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악당/세계의 악당 무측천

세계의 악당 무측천 (5)

Que sais 2021. 1. 16. 20:36

https://youtu.be/X4S5e_3hH7E

<권력을 위해 아들의 희생은 당연>

왕 황후를 제거하기 위해 자신의 딸을 죽인 무측천은 자신의 권세와 위치를 유지하기 위하여 인척들을 이용했다.

문제는 그녀의 친아들들도 그녀의 원대한 계획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무측천에게는 이홍(李弘), 이현(李賢), 이철(李哲, 李顯), 이단(李旦)이라는 4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녀는 처음에 황태자 이충(李忠)을 대신하여 자신의 아들인 이홍을 옹립했다. 이홍은 착하고 온순한데다 겸손의 미덕까지 갖추고 있어 고종과 여러 대신들의 신임을 받았다. 그 후 고종은 건강이 점점 악화되자 황위를 그러한 이홍에게 물려주려고 했으나 무측천은 생각을 바꾸었다.

자신이 공들여 닦아놓은 권력의 기반을 송두리째 아들에게 뺏기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홍은 자기의 말을 잘 듣는 편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러한 이홍이 황제가 되면 자신의 정치적 야망은 물거품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였다. 권력이냐 자식이냐의 양자택일의 중대한 기로에 선 무측천자식을 버리고 권력을 택하였다.

675, 고종, 무황후, 태자 이홍이 같이 식사를 했는데 태자 이홍피를 토하고 그 자리에서 죽었다. 무황후가 자신의 아들에게 독이 든 술을 먹인 것이다.

그런데 이홍의 사망에 관한 한 약간의 이론이 있다. 우선 황태자 이홍의 죽음을 적은 사료 간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구당서에는 기해일에 황태자 이홍이 합벽궁의 기운전에서 죽었다상원 2(675)태자가 합벽궁으로 수행을 했다가 자살했는데 스물네 살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반면에 신당서에는 기해일에 천후가 황태자를 죽였다소숙비의 딸 의양공주와 선성공주가 액정에 감금되어 거의 마흔 살이 되도록 시집을 못 가고 있었다. 태자 이홍이 황제에게 말씀드리자 황후가 노하여 이홍을 짐주로 독살했다라고 적었다.

그런데 자치통감에는 보다 구체적으로 이홍의 사망을 적으면서 무측천이 살해한 것이 아니라 그런 설이 있다고 다음과 같이 적었다.

 

태자 이홍은 어질고 효성스러웠으며 겸손하고 근면해 황제께서 그를 매우 사랑했다. 사대부를 예우했고 중외가 모두 심복했다. 천후가 뜻을 펴려하자 태자는 여러 차례 뜻을 거스르는 주청을 해 천후의 총애를 잃게 되었다. 의양공주와 선성공주는 모두 소 숙비의 딸로 소 숙비가 미움을 사 처벌을 받자 액정에 감금당해 서른 살이 넘도록 시집을 못 갔다(이 역시 당시 고종의 나이를 감안할 때 문제가 있음). 태자는 그녀들을 보자 한층 더 측은한 마음이 생겨 시집보낼 것을 주청했고 황제께서 그것을 허락했다. 천후는 화를 내고 그날로 공주들은 상익위 권의, 왕수고결혼시켰다. 기해일에 태자는 합벽궁에서 죽었는데 당시 사람들은 천후가 그를 짐주로 독살시킨 것으로 생각한다.’

 

위의 설명에 의하면 구당서자살, 신당서무측천의 독살, 자치통감무측천이 이홍을 살해하는데 개입했을 가능성을 언급했다.

구당서에서 이홍이 자살했다는 것은 원래 그의 건강이 워낙 나빠 자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이홍은 어려서 많은 공부를 했기 때문에 건강이 나빴다는 것은 여러 자료에 나타난다.

태자 이홍이 고종을 따라 합벽궁으로 피서를 갔을 때 중병에 걸려 한 차례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병세가 호전되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홍이 완쾌된 것으로 생각한 고종은 이홍에게 선양하겠다고 했다.

무측천으로서는 그야말로 악몽이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이홍에게 정말로 황제위가 돌아간다면 무측천으로서는 자신이 세워둔 원대한 계획에서 차질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이홍이 건강 때문에 자살했든 아니든 무측천이 이홍의 사망에 개입한 것은 사실로 인식한다.

그런데 또 다른 자료도 있다. 이홍이 측천무후심기를 건드려 독살 당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이홍의 사후, 당 고종과 무후는 크게 슬퍼하며 이홍 의종(義宗) 효경황제(孝敬皇帝)추존했다는 점이다. 아들이 부모를 추존하는 일은 관례나 마찬가지이지만 부모가 아들을 추존하는 일은 특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홍황태자가 된 뒤 과로사했다는 해석도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고종의 사망과 가까워진 최고 권력>

675이홍이 죽은 지 한 달 후에 이현(李賢)태자에 책봉되었다. 그런데 이현도 형 이홍에 못지않을 정도로 총명하였을 뿐 아니라 정치적 역량도 뛰어났다. 더욱이 재상들이 주변에서 그를 잘 보좌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측천은 다시 권력을 잃을지 모른다는 위기를 느꼈다.

