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중국의 자존심

중국의 자존심(18) : 만리장성(7)

Que sais 2021. 1. 15. 0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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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명나라의 장성은 전략적 요충지였던 덕분에 청나라 군의 침입에 다소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었지만, 일단 방어가 뚫리면 오히려 재빠른 진군을 재촉했다. 물론 당시 명나라화약무기로 무장하고 있었으나 기동력을 중심으로 한 청나라 군에게 그 효용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중국장성학회동휘회(董輝會)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장성춘추전국시대 이후20개의 왕조를 통해 건설 및 개보수되었는데 춘추전국시대 2만 리, 진시황 때 1만 리, 한대 2만 리, 서진북위동위북제북주금대까지 4만 리, 명대에 약 1.46만 리가 쌓아졌다.’

 

이 숫자만 보면 진시황제만리장성을 완성했다는 자체가 다소 과장된 것으로 보이지만, 당시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할 때는 기원전 200년이 넘는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어쨌든 장성 축조에 동원된 인적, 물적 자원이 그야말로 천문학적 숫자에 달하는데 진시황2차에 걸쳐 추진한 장성 축조에 동원된 인력은 군인 30만 명, 민간인 50만 명에 이른다. 또한 북제 때10차에 걸쳐 180만 명, 수나라 때7차에 걸쳐 140만 명이 동원되었다. 명나라 때200여 년에 걸쳐 14차례의 장성 축조가 있었다고 한다.

만리장성이 마지막으로 군사적인 목적으로 사용된 것은 만주사변 이후 일본군의 열하사변 때. 북경을 점령하려는 일본군과 방어하려는 중국군이 북경 근처의 만리장성과 산해관에서 격전을 벌였다. 그러나 결국 19331, 산해관이 함락되고 만리장성이 돌파되면서 북경이 함락되었다.

학자들의 검증에 의하면 현재 전체 장성 중, 거의 50% 정도 예전의 모습이 사라지고 다 파괴되었다고 분석한다. 지역주민들이 집 지을 자재용으로 장성을 파괴하고 관광객에게 만리장성의 돌을 판매하기도 했다. 물론 중국의 급속한 현대화로 인한 각종 개발사업으로 파괴되는 경우도 있다고 알려진다.

근래 중국이 발표하는 만리장성의 길이는 천차만별이지만 <중국장성학회>장성의 길이를 일반적인 추정치보다 긴 6,300킬로미터 약 15,000로 보고 있으며 이들 장성이 자연과 주민 등 의해 파괴되었다고 주장했다. 자연에 의한 훼손은 197곳으로 자연붕괴 165, 홍수로 인한 붕괴 13, 모래에 의한 매몰 16, 지진 및 풍화작용에 따른 붕괴 3곳이다. 그뿐 아니라 주민들의 무지로 많은 장성이 훼손되었다. 주민들이 성벽의 벽돌을 빼간 곳이 140, 성벽을 허물고 농사를 짓는 곳이 6, 성벽을 주택과 돈사(豚舍) 울타리 및 무덤으로 훼손한 곳이 4, 목적이 불분명한 훼손이 3곳 등 모두 151곳이 훼손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장성의 돌과 벽돌로 집을 지으면 복과 행운이 온다는 잘못된 믿음이 장성의 훼손을 부추겼다고 한다.

특히 정부에 의해 근래에 파괴된 곳도 많이 있다. 댐 건설로 수몰된 곳이 12곳이고 도로공사와 건축시공을 위한 훼손도 20곳에 이른다. 이밖에 특정 기업에 의한 훼손이 4, 대약진운동문화대혁명 때 파손된 곳이 11, 중일전쟁 등 전쟁에 의한 파괴가 9곳이었다.

만리장성15,000리가 넘으므로 이들을 방문한다는 것이 간단한 일이 아니지만 가장 접근하기 쉽고 잘 알려진 곳은 북경인근의 거룡관(居庸關)이다. 거룡관은 매우 경관이 아름다워 800여 년 전 금나라 때부터 연경8(燕京八景)의 하나로 알려진 곳이다.

