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악당/세계의 악당 무측천

세계의 악당 무측천 (6)

Que sais 2021. 1. 16. 20:37

https://youtu.be/AAFfb_h-X9o

<꼭두각시 예종>

예종은 고종의 여덟 째 아들이며 무측천의 막내아들이다. 그는 6626장안의 함양전에서 태어났으며 은왕으로 책봉되었고 666예왕, 66911익왕으로 책봉되었다. 중국의 많은 황제 중에서 그의 등극이 다소 이례적인 것은 6842태자 자리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황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학문을 좋아했으며 자질에 관한 한 여러 면에서 중종에 비해 뛰어났다고 평가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종이 무측천의 들러리를 서게 된 것은 자질에 있어 중종보다는 앞섰지만 무측천에 비할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무측천미모와 재치만으로 정권을 장악한 것은 아니다.

결론적으로 무측천이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은 자신의 말을 잘 듣는 사람들의 약점을 파악하고 그들을 자신의 입맛대로 요리할 수 있는 방법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당고조, 당태종 사후에 일어난 권력 다툼을 잘 알고 있으므로 고종 사후에 황제계승권을 둘러싼 잡음을 재빨리 종식시키고 자신에게 권력을 집중시키기 위해 종실의 여러 왕들을 회유, 강등, 추방, 살해하는 등 강온정책을 적절히 구사했다.

그녀가 태자에서 강등되어 파주로 쫓아버린 이현좌금오대장군 구신적으로 파견하여 살해한 것은 이현이 나라의 위기를 틈타 모반을 꾀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일부 학자들은 이현의 사망구신적의 감시가 너무나 엄하여 재기할 가망이 없자 자살했다고 주장하지만 이 역시 무측천의 지시에 의한 것임은 틀림없다는 설명이다.

그녀는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장남과 차남을 가차 없이 제거했다. 그녀가 이현의 사망에 큰 책임이 있는데도 무측천은 이현의 사망 소식을 듣고 아들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며 구신적에게 책임을 물어 직위를 강등시켰다. 그리고 이현의 죽음을 애도하고 옹왕으로 추증하면서 사건을 재빨리 종결했다.

학자들은 무측천이 불리함을 유리함으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고 설명한다.

그녀가 황제가 되는데 결정적인 도움이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에 대항한 작은 반란이었다.

685양주의 군정대권을 장악한 서경업(이경업) 무측천이 황제를 폐위시키고 대권을 독차지 했다고 거병을 선언했다. 서경업은 유명한 이세적의 손자그녀를 토벌하지 않는다면 당나라의 강산이 남의 손에 넘어가 천하가 혼란에 빠질 위험이 있으므로 황제의 신민으로써 마땅히 거병하여 황제에게 충성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자신의 거병의 당위성대이경업전격천하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제위를 찬탈하여 수렴청정하는 무씨는 사람됨이 온순하지 않고 출신이 미천하다. 이전에는 황제 침전 옆에 있는 편전에서 태종을 모셨으며 나중에 동궁에서 황음무도한 짓을 했다. 비구니가 되어 태종의 재인이었던 흔적을 감추고는 후궁이 되어 고종의 총애를 얻으려고 꾀했다. 입궁하자 질투심을 드러내고 미모로 다른 사람에게 절대 양보하지 않았으며 소매로 얼굴을 가린 채 참언을 일삼고 여우같은 애교로 황제를 유혹했다. 점차 황후 자리를 빼앗고 우리 황제(고종)를 유혹해 부자가 난륜하도록 만들었다.

(중략) 사악한 무리를 가까이 하여 충신을 잔혹하게 해치고 언니와 오빠를 도살하고 군주를 시해하고 국모를 독살했다. 신과 인간이 함께 저주할 일이고 천지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또 흑심을 품고 황제 자리를 탈취하려 하고 있다. 황제가 사랑하는 아들을 별궁에 유폐시키고 자신의 친척 무씨들에게 중책을 맡겼다.

