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악당/세계의 악당 무측천

세계의 악당 무측천 (7)

Que sais 2021. 1. 16. 20:39

https://youtu.be/Ydv0Z18R2LI

<혹리 세상>

그러나 무측천의 놀라운 점은 바로 역지사지를 주무기로 삼았다는 점이다.

그녀는 인재 발탁을 파격적으로 표명하면서 자신의 권력을 보다 공고히 하기 위해 중국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혹리(酷吏)들을 조장하는 이율배반적인 정책을 채택했다. 혹리는 잔인하고 포학하며 형벌을 남용하는 관리를 말한다. 이점이 바로 무측천으로 하여금 세계의 악당으로 당당하게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결정적인 오점이 된다.

무측천개혁정치를 구사하면서도 혹리들을 등장시킨 것은 그녀가 황제가 되기 위한 원대한 계획 중에 하나였다.

반란이 진압되자 모든 방법을 동원해 반란에 동조한 사람들은 물론 가능성 있는 정적들을 제거하는데 주력했다. 그러므로 무승사가 황실의 왕들과 공경대부 가운데 승복하지 않는 자는 모두 주살해야 한다라고 건의하자 이의를 표시하지 않았다.

그런데 반란을 일으킨 자나 그들과 동조한 사람들을 파악하여 제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황궁 안팎이나 전국 각지에 숨어있는 정적들을 제거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 방법이 바로 악명 높은 혹리이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혹리를 이용하더라도 그녀는 명분을 만드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것은 혹리들이 법률에 근거하여 악행을 저지르도록 사주하는 것이다. 전제군주 시대의 법은 최고 통치자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도구이므로 그녀가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즉 그녀 자신이 최고통치자이므로 자신과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법률을 사용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당률에서 합당한 구실을 찾았다.

 

모든 모반자와 대역무도한 자는 참수한다. 16세 이상 부자는 목을 매어 죽이고 15세 이하 및 모녀, 처첩, 형제, 자매, 조손 그리고 부곡, 자재, 전택은 관아에서 몰수한다. 백숙부형제의 아들은 모두 3,000리 밖으로 유배시킨다. 호적의 같고 다름은 상관하지 않는다.’

 

이것은 자신이 제거하고 싶은 반대파에게 무조건 모반이라는 딱지만 붙이면 제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측천은 자신이 하는 행동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자신이 빠져나가야 할 방법을 강구해야 하는데 그녀는 그 방법을 알고 있었다. 바로 밀고자이용하는 방법이다.

무측천684년부터 밀고를 장려했다. 그 당시 밀고가 얼마나 성행했는지는 다음 예를 보아도 알 수 있다. 무측천중종을 폐위하고 예종을 옹립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이다.

 

호위병 10여 명이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 한 사람이 이러다가 평생 별다른 상훈도 받지 못하겠다. 아예 여릉왕을 모시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고 했다. 그 자리에 있던 한 사람이 밖으로 나가 밀고했다. 호위병들이 술자리를 파하기도 전에 모두 체포되었다. 술김에 불평한 자는 곧바로 참형을 당했으며 밀고하지 않은 자도 모두 교살 당했다. 밀고자5품관에 제수되었다.’

 

무측천의 밀고에 대한 의지가 얼마나 높았는지 밀고자는 언제든지 무측천을 만날 수 있었다. 그녀는 밀고한 말이 마음에 들면 관직을 곧바로 내렸으며 사실이 아닐지라도 문책하지 않았다.

일부 학자들은 원래 무측천이 혹리를 매우 싫어했지만 정적을 제거하고 통치를 공고히 하기 위한 필요성으로 혹리들을 사용했다고 두둔하기도 한다. 그러나 중국 역사상 240여 명의 황제들이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여러 가지 적합지 않은 방법을 동원했지만 무측천과 같이 거의 광신적으로 혹리들을 사용한 것은 아니다.

그녀가 혹리들을 우대한 원리는 간단하다. 그들이 어떤 짓을 해도 상관하지 않는 대신 자신이 갖고 있는 밥, 황권에 도전할 수 있는 사람들을 모두 제거해달라는 것이다.