거룡관은 진나라의 진시황이 장성을 건축할 때 많은 인부들이 여기에서 거처한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때 인부들을 용도(庸徒)'라 했다. 현재 볼 수 있는 것은 명나라 때 건축한 것인데 거룡관 중심에는 정밀하게 조각한 백색의 받침대인 운대(云臺)가 있다. 이 받침대는 원래 구름탑(過街塔)의 기초 부분으로 1345년 이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돌로 된 벽에 사천대왕과 많은 불상들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들 모두 수작으로 중국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는 작품들이다.

거룡관은 그야말로 많은 전쟁을 겪은 곳이다.

한나라 때 북방의 선비족이 이곳을 점령했고 북위에도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으며금 시기에도 혈투가 벌어졌다. 특히 명나라 말기 이자성16443월 이곳을 돌파하고 3일 후 북경으로 몰려들어 함락시킴으로써 명나라가 멸망하는 길을 열어준 곳이다. 이와 같이 거룡관군사요충지로 중요성을 부여받았으며 원나라 때 황제가 상도(지금의 내몽골)피서갈 때 반드시 거룡관을 거쳤다.

북경에서 북쪽으로 75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팔달령 장성도 매우 잘 알려진 곳이다. 팔달령은 동서남북의 주요도시를 잇는 사통팔달의 요충지이므로 팔달(八達)이란 이름이 붙었다. 명나라의 명장 척계광(戚繼光, 15281587)이 건설한 것으로 그가 장성을 지키는 동안 그렇게도 속을 썩이던 북방인들이 한 번도 이곳을 공략하지 않았다고 한다. 팔달령의 최고봉은 북팔달로 해발 1,000미터이며 중국 장성 중 가장 전형적인 모양을 갖고 있다. 관람이 가능한 구간은 남쪽 1,200미터, 북쪽 2,300미터인데 모택동의 친필 휘호장성에 가보지 않은 사람은 대장부가 아니다이곳에 있어 더욱 유명세를 받고 있다.

팔달령장성 인근에 있는 모전욕 장성도 많은 방문객이 있는 곳이다. 남북조시대의 북제(北齊) 처음 건설된 것으로 이곳도 명대에 재축한 것이다. 장성 전체의 길이는 2,250미터이지만 1,770미터만 관람이 가능하다. 가을철 경관이 특히 아름다운 곳으로 북경 16중 한 곳이다. 다만 1,190개의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야하는 것이 부담이다.

그러나 만리장성의 의미를 한껏 느낄 수 있는 곳은 2개의 상징적인 기념물이다.

하나는 동쪽 끝인 산해관(山海關), 서쪽으로 1949년 이후 완전하게 복구된 요새 가욕관(嘉峪關)이다.

만리장성의 동쪽 시발은 일반적으로 천하제일관으로 알려진 산해관으로 인식하는데 과거에는 유관(楡關)이라고 불렀다. 산해관은 북쪽으로 연산(燕山), 남쪽으로 발해(渤海)에 잇닿아 있으며 지세가 험하고 동북과 화북지간의 요새로 과거부터 줄곧 군사상의 전략요지로 쟁탈의 초점이 되었다. 동서남북으로 관문이 있는데 천하제일관이라는 편액이 걸린 곳은 동문 성루. 글자 하나의 길이가 1.6미터에 달하여 멀리에서도 잘 보인다. 성루는 2층으로 동쪽으로는 바다를 바라볼 수 있고 북쪽으로는 장성을 바라볼 수 있다. 산해관에는 진시황제 때 축조한 성벽 일부가 남아있다. 일반적으로 동쪽 기점을 산해관이라 인식하는데 일부 학자들은 진나라 때 장성의 시작은 더 동쪽에 있는 갈석산(碣石山)으로 보기도 한다.