(중략) 선제 능묘의 흙이 마르지도 않았는데 외로운 중종은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만약 전화위복이 되어 기왕의 고종을 보내고 현재의 중종을 섬겨 함께 황실을 세우는 공훈을 세워서 선제의 명을 받든다면 무릇 공을 세운 자에게는 작위와 상을 내릴 것임을 산하에 두고 맹세한다.‘

 

격문은 먼저 무측천의 죄상을 하나하나 따져 무측천을 동궁을 더럽힌 요부, 충신을 잔혹하게 살해한 살인악마,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나라를 훔친 도적으로 부각시켜 백성들의 분노를 격발시키고 있다.

위의 격문이 모두 을 적었다고 볼 수 없지만 서경업은 재빠르게 세력을 키워 열흘 만에 10여만 명의 군사를 모았고 초창기 무측천의 관군이 일부 전투에서 패배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측천은 곧바로 토벌부대를 30만 명으로 재정비하고 반란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일에 앞장섰다. 우선 서경업 반란군에 협조한 양주, 초주 지역 백성들의 죄를 사면하고 그들에 협조했던 사람들은 비록 왕이라 할지라도 공과를 전혀 묻지 않겠다고 했다. 그리고 서경업의 머리를 바치는 사람에게는 3품 관직과 비단 5,000, 기타 반란군 수뇌의 머리를 바치는 사람에게는 5품 관직과 비단 3,000을 포상한다는 조서를 반포했다.

이와 같은 무측천의 파격적인 당근의 영향으로 결전의 날에는 반란군보다 관군의 사기가 오히려 높을 정도였다. 더구나 관군은 30만 명인데 반군은 10만 명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서경업거병한 지 3달 만에 진압되었다.

688월왕 이정과 이충 부자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거병한지 단 20여 일도 되지 않아 실패했다. 이들이 반란에 실패한 것은 무측천이 장악하던 종실의 여러 왕들의 지원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유효적절하게 당근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단 반란을 완전히 진압했다고 생각하자 무측천의 후속 조치가 그야말로 상상을 초래한다. 그녀는 반란군들을 제압하기 위해 제시했던 당근들을 모두 철회하고 초창기 반란에 협조한 한왕 이원가, 노왕 이영기 등을 협박하여 자결케 하고 그들의 일당들을 모두 처형했다.

반란까지 완전히 진압되었으므로 이제 무측천에 반대할 사람은 없었다. 무측천의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황제 등극 준비>

무측천의 생애는 그야말로 화려하다. 그녀는 두 번 황궁에 들어가 28년 동안 황후, 6년 동안 태후, 15년 동안 여성 황제로 있었다. 그 중에서 40여 년 동안은 정치에 참여하고 대권을 장악하여 중국 천하를 통치했다.

그렇다면 그녀가 40여 년 동안 중국을 통치하면서 궁극적으로 유일한 여성 황제가 될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알려진 것처럼 그녀의 탁월한 미모와 자질로만 여성 황제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는 역으로 말하면 그녀가 세기의 악당으로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자질은 물론 커다란 오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측천이 황제가 되려는 생각을 언제부터 했는지 알려주는 역사 기록은 없지만 예종 대신에 국정을 보면서 그녀에게 성모신황이란 존호를 제시하자 흔쾌히 받아들였다는 것을 보아 이미 이때부터 그녀의 목표는 황제 등극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무측천은 곧바로 자신의 계획을 실천에 옮기려하지 않았다.

그녀는 중국 최초의 여성 황제가 되기 위해서는 여건 조성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가 구사한 방법은 그야말로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이율배반적인 방법이었다. 우선 그녀는 여러 혁신적인 정책들을 반포하여 세상이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조성했는데 그 중 주목할 것은 과거제도를 개혁하여 인재를 발탁하는 것이다.