중국 역사에서 유명한 혹리로 거명되는 색원례, 주홍, 래준신 등도 이때 나타난 사람들이다. 색원래의 경우 무섭기가 호랑이나 늑대보다 더했다고 알려졌는데 무측천은 그를 여러 번 불러 상을 내리기까지 했다.

주홍소대가리 왕어미라는 별명으로 불렸는데 그것은 그의 심문이 매우 혹독했기 때문이다. 그는 불에 달군 항아리로 고문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특히 피고가 묻는 죄과에 대해 모두 억울하다고 하는데 처결된 후에는 말하려 해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라는 판결문으로 유명했다. 래준신색원례와 주홍보다 약간 후대 사람이지만 이들보다 더 악명 높은 혹리가 되었다.

혹리의 만행이 얼마나 심했는지는 다음 예를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죄없이 누명으로 체포된 고관대작들이 자신의 죄를 승복할리 만무였다. 그러나 혹리들에게는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바로 고문이었다. 래준신은 무측천의 입맛에 맞게 유명한 대형항쇄죄인의 목에 씌우는 칼을 발명했다. 대부분의 죄수들은 대형항쇄만 보고도 혼비백산하여 순순히 자백했다.

 

형틀에 수족을 묶어 돌리기도 하고 허리를 고정시키고 머리를 끼운 형틀만 앞으로 끌고 나가도록 하기도 했다. 앉은 채로 항쇄에 꽁꽁 묶어놓고 그 위에 벽돌장을 올려놓기도 했고 높은 나무 위에 세워 놓고 항쇄로 뒤로 잡아당겼다. 거꾸로 매달거나 목에 무거운 돌을 달거나 콧구멍에 식초를 부어넣거나 혹은 철띠를 목에 둘러 항쇄를 옥죄기도 했다.’

 

이들의 고문이 어찌나 효과가 있었는지 죄가 있다고 자백한 사람들은 실제로 거의 전부 무고한 사람이었다고 자치통감에서 적을 정도였다. 이것은 모반자가 아닌 사람들도 고발만 있으면 어김없이 모반죄를 물어 처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심지어는 다음과 같은 글도 있다.

 

고관대작들이 목이 잘린 채 도륙당해 길바닥 이곳저곳에 널렸다.’

 

그녀가 제거하려는 궁극적인 목표물당나라의 원로들이었다. 그들은 태종, 고종 시대를 거쳤으므로 무측천의 실상약점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자신의 미래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으므로 혹리들이 그들을 함부로 다루어도 전혀 제재하지 않았다.

워낙 많은 중신들이 심지어는 조정에 나갔다가 참살되기도 했으므로 조정대신들은 조정에 나갈 때마다 가족들에게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무측천의 당시 악행이 얼마나 높았는지 명나라 시대의 호응린(胡應鱗)동서고금에 둘도 없이 악하다라고까지 평했다. 학자들은 이 설명이 결코 과장되었다고 보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사건이 무측천 시대에만 유일하게 자행된 것은 아니라고 두둔하는 학자들도 있다. 수양제가 자신의 아버지와 형제를 살해하고 당태종이 자신의 형과 동생을 주살한 일 역시 잔혹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측천만 천하의 악당이라고 비난받는 것은 불공평하다는 지적도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무측천처럼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자신의 딸의 목을 직접 졸랐으며 아들들도 가차 없이 살해하고 자신을 수족처럼 따랐던 신하들을 거의 전부 살해한 예가 흔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무측천이 이런 공포시대를 꾸준히 지속했기 때문에 중국 역사에서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여성황제가 되었다는 설명도 있다. 구당서에서는 무측천혹리를 활용했기 때문에 궁문 밖으로 나오지 않고도 천명을 이어받았다고 적었다.

 

<여자도 황제가 될 수 있다>

무측천은 자신이 황제가 되는 데는 결정적인 하자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중국 역사상 여자로 황제가 된 예가 단 한 건도 없다는 점이다.

