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환의 불씨를 잘라버려야 한다>
무측천이 고대하던 황후가 되었지만 그녀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황후 자리를 손에 넣는 것 못지않게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비빈이 그녀를 제치고 고종의 총애를 얻게 되면 어렵게 차지한 황후의 자리도 위태로워지고 그녀 역시 왕 황후의 처지가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므로 황후의 자리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우선 다른 비빈들을 겁주고 굴복시켜 자신에게 비수를 꼽는 사고를 미연에 방지해야 했다.
그녀의 장점은 어떤 문제가 생길 때 순발력으로 대처하여 상황을 역전시켰다는 점이다. 또한 상황 반전을 위한 조치일수록 시간을 놓쳐서는 안 되고 그 과정이 보다 충격적이어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자치통감』에 왕 황후와 소숙비의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황후 왕씨, 숙비 소씨는 함께 별원에 구금되어 있었다. 황제께서는 그녀들을 걱정하여 간혹 그곳에 갔는데 철저히 봉쇄되어 있었다. 벽에 구멍을 뚫어 식기를 전하는 것을 본 황제는 측은한 생각이 들어 “황후. 숙비. 어디에 있소”라고 말을 건네니 왕씨는 눈물을 흘리며 “신첩들은 죄를 지어 궁비(宮婢)가 되었는데 어찌 다시 존칭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말하고 “황제께서 만약 옛정을 생각하신다면 신첩들에게 다시 광명을 보게 해주시고 이 별원의 이름을 회심원으로 해주시길 청하옵니다”라고 말했다.
황제께서 “짐이 바로 일을 처리하겠다”라고 말했다. 무측천이 이 사실을 알고 크게 노하여 사람을 보내 왕씨와 소씨에게 각각 곤장 100대를 치고 손발을 잘라버리고 잡아 묶어 술독에 넣도록 하고는 “두 계집의 뼈가 취하도록 하라”고 명했다. (중략) 왕씨는 처음 칙서를 듣고 두 번 절하고 “황제께서 만세하시길 바라옵니다. 소의가 승은을 입었으니 나는 마땅히 죽어야 하고 죽는 것은 나의 본분입니다”라고 말했다.
반면에 숙비는 욕을 하며 “요사스럽고 교활한 무측천 (그대도) 곧 이렇게 되리라. 내세에 나는 고양이로 무씨는 쥐로 태어나 세세생생 그 목을 조르게 되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중략) 뒤이어 다시 왕씨의 성을 망(蟒, 이무기)으로 소씨의 성을 효(梟, 올빼미)로 바꿨다.’
여기에서 소숙비가 왜 고양이로 태어나겠다고 했느냐이다. 이를 두고 일부 학자들은 그녀의 생년을 쥐띠 해에 맞춰 일반적으로 알려진 624년이 아니라 628년으로 계산하기도 한다. 여하튼 그 때문인지 무측천이 살아있을 때는 고양이를 황실에서 키우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소숙비의 저주를 듣고 술독에 빠진 그녀를 보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술 취한 귀신이 과연 날 찾아올 수 있겠느냐?’
다소 엽기적인 이야기이지만 『구당서』와 『신당서』에도 대동소이한 내용이 적혀있는 것은 사실이다. 단지 무측천을 묘사한 대목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무후가 그 사실을 알고는 황급히 명을 내려 두 사람에게 곤장 100대를 치고 수족을 자르고 손을 뒤로 묶어 술독 안에 넣도록 했다.’
이들 기록을 면밀히 분석한 학자들은 무측천이 왕 황후와 소숙비에게 매우 잔혹한 행동을 했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그러면서도 의심스러운 기록이 있음을 발견했다.
우선 무측천이 왕 황후의 손발을 잘랐는데 어떻게 칙서를 들었을까 하는 점이다. 둘째로는 고종이 왕 황후의 청을 받아들여 두 여인에게 밝은 세상을 보여주겠다고 했는데도 무측천이 곧바로 잔인하게 죽일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역사가들은 무측천이 자행한 행위가 워낙 잔인하고 상상을 초래하므로 역사에 기록된 여태후 사건과 동일하게 묘사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여태후가 한고조의 애첩 척부인을 증오하여 다음과 같이 그녀를 처형했다.
‘척부인의 수족을 자르고 눈알을 빼고 귀를 불로 지지고 벙어리가 되는 약을 먹여 돼지우리 안에서 살게 하고는 ’인체(人彘)’라 이름을 지어 불렀다.’
한편 『구당서』와 『신당서』의 <후비전>에는 ‘왕황후가 처음 칙서를 들었다’, ‘목매어 죽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다소 상반되는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무측천이 이들 두 여자가 권토중래할까 두려워하여 그들을 죽여 달라고 고종에게 청했고 이에 고종이 자결을 명했을 것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여하튼 이 사건은 무측천에 대항하는 비빈들이 어떻게 될 지 확실하게 보여준 시범 케이스라고도 볼 수 있다. 무측천이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는 비난은 받았지만 여하튼 그 후부터 감히 무측천과 겨루려는 비빈들은 없었다.
<권력의 핵심으로 가는 방법>
황태자는 황제의 계승자이므로 매우 중요한데 그녀가 황후가 되었을 때 황태자는 연왕 이충(李忠, 643〜664년)이었다. 그런데 그는 무측천이 황후가 되는 것을 반대한 장손무기 측의 인물이므로 그가 황제가 되면 무측천으로서는 불리해질 것이 분명한 사실이었다.
전통적인 관습에 따르면 황후에게 아들이 있을 경우 다른 사람으로 황태자를 삼지 않았다. 그런데 무측천은 아들이 있으므로 그녀의 아들을 황태자로 세우는 것이 부당한 일은 아니었다.