그녀는 과거제도를 보다 보완했고 인재 추천을 독려하거나 스스로를 천거하게 했다. 상벌을 분명히 했으며 관리들을 독려하고 감시할 사자들을 수시로 파견했다. 그녀에게 몰려드는 간언도 긍정적으로 해석하여 현자들이 자신이 통치하는 제도권으로 들어오는 것이 결코 불리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녀는 과거제를 통해 선발한 인원수를 증가시키는 동시에, 황제 앞에서 과거시험을 치르는 전시제(殿詩制)를 설치하여 과거제 체제의 위상을 높였다. 그녀가 택한 인재 등용 방법은 여러 가지다.

 

자거(自擧) : 스스로를 추천하는 것으로 천하의 인재들이 출신을 불문하고 모두 능력을 자랑할 수 있으며 합격하면 바로 채용함.

 무거(武擧) : 유능한 무관을 선발함.

시관(試官) : 공개 채용으로 관리의 소질을 보증토록 함.

제과(制科) : 특별한 능력을 지닌 인재는 특별 선발.

사회 최하층의 사람이라도 당 사회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발탁.

관원들이 유능한 인물을 추천하는 것을 장려함.

 

이때 뽑힌 사람들을 북문학사(北門學士)라 부르는데 이들이 무측천의 친위 집단이다. 그런데 이들은 나름대로 특권을 부여받았다. 원래 관리가 궁궐에 입궐할 때, 주작대로를 중심으로 하는 궁궐 남문으로 입궐하는데 반해 북문학사들은 북문을 통해 들어왔다. 이런 조처는 이들이 꽁꽁 뭉쳐 나름대로 무측천에 충성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무측천파격적인 관리인사 제도의 핵심은 인재들이 학벌과 문벌에 구애받지 않고 관직에 오를 수 있다는 점이다. 한편 근무에 충실치 못한 관리들을 좌천시키거나 심지어 처형까지 했다. 그녀는 적인걸, 이소덕, 요숭, 소량사, 장간지 등 청렴하고 능력 있는 재상들을 발탁해 정치의 중심으로 삼았다.

후대 역사가들이 무측천의 통치당 태종정관의 치를 잇고 당 현종개원의 치를 낳은 무측천무주의 치(武周之治)라 평할 정도다. 여하튼 무측천이 세운 주나라가 멸망하고 당이 재건됐을 때 활약한 명신 중 상당수가 이 때 그녀의 획기적인 인재선발 정책을 통해 관계에 진출했던 인물들이다.

송나라부터 더욱 발전하기 시작한 과거제는 중국 제국이 오랫동안 유지되는 비결 중 하나였다. 과거제는 관직 임용에 출신보다는 능력을 우선하여 우수한 인력이 황제를 위해 봉사할 수 있도록 만든 제도적 장치였다.

또한 일반 서민들에게도 사회적 상승의 숨구멍을 터줌으로써, 사회적 안정을 통해 제국의 질서가 탄탄한 토대위에서 유지되게 됐다.

무측천이 중국에 미친 영향은 그녀의 통치때부터 비로소 중국의 지배층과거제를 통해 관료를 역임했거나 예비적인 관료군으로 올라선 사대부에 의해 구성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측천무후의 정책이 이후 중국의 역사를 움직인 지배층의 기본 뿌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이들 지배층은 실제로 토지나 상업 자본과 같은 경제적 기반을 바탕으로 형성됨으로써, 세 가지의 다른 얼굴, 지주-상인-지식인의 면모를 동시에 지녔다. 이처럼 토지-상업자본-학식이 결합된 지배층의 기반이 과거제 등을 확립되면서 전제 왕정은 장기간 비교적 안정되게 유지될 수 있었다.

특히 언로를 넓혀 등문고(登聞鼓)를 설치하여 억울한 사람들이 신고토록 하는 것은 물론 무측천 자신이 직접 신궤라는 책을 집필했다. 신궤는 한 마디로 관리들이 덕과 재능을 겸비하고 군주에 충성하고 백성을 사랑하면서 사명감으로 직무에 충실하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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