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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자존심(17) : 만리장성(6)

Que sais 2021. 1. 15.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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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장성 전성시대>

몽골에 의해 중국이 철저하게 유린당한 사실을 잊지 않고 있던 명나라북방으로부터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 나라의 안전을 지키는 길이라고 확신했다. 그들은 장성을 보다 견고하게 다지는 것이 몽골의 침략을 막는 데 효율적이라고 생각했고, 이러한 전술에는 어느 정도 행운도 따랐다. 몽골에 예기치 못한 기근과 질병이 만연했던 것이다.

중국의 원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해진 몽골은 계속 교역을 요구했지만 명나라는 이들의 요구를 묵살했다. 명나라는 몽골족을 철천지 원수처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존의 위기에 몰리면 어느 민족이든 돌파구를 찾게 마련이다. 바로 그때 등장한 사람이 몽골의 알탄 칸이다. 그는 몽골인을 규합해 명나라의 무관심과 방관에 보복했다.

명나라알탄 칸의 수많은 침입과 약탈에도 굴하지 않았고 오히려 수도의 서북쪽, 대동과 선부 북쪽에 성벽을 쌓기 시작했다. 그곳은 외선 성벽이 세워진 지형의 평균 고도가 1,000미터나 될 정도로 해발 고도가 높았다. 대동 정남쪽에 있는 안문관은 높이 1,500미터에서 3,000미터 선봉우리 사이에 있었다.

몽골은 명나라의 장성 건설에 관계없이 계속 중국을 약탈했지만, 은 이에 개의치 않고 장성을 계속 건설했다. 그렇게 해서 16세기 중반에는 1,200킬로미터에 달하는 성벽을 건설했고 요새와 망루 역시 1,200여 개나 구축했다. 이후 명나라가 멸망하는 1644까지 현재 북경에서 볼 수 있는 만리장성의 위용이 완성되었다.

결국 만리장성기원전 2000년경부터 건설되기 시작했고, 진시황제에 의해 기본틀과 개념이 수립된 다음 한나라보완한 후 명나라완성시켰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명나라는 흙을 다져 쌓던 과거의 방식과 달리 벽돌과 석재로 장성을 축조했다. 수많은 관광객이 방문하는 북경 근처의 팔달령(八達嶺) 등 장대한 만리장성은 진시황제의 만리장성과 관계없이 명나라 때 건설된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명나라의 경우 군사상 수비와 공격용으로 뿐 아니라 통상로로 활용하기 위해 장성을 건설했다는 점이다. 19세기 초, 중국 주재 나폴리 선교사였던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신부15미터 높이의 성벽 상부에 말 다섯 마리가 나란히 지날 수 있는 안전한 길이 있었다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명나라의 거대한 장성도 결국 청나라의 이자성(李自成)에게 점령당하고 말았다. 이때 만리장성이 국가를 지키는 데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것은 이자성의 다음의 시로도 알 수 있다.

 

너희는 성벽 만 리를 쌓아 바다에 이르렀지만

그런 수고는 모두 헛된 것이다.

너희는 백성의 힘을 소모했지만

제국이 언제 너희 것이던 때가 있었느냐.‘

 

당연히 만리장성의 위상은 급격히 내려갔다. 이는 청나라만주는 물론 중국, 몽골, 티베트, 중앙아시아, 대만까지 장악하는 등 중국의 남북부를 통일해 성벽이 가로막던 남쪽의 문명과 북방의 야만을 허물어버렸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과거처럼 국경 침입자에 대한 방어벽이라는 전략적 기능도 자동적으로 상실됐다.

더욱이 장성 자체가 세월의 변화를 감당하지 못했다. 화포가 개발되자 적의 공격을 막는다성벽의 개념이 크게 퇴색해 버린 것이다. 특히 서양인이 중국에 진출할 때 북방의 육지가 아니라 바다를 건너왔기 때문에 만리장성의 물리적 의미는 더욱더 사라지고 말았다.