결론적으로 그녀는 고종을 계속적으로 공략하여 656년 태자 이충(李忠)을 폐하고 그녀의 장남인 4살짜리 이홍을 황태자로 책봉토록 했다.
무측천이 자신에게 해가 될 지 모를 여러 고비를 겪으면서 위기를 헤쳐 나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것은 역으로 그녀 때문에 피해를 본 사람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측천에게 대항하는 실질적인 세력이 거의 없었다는 것은 무측천의 용병술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이 꼭 꺾어야 할 경쟁자들과의 투쟁 과정에서 자신을 지지한 사람들의 공을 잊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을 위해 일한 사람들을 고급관리로 등용하는 길이야말로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충성하는 것이 유익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물론 관리들이 그녀의 행동을 지지하거나 묵과한 까닭은 더 많은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얻기 위해서였다. 무측천은 그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행동을 실천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녀가 황후가 되는데 큰 공을 세운 이이부와 허경종 등을 고종에 천거하여 중책을 맡도록 한 것이 한 예다.
역사 기록을 보면 이의부는 결코 덕망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고 청렴결백하거나 유능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단지 무측천이 황후가 되는데 큰 공을 세운 것뿐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의부가 파격적으로 발탁되자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비호를 받기 위해 몰려들었다.
그런데 무측천의 입지가 점점 튼튼해지는 것과 동시에 그녀로서는 생각지 못한 행운이 찾아왔다. 고종이 무측천에게 정사를 맡기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상 무측천이 아무리 능력이 있고 황제의 총애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중요한 정사를 맡긴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중국의 역사상 황제가 업무를 황후에게 공식적으로 의뢰한 적은 당나라의 고종이 처음이라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특수한 상황이 일어난 이유로 고종이 무능했고 무측천이 유능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기도 하나 학자들은 이 가설을 부정한다.
그것은 무측천이 정사에 개입하기 전에 고종이 법제를 강화하고 신하들의 간언을 적절하게 처리했고 상벌도 분명히 했다는 점으로도 알 수 있다. 또한 고종은 과단성 있게 토지 분배 제도인 균전제를 계속 시행했고 당나라가 수나라를 거쳐 새로 창업된 나라임에도 제국을 무난하게 유지해나갔다는 것을 볼 때 그가 무능한 황제는 아니었다고 평가한다.
그러므로 고종이 무측천을 국정에 참여케 한 것은 고종의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고종은 현기증으로 몸을 잘 가누지 못하고 눈을 제대로 볼 수 없다고 했는데 현대의학자들은 이는 ‘음기가 모자라고 양기가 과다함’으로 인한 만성 질병으로 완치가 어렵고 재발하기 쉬운 병이라고 설명한다.
고종이 중병에 걸려 한 달이나 휴식해도 완치가 되지 않자 자연히 그를 도와 국정을 맡아 정사를 처리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원칙적으로는 황태자가 이 일을 해야 하는데 당시 이홍의 나이는 겨우 8살이었다. 그러므로 고종이 안심하고 신임할 수 있는 사람으로 무측천을 발탁했다는 것이다.
더구나 무측천은 국정에 참여할 수 있는 기량을 갖추고 있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총명했고 임기응변에 뛰어났고 풍부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또한 비빈으로서 궁정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잘 알고 있었고 비상사태에 순발력으로 대항하는 비정함도 갖고 있었다.
당나라가 세워진지 얼마 되지 않으므로 고종이 그러한 측근을 절실히 필요로 했는데 무측천은 그런 면에서는 적격이었다. 무측천은 바로 자신의 연인이자 황태자의 모친이므로 적어도 자신의 의향에 반하는 일은 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특히 무측천은 시를 읊고 글을 쓸 수 있으므로 고종을 도와 상주문을 읽고 지시를 내리는 일에도 문제가 없었다. 여하튼 고종의 건강이 좋지 않아 엄청난 격무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고종은 황제에게 보고하는 모든 일을 황후에게 올려 그녀가 결재하도록 재가했다.
그런데 비록 황후이지만 황제를 등에 업고 국사를 논하므로 구설수가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무측천은 잘하면 본전, 잘못하다가는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하여 선수를 치는데 시간을 소비하지 않았다.
놀랍게도 그녀가 한 행동은 자신의 일가친척들을 철저하게 제거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자신의 오빠인 무원경, 무원상, 무유량, 무회운과 조카 하란민지를 모함하여 죽였다.
무측천이 이들을 제거한 것은 외척들이 권력을 독점하여 재난을 초래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므로 자신이 정사를 돌보는 것은 당나라를 위해서이지 인척들을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한 것이다.
물론 후일 자신이 황제가 되기 위해서는 외척의 힘을 이용한다. 이것은 무측천이 자신의 입지 강화를 위해 상황을 예의 분석한 후 전격적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점을 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녀는 외척들에게 어떠한 명목을 씌워서라도 죽였는데 당시 외척의 죽음은 무측천의 기대대로 그녀의 명성을 높이는데 기여했다.
‘무측천의 국정 참여는 천하를 위한 것이지 그녀의 친척을 위한 것은 아니다.’
'세계의 악당 > 세계의 악당 무측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계의 악당 무측천 (6) (0) | 2021.01.16 |
---|---|
세계의 악당 무측천 (5) (0) | 2021.01.16 |
세계의 악당 무측천 (3) (0) | 2021.01.16 |
세계의 악당 무측천 (2) (0) | 2021.01.16 |
세계의 악당 무측천 (1) (0) | 2021.0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