중국의 조문윤 박사는 중국에서 간혹 무능한 군주를 보필하거나 어린아이를 품고 정사에 관여한 사례는 있었지만 여성이 관료가 되어 직책을 갖고 권리를 행사한 적은 없었다고 적었다. 물론 궁궐의 내직과 정사는 무관하다.

중국에서 653년 당나라에서 농민봉기를 일으킬 때 진석진문가황제(文佳皇帝)라 칭한 적이 딱 한 번 있었는데 그녀는 도적으로 몰려 진압 당했다. 현대 학자들도 그녀가 왕조를 통치한 적이 없기 때문에 황제로 공인하지 않는다.

무측천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여자도 황제가 되는 것이 순리라는 논리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의 시경, 서경, 예경, 역경, 춘추는 물론 도가의 도덕경에서는 남존여비를 조장하는 등 여성의 정치참여를 불허하는 계율만 있었다.

예컨대 서경에는 암탉은 새벽을 알리지 못한다. 암탉이 새벽을 알리는 것은 가정이 망할 때뿐이다.’라고 적었고 시경에는 부녀자는 공무에 참여하지 말고 양잠과 방직을 훌륭히 해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

무측천이 황제가 되는데 결정적인 자료를 찾지 못해 위기에 봉착했지만 역사는 역시 무측천의 편이었다. 설희의와 법명 등이 불교 경전에서 여자가 왕이 될 수 있다는 논리를 찾아낸 것이다. 대방등무상대운경 줄여서 대운경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었다.

 

정광(淨光)이란 천녀가 있다. (중략) 부처님이 정광 천녀에게 이르길 너는 잠시 나의 대열반경을 들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지금 천상의 몸을 얻었다. 내가 속세를 떠날 때 (너는) 심오한 뜻을 다시 듣고 천상의 몸을 버리고 여자의 몸으로 왕이 되어 전륜왕이 통치하던 사방 중의 하나를 얻게 될 것이다. (중략) 그때 너는 실제로는 보살이지만 중생을 위해서 여자의 몸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구당서, 신당서, 자치통감 등은 대운경을 위조된 경전이라고 적었다. 그러나 대운경은 무측천 이전에 존재했던 경전이고 설희의 등이 무측천에게 대운경을 제출한 것은 후진 시대. 돈황에서 발견된 대운경소의 잔여본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경에서 이르기를 여성이 나라의 왕이 된다고 했는데 오늘날 신황이 바로 속세에 구세주로 온 사람이다. 또 경에서 이르기를 여성이 사직을 이어받아 천하에 군림하니 천하의 모든 나라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명을 거역하는 자가 없더라. 이로부터 대신과 백성들이 충성을 다한다면 자손이 번창하고 편안한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 만약 배반하여 반역을 괴하는 자가 있으면 나라가 주살하지 않더라도 하늘이 천벌을 내려 자멸케 할 것이다.‘

 

한 마디로 더할 수 없이 높고 무상한 부처님성모신황에게 천명을 내려 그녀로 하여금 왕조를 바꾸어 동방 세계를 통치하게 한다는 것이다. ‘부처님의 뜻이기 때문에 어겨서는 절대 안 되며 부처님의 힘은 지극히 높아 미치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에 어기는 자는 기필코 멸망한다는 뜻도 갖고 있다.

더구나 당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이 불교를 숭배했으므로 여성이 왕이 되었다는 불경의 논리는 새 왕조를 위한 근거를 제시하는데 적절했다. 그러므로 그녀는 자신은 널리 중생을 구원해주는 미륵이 재래한 것이라고 선전하면서 그 일환으로 돈황의 막고굴에 있는 96굴의 미륵대불 등 불사를 일으켰다. 또한 용문석굴의 대불그녀의 모습을 본 땄다고 알려진다.

더욱이 그녀의 집안은 독실한 불교 신자로 위선적으로 불교를 이용한 것은 아니라는 설명도 가능했다. 그녀는 황제가 되기 전에도 수많은 절을 축조한 실적이 있었으며 소림사가 퇴락한 것을 보고 복원을 명령했으며 685대덕이 지은 방광대장엄경의 서문을 직접 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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