만리장성에 대한 매우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광무제(서기 2557 재위)에 의해 도출되었다. 그는 고정 성벽을 만드는 것이 비용만 많이 들고 전략적으로도 크게 효율적이지 못한 것을 알고 이동 성벽을 개발토록 했다. 황소가 끄는 수레에 성벽을 실어 필요한 곳에 신속히 설치하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그의 아이디어가 성공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후 어떤 사람도 이동 성벽을 시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만리장성 축조법>

수천 년간 건설된 만리장성은 건축 방법이 시대에 따라 다르다. 초기에는 흙으로 쌓는 기초적인 토성이 주를 이뤘지만, 곧이어 유명한 판축(版築)기법이 개발되었고 이 방식은 명나라에서도 사용한 장성 건축의 기본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널빤지나 벽돌을 양쪽에 판으로 설치한 다음 그 사이에 짚이나 갈대를 섞은 일반 흙을 다져넣어 성벽의 심지가 되도록 하는 방식이다.

재료를 근처에서 구하기 쉬운 것으로 사용하다 보니 지역에 따라 재료가 달랐고 어떤 곳은 사용된 회반죽이 너무 단단해 못이 박히지 않았다. 또한 석재가 많은 곳은 돌과 혼용하거나 석벽만으로 쌓기도 했다. 그래도 재료를 구하기가 쉬워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는 것은 물론 비용도 저렴했다. 오히려 문제는 노동력 확보와 그들을 먹이고 입히는 일이었다.

명나라 시절에는 벽돌과 석판으로 성벽을 쌓고 그 위에 250미터에서 500미터씩 간격을 두고 망루, 봉화대, 그리고 보루를 설치했다. 이들은 특히 표면에 벽돌을 쌓기 위해 여러 종류의 모르타르를 사용했는데, 가장 보편적인 것은 점성이 강한 쌀풀이었다. 성벽의 속을 채우거나 마감하는 재료로는 그동안 사용해온 , , 나무, 갈대가 쓰였다.

장성은 흙으로 쌓은 서부와 달리 동부로 갈수록 점차 표면이 벽돌로 대체된다. 대개는 그 지방에서 나는 흙으로 만든 벽돌로 일부 지역에서는 현장에서 무려 80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서 제작되었다. 벽돌의 크기도 상황에 따라 달랐는데, 어떤 것은 60×24×18센티미터에 달했다.

가장 중요한 성벽의 높이지형의 특성에 따라 결정되었다. 비교적 낮고 탁 트인 지형은 성벽의 높이가 산보다 다소 높은 78미터였고 자연적으로 방어력을 갖춘 능선 같은 곳은 12미터로 마감했다. 물론 아무리 천혜의 여건을 갖추었더라도 성벽의 기초는 반드시 돌과 벽돌 층으로 평평하게 다듬었다. 또한 성벽 꼭대기의 회랑은 말을 타고 성벽 전체를 달릴 수 있도록 바닥을 다졌다.

명나라 때 건설된 북경 근처의 일부 구간은 성벽 위를 말 다섯 필이 나란히 달릴 수 있도록 했다. 또한 당시에는 화포와 화약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벽돌을 사용한 곳에서는 전체 구조물 상부에 총안(銃眼: 몸을 숨긴 채 총을 쏘기 위해 성벽, 보루 등에 뚫어 놓은 구멍)이 있는 톱니 모양의 벽을 설치해 외적의 공격에 효율적으로 대치했다. 이런 시설은 약간 다른 면은 있지만 한국의 수원화성에서도 볼 수 있다.

근래 만리장성에 대한 매우 특별한 연구결과가 발표되었다.