결국 무측천은 다른 사람을 교사하여 태자여색을 탐한다고 모함하게 하였다. 6808이현태자의 신분을 박탈당하고 폐서인 되었다가 수도 장안에서 무려 1,000킬로미터 떨어진 파주로 추방되었다. 다소 뒤의 일이지만 6852월에 무측천은 파주로 좌금오대장군 구신적을 보내어 이현을 죽이도록 했다.

이현이 폐서 된 이튿날 고종의 일곱째 아들이자 무측천의 셋째 아들인 이현(李顯)태자에 책봉되었는데 고종이 68312낙양궁 정관전에서 56살의 나이에 사망했다. 고종은 다음과 같은 유조를 내렸다.

 

7일 동안 장사를 지낸 후 태자는 영구 앞에서 황제로 즉위하고 장례는 단출하고 검소하게 치르며 결정하기 어려운 나라의 군국대사황후가 처리하도록 하라.’

 

고종은 유조로도 분명하게 무측천의 국사 참여를 허가했다. 이현황제(중종)가 되자 무측천은 자동적으로 황태후가 되었다. 중종65611월 장안에서 태어났고 67710영왕으로 책봉되면서 이름을 이현에서 ()개명했다. 그는 고종의 유조대로 2일 후 고종의 영구 앞에서 황제로 즉위했는데 그때 나이 28세다.

그런데 이현이 황제로 즉위했을 때 고종의 상중이므로 곧바로 국정을 담당할 수 없게 되자 정사는 주로 황태후인 무측천이 담당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고종의 능건릉(乾陵)을 조성하는데 심혈을 기우렸다.

중국의 역대 제왕들의 능은 대체로 두 가지 형식을 갖고 있다. 하나는 퇴토성릉(堆土成陵)이고 다른 하나는 인산위릉(因山爲陵)이다. 퇴토성릉은 평지에 흙을 쌓아올려 작은 산처럼 만드는 것으로 진시황릉이 바로 이 형식이다. 인산위릉은 산을 뚫어 관을 안치하여 산 자체를 능으로 하는 것으로 비교적 늦게 출현하였는데 한 문제패릉(覇陵)이 대표적이다.

당고조의 능헌릉은 고조의 유조에 따라 퇴토성릉의 형식을 취했다. 당태종도 처음에는 인산위릉을 반대했으나 산의 중턱을 파서 무덤으로 만드는 것이 여러 면에서 유익한 점이 많다며 구종산을 뚫어 자신의 능인 소릉을 만들었다.

무측천은 당태종의 예를 볼 때 인산위릉퇴토성릉보다 높고 웅장하며 범접할 수 없는 견고함을 지녔다고 생각해 고종의 능인산위릉으로 조성토록 했다. 고종의 능은 풍수지리 등을 고려하여 해발 1047.9미터인 양산에 건릉을 조성했고 6845예종영구를 호송했다.

그런데 이때 고종의 영구를 호송한 것은 중종이 아니라 예종이다. 2월에 무측천에 의해 중종이 폐위되고 예종이 즉위했기 때문이다.

중종은 아주 나약했기 때문에 무측천은 그를 조종하는 것이 매우 수월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중종은 황제에 즉위한 후에 황태후가 된 무측천을 안중에 두지 않고 자신의 장인 위현정재상에 임명하였다. 중종이 처가를 위한 일이었는데 고종이 임명한 고명재상 배염이 반발하자 중종은 자신에 찬 어조로 그에게 말했다.

 

"내가 천하를 모두 그에게 주었는데 어쩌겠단 말이오?"

 

배염무측천에게 달려가서 사실을 그대로 보고하였다. 이 말을 듣고 화가 난 무측천은 즉각 대신들을 건원전에 소집하여 중종을 폐위시켜 여릉왕으로 강등한 다음 그를 궁궐 깊숙한 곳에 유폐시켰다. 중종이 황제가 된 지 고작 55 후의 일이다.

무측천의 부하들이 중종을 옥좌에서 끌어내리려고 하자 내가 무슨 죄가 있느냐?고 항의했다.

무측천의 대답은 간단했다.

네가 천하를 위현정에게 주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러고도 죄가 없단 말이냐?”

중종의 실수는 간단하다. 고종의 유지에 분명히 어려운 국사무측천처리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므로 중종을 폐위하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어려운 국사 중에 하나였다. 당시의 신하들은 모두 고종이 임명한 사람들이므로 무측천이 쿠데타 아닌 쿠데타를 벌일 때 어느 누구도 항의하지 않았다.

중종은 무측천이 즉각적으로 자신을 폐위할 정도의 직격탄을 벌일 줄 몰랐지만 이미 엎지러진 물은 담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무측천은 중종을 유폐시킨 후 자기의 막내아들 이단, 예종황제로 옹립했다.

이때부터 그녀는 예종의 정사 참여를 원천적으로 배제한 채 조정의 대소사직접 관장하면서 자신의 다음단계 즉 대권을 독점하기 위한 계략을 착착 준비한다.

 

'세계의 악당 > 세계의 악당 무측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계의 악당 무측천 (7)  (0) 2021.01.16
세계의 악당 무측천 (6)  (0) 2021.01.16
세계의 악당 무측천 (4)  (0) 2021.01.16
세계의 악당 무측천 (3)  (0) 2021.01.16
세계의 악당 무측천 (2)  (0) 2021.0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