

우선 진시황제는 즉위 직후부터 자신이 죽은 뒤 묻힐 안식처를 승상인 이사(李斯)로 하여금 건설토록 했는데 70만 명이나 동원했음에도 완성치 못했다. 당대에 즉위하자마자 자신의 능을 짓는 것은 관례나 마찬가지인데 생전에 무덤을 만들면 정해진 수명보다 오래 산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생전에 짓는 무덤수궁(壽宮)이라 부른다.

여하튼 진시황제는 즉위후 35년이 지났음에도 공사를 완료하지 못하고 2세 황제 호해가 우여곡절 끝에 완성했다. 공사가 끝나자 수많은 인부들을 순장하였다고 했는데 이는 사실로 확인되었다. 특히 진시황릉의 배장품(陪葬品) 구덩이에서 매우 특이한 시체들이 발견되었다. 그중 남자5명과 여자2이 묻힌 무덤에서는 금, , 비단으로 장식된 호화로운 부장품이 발견되었으며 이들은 모두 스무 살에서 서른 살 사이로 비슷한 또래였다.

어떤 유골에는 사지가 절단된 자국이 남아 있고, 어떤 유골은 턱뼈가 탈구되어 있는데 이는 교살 당했다는 증거. 심지어 두개골 속에 청동 화살촉이 박힌 채 남아 있는 유골도 있었다. 학자들은 이들을 호해의 형제자매로 추정한다. 이를 감안하면 장자인 부소가 항거를 했더라도 결국 살해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진시황릉의 소위 본채가 훼손되지 않은 상태에서 아직도 지하에 온전하게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전세계 학자들은 물론 중국 지방 정부 관리들이 진시황릉을 발굴하여 그 실상을 알려주자고 재촉했다.

그러나 진시황릉 자체에 대한 발굴은 곧바로 반대에 부딪쳤다. 우선 진시황릉의 구조 및 현황에 대한 자료가 없으므로 이를 현재의 발굴 기술로 발굴하다가는 무덤을 훼손할 수 있다는 점이다. 더구나 지하에 있는 수많은 수은에 의해 발굴요원들이 크게 상할지도 모른다는 지적도 제기되었다. 결국 중국 정부는 아직 발굴에 대한 능력이 부족하다며 이를 각하했다. <국가문물국>송신조(宋新潮)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기술이 아직 미흡한 현 상황에서는 제왕릉을 발굴할 수 없다. 특히 대형 묘장의 발굴은 그에 상응하는 기술적 여건이 아직 미흡하다. 그 중에서 가장 어려운 점은 인력과 자금 부족이다. 문물 보호에 종사하는 전문 연구원의 수가 부족하며 특히 원사급의 문물보호 전문가가 부족하다. (중략) 따라서 보다 잘 보호하려는 각도에서 본다면 발굴하지 않고 묘장인 채로 남겨두는 것이 현명하다.’

 

그렇게 지지부진하게 진행된다면 진시황릉언제쯤 모두 발굴되겠느냐는 질문에 중국의 한 고고학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인내는 중국의 미덕이다. 발굴이 천 년을 더 갈지도 모른다. 그때는 우리도 유물이 되어 있으리라.'

 

중국의 이러한 발굴 불가라는 결정에 수많은 학자들이 다음과 같은 이유를 언급하며 조사를 해야한다고 요구하였다.

 

진시황릉지진대 위에 서있고, 지하에 매장되어 있는 부장품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발굴을 진행해야 한다.

진시황릉을 발굴하면 관광업을 크게 발전시킬 수 있다.

도굴을 방지하기 위해 하루빨리 발굴해야 한다.

 

그러나 중국 발굴이 오히려 유물을 보존할 수 있는 기회라는 학자들의 주장에도 중국의 고고학 기술이 진시황릉과 같은 거대한 역사지구를 발굴하는 데에는 충분치 못하다며 반대했다. 중국 정부가 이와같이 완고한 주장을 견지하는 것은 진시황릉과 한 틀에 있는 병마용갱의 경우 외부 공기에 노출되면서 겉면에 화려하게 칠해져 있었던 색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막지 못한 이력이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진시황릉 발굴을 위해서는 일단 관련 기술과 조사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공식 방침으로 내세워 정식 발굴을 금지하였다.

진시황릉 발굴에 대해서는 중국과 일본의 정상회담에도 주제로 등장했다.

일본의 다나카 수상주은래 총리에게 진시황릉의 발굴 자금을 일본이 모두 부담하고 출토되는 유물을 반반씩 나누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주은래 총리는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거절했다.

 

진시황릉을 파면 일본을 사고 남을 보물이 나올지도 모르는데 무엇이 급하다고 일본의 돈을 빌려 발굴하겠소?’

 

제프리 리겔 교수지하궁전, 현궁의 참모습을 연구하면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사마천은 진시황이 자신의 지하궁전 바닥수은을 담은 강과 바다를 만들었다고 했는데, 실제로 무려 500이나 되는 수은의 강과 바다가 있었다. 진시황제의 무덤2개의 자형 피라미드로 축조되었고 지하궁전은 진시황제가 통일했던 중국 영토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수은이 아직도 무덤 안에 남아 있다는 이 무덤은 도굴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진시황릉이 도굴되었다면 수은이 즉시 공중으로 날라가 모두 사라져야 하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무덤 안에 수은을 넣는다는 것이야말로 당대의 과학을 보여준다고 설명한다.