천하제일웅관이라 불리는 가욕관은 가욕관시의 남서 6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하는 하서회랑의 서쪽에 있는데 성벽의 일부는 고비사막을 횡단하고 있어 험준한 지형에 그 요새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가욕관은 둘레 733m, 높이 11m의 성벽에 둘러싸여 성 내부 지역은 약 33,500제곱미터이다. 황토를 판축으로 하여 굳힌 성벽이며, 서쪽은 벽돌을 겹쳐 쌓아있다. 동서로 각각 누각(문루)과 옹성을 가지는 성문을 갖추고 있는데 서문에 가욕관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가욕관의 방어 설비는 크게 나누어 내곽, 외곽, 3개가 되고 있다. 만리장성으로 연결되는 관 중에서 유일하게 건설 당시 그대로 남아있는 건축물이다. 동서 실크로드의 요충지의 하나이며, 주위에는 돈황 막고굴과 같이 유명한 유적이 존재한다. 전설에 의하면 가욕관의 설계자에게 어느 정도의 벽돌이 필요한가를 물어, 그는 만약을 위해 1개의 벽돌만 여분으로 준비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가욕관이 완성되었을 때 정확하게 1개만 벽돌이 남았다고 하는데 이는 그만큼 장성 건설에 공을 들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리장성은 보이지 않는다>

1932, 만화가이자 작가인 로버트 리플리(Robert Ripley)는 만리장성이 달에서도 보이는 유일한 인공 건조물이라고 주장했다. 이 말은 근래까지도 만리장성을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인용되곤 했다.

러시아,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3번째로 발사에 성공한 유인 우주선은 중국의 선저우(神舟) 5. 20031015일에 발사돼 21시간여 동안 지구 궤도를 14바퀴 돈 후 네이멍구의 초원으로 귀환한 중국 최초의 우주인 양리웨이(楊利偉)에게 쏟아진 질문 중 하나가 우주비행 중 만리장성을 육안으로 보았느냐는 것이었다.

사실 이 질문은 당시 중국 국민들의 최대 관심사 중 하나였다. 흔히 만리장성은 지구상에서 사람의 손으로 건설된 것 중 우주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건축물로 알려져 있으며, 그 같은 사실은 당시 중국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게재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명쾌하게 말했다.

 

만리장성은 보이지 않는다.’

 

사실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만리장성이 아무리 길지라도 사람이 우주공간에서 육안으로 구별할 수 있는 최소각 범위에 들어올 만큼 그 폭이 넓지 않으면 육안으로 보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머리카락이 아무리 길어도 몇 미터만 떨어지면 그 폭을 식별할 수 없어 우리가 머리카락을 알아차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만리장성의 최대 폭은 7미터이며 사람의 최소 식별 각도는 3×10-4(rad)이다. 이 수치에 따르면 사람이 만리장성을 볼 수 있는 거리는 대략 23.3킬로미터. 지구표면에서 23.3킬로미터 이상 위로 올라가면 만리장성을 구별할 수 없다는 얘기다. 23.3킬로미터는 지구의 성층권에 해당하므로 우주공간이라 할 수 없다. 결론적으로 말해 만리장성을 볼 수 있는 높이라면 고속도로, 운하, 철도 같은 다른 인공 구조물도 볼 수 있다.

만리장성을 우주에서 볼 수 있느냐 없느냐는 워낙 첨예한 문제이므로 2007년 중국 최고의 과학연구기관인 <중국과학원>이 이를 다음과 같이 확인했다.

 

우주에서 육안으로는 만리장성을 볼 수 없으며, 일정한 공간분해능을 가진 위성의 원격탐지 기능에 의해서만 만리장성의 영상을 얻을 수 있다.’

 

양리웨이는 직접 우주로 나가 만리장성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해주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좌우로 수십 개의 가지를 뻗치고 있는 만리장성은 인류 역사상 가장 긴 축조물이라는 사실이다. 현재까지도 그 길이를 정확하게 측정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상당 부분이 멸실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원래 형태는 지금 남아 있는 2,414킬로미터의 두 배에서 두 배 반 정도 , 지구 둘레의 1/7 1/8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한다. 한 수학자의 계산에 의하면 만리장성에 사용된 돌로 피라미드를 쌓으면 30개나 만들 수 있다고 한다.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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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장성은 왜 북쪽에 있을까?, 김기협, 프레시안, 2019.08.03

만리장성, 네이버지식백과, 유네스코 세계유산

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at_code=388358&portal=portal

https://ko.wikipedia.org/wiki/%EA%B0%80%EC%9A%95%EA%B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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