만리장성 중 상당 부분이 오랜 세월에도 무너지지 않고 견뎌온 비결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단서는 2005년 만리장성을 보수하던 근로자들이 우연히 벽돌에서 접착물질을 발견했다. 이를 분석한 중국의 <문화유적보존및복원연구소>2010접착물질이 찹쌀이라고 발표했다. , 만리장성을 쌓을 때 찹쌀과 탄산칼슘 즉 소석회를 섞은 벽돌 접착제를 사용했는데, 찹쌀 속 녹말의 일종인 아밀로펙틴이라는 성분이 정밀한 미세구조 형성에 도움을 줌으로써 물리적으로 안정된 특성과 기계적인 힘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석회-찹쌀풀 반죽으로 만든 무기-유기 혼합 모르타르는 만리장성뿐만 아니라 건물이나 무덤, 탑 등의 건축에도 사용됐는데 이들로 만든 구조물은 지진을 비롯한 자연재해에 견딜 수 있는 힘이 됐다. 실제로 1604명나라에서 강도 7이상의 강진이 발생했는데 이 공법으로 지은 건물이나 성벽은 무너지지 않았다고 한다.

 

<만리장성 네트워크>

명나라 장성은 높은 돈대와 망루, 보루 등이 연속적으로 설치되어 복합적인 방어 네트워크를 구성했다. 이들의 간격은 주변의 지형과 안전도에 따라 달라지며 대체로 500미터에서 4킬로미터의 간격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군사상 매우 중요한 곳은 3040보마다 망루를 설치하기도 했다. 봉화대는 육안으로 볼 수 있고 큰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거리에 있어야 했지만, 연기(), 불빛() 또는 대포로 경고를 발했다. 봉화대의 뛰어난 효율성은 당나라 때 위급신호가 하루에 1,000킬로미터를 주파했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명나라도 당나라와 유사한 시스템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당나라는 다음과 같은 지침서를 활용했다.

 

탑 상부에 화로 세 개가 있는데 평화(불 하나), 위험경고(불 둘), 실제로 전투가 일어나는 경우(불 셋)에 불을 피우며 아침저녁으로 횃불의 개수가 달라진다.’

 

명나라에는 적이 침입했을 때 신호탑끼리 숫자로 소통하는 암호도 있었다. 불 하나를 피우고 대포 한 발을 쏘면 적군 100명을 뜻하며 불 둘과 대포 두 발은 5001,000, 불 셋과 대포 세 발은 1,000명 이상, 다섯 발은 1만 명 이상을 뜻했다.

명나라 장성 곳곳에서 발견되는 망루의 크기도 다양하다. 일반적으로 성벽 높이의 두 배지만 그 절반 높이도 있다. 망루는 속에 창고나 봉화대, 숙소의 기능을 갖춘 곳과 감시 및 전투를 위한 돈대 기능밖에 없는 것으로 나뉜다. 봉화대에서는 다섯 명에서 열 명까지 근무했으며 감시탑이나 전투용 탑50명 이상을 수용하는 소규모 병영 역할을 했다. 이러한 탑 중에서 가장 큰 것은 희봉구(喜峰口)에 세워진 것인데 놀랍게도 이 탑은 1만 명을 수용할 수 있다.

명나라의 장성 건설비용은 그야말로 천문학적이다. 1560년대와 1570년대에 성벽을 축조하기 위해 세운 예산은 은 65,000냥이었다. 그런데 성벽 공사가 대대적으로 진행되면서 1576년에 지출해야 할 경비는 은 330만 냥으로 늘어났다. 이는 16세기 후반 명나라 조정의 연수입 4분의 3을 뛰어넘는 액수이다. 흥미로운 것은 명나라 조정에서 1576년에 실제로 지출한 비용이 54,600냥뿐이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일이 생기는 것은 간단하다. 일부 학자는 만주에서 출현한 청나라17세기 초에 중국을 정복하는 바람에 명나라가 공사만 벌여놓고 비용을 지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추정했다. 16세기 말부터 명나라 군대는 사실상 기능이 정지된 상태였다. 조직이 엉성한 것은 물론 정부에서 보내주는 비용도 턱없이 부족해 청나라의 정예병이 닥쳤을 때 막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