우선 휘발성이 매우 강한 수은 기체인체에 치명적이어서 도굴꾼의 침입을 방지하는 강력한 무기가 된다. 또 다른 면은 수은이 진시황제가 원하는 영생을 다독거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학자들은 진시황제가 더운 여름에 갑자기 사망했고 또한 지방에서 서안까지 시체를 운반해야했으므로 시신이 부패돼 그의 무덤에는 백골만 안장돼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런데 수은사마천의 기록대로 무덤에 있다면 그의 시신이 온전하게 보존돼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즉 당시에도 수은을 이용한 과학적인 방부 기술이 상당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도굴꾼을 막고 시신을 장기간 보관할 수 있는 방법으로 수은이 적격이라는 설명이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직접 실물들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각종 첨단 장비를 통한 분석에 의하면 진시황릉 속에 묻혀 있는 대부분의 금속 구조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는 것이다.

2000년에 지하 댐과 배수 수로가 발견되었는데 지하궁전은 침수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학자들은 진시황릉에 설치된 안정적인 배수 시스템이 현재도 잘 가동된다는 것이다. 한편 진시황릉에 사용된 수은은 황릉에서 약 100떨어진 산시성 쉰양에서 수은을 운반해 왔을 것으로 추정한다.

 

<진시황제는 동이족>

진시황제의 병마용갱이 세상을 놀라게 하지만 진시황릉의 지하묘가 피라미드로 되어 있다는 발표는 한국인에게 매우 중요한 점을 일깨운다. 이것은 진시황제묘가 적석총돌무덤이라는 이야기인데 이는 중국인 즉 화하가 전혀 사용하지 않은 동이족의 장례법이기 때문이다. 돌을 쌓아 만든 돌무덤적석총에 대해 약간 설명한다.

돌무덤에는 돌무지무덤(積石塚), 돌널무덤(石棺墓), 돌덧널무덤(石槨墓), 돌방무덤(石室墓) 등이 있으며 고인돌무덤(支石墓)도 돌무덤에 포함시킨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무덤 형식의 하나가 돌널무덤석관묘. 돌널무덤크게 두 종류로 분류하는데 하나는 땅을 파고 지하에 판자와 같은 넓은 돌(板石)을 상자 모양으로 ()을 만든 무덤이고, 다른 하나는 깬돌(割石)이나 냇돌(江石)로 네 벽을 쌓고 뚜껑을 덮은 무덤이다.

이런 돌무덤은 신석기시대로부터 청동기시대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만주 및 한반도 소위 동이지역에서 크게 유행하여 고조선 이후 부여, 고구려에서 사용했으며 남쪽으로는 일본의 큐슈(九州) 지방과 류우큐우(琉球) 열도까지 분포되어 있다.

돌무덤은 고대 중국과 전혀 다른 묘제라는 데 중요성이 있다. 돌무덤은 요하 일대에서 한민족의 터전으로 이동하지만 중원 지역으로는 내려가지 않기 때문이다. 중국은 땅을 파서 묘실을 만들고 시신과 유물을 안장하는 토광묘가 주류를 이루었고 주나라 때(周代)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나무로 곽을 짜서 묘실을 만드는 목관묘가 유행했다.

이것은 중국의 역대 제왕들의 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중국의 능은 대체로 두 가지 형식을 갖고 있다. 하나는 퇴토성릉(堆土成陵)이고 다른 하나는 인산위릉(因山爲陵)이다. 퇴토성릉은 평지에 흙을 쌓아올려 작은 산처럼 만드는 것으로 진시황릉이 바로 이 형식이다. 인산위릉산을 뚫어 관을 안치하여 산 자체를 능으로 하는 것으로 비교적 늦게 출현하였는데 무측천과 고종의 건릉이 대표적이다.

무덤은 지역집단의 공통된 참여를 통해서 축조되므로 무덤의 성격에 따라 무덤을 만든 민족의 유사성을 구분한다. 그런데 중국과 동이족의 무덤이 원천적으로 다르다는 것은 이들 문명이 근원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어떤 민족이 타 민족을 정복했을 경우 선주민의 묘를 파괴하는 분묘파괴행위가 나타난다. 이것은 분묘가 제사행위의 장소로 자신과 선조와의 계승관계를 확인하는 행위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한편 고고학에서 완벽한 구조를 갖춘 제도화된 무덤의 존재는 그에 상응하는 일정한 수준의 정치체의 존재를 입증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한림대의 노혁진 박사는 왕권사회가 존재하지 않는데 왕릉이 출현할 수 없고 왕릉에 다른 계급자가 묻히지 않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특히 왕릉과 일정한 지배자에 속한 자의 무덤은 항상 그 사회의 중심적인 의미를 지닌 특정한 지위를 보장받는다. 그것은 사회구성원이나 후손들이 무덤을 향해 일정한 숭배의식을 진행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분묘파괴행위는 과거의 계승관계를 단절하겠다는 의미가 포함되었다고 생각한다.

한민족이 중국과 다른 동이족으로 차별성을 갖고 있다고 부단히 주장하는 이유인데 진시황제의 지하묘동이족의 전형적인 묘제적석총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의미심장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