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악당/세계의 악당 무측천

세계의 악당 무측천 (8)

Que sais 2021. 1. 16. 20:42

https://youtu.be/GfthAXCXebE

<주나라 건국>

69099무측천은 예종에게서 황위를 넘겨받아 당나라()나라로 바꾸고 장안에서 신도(新都)로 이름 지은 낙양으로 천도하면서 연호를 천수(天授)로 바꾼다고 선포했다. 신하들은 무측천에게 성신황제(聖神皇帝)'라는 존호를 올렸다.

역사는 이 시대를 무주시대, 즉위를 무주혁명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상고시대의 주나라와 구분해 이때의 주나라를 무주(武周) 혹은 후주(後周)라 불렀다. 중국 최초이자 유일한 여황제예종황사로 강등되어 무씨 성을 내려 받고 예전처럼 동궁에 거처하며 황태자의 예우를 받았다. 무측천은 황관을 쓰고 용포를 걸치고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성 황제가 된 것이다.

무측천이 로 바꾼 이유는 두 가지.

우선 자신의 족보를 대외적으로 확실하게 공표한다는 것이다. 고종무측천의 아버지 무사확주국공(周國公)으로 봉했다. 아버지가 주국공이었으므로 국호를 로 한 것은 자신의 가문에서 나라가 세워졌다는 것을 뜻한다.

또 다른 이유는 나라태평성대를 이루었으므로 이를 본받아 새로운 기적을 만들겠다는 뜻이다.

낙양을 수도로 정한 이유는 낙양이 수도로서 좋은 조건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낙양은 좌측으로 성고 즉 지금의 하남성 사수 서북 지방을 끼고 있고 우측으로 민지가 있으며 전면에 숭산이 있다. 또한 뒤에는 큰 강이 있어 이른바 천지의 중앙으로 음양의 기운이 모이고 사통팔달한 지역이며 문물이 번창한 지역이었다라고 평할 정도로 풍수지리에도 적합했다.

요컨대 무측천새 왕조를 건립하면서 천명한 것들은 모두 사전에 심사숙고한 결과였다. 여자가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황제가 되자 모든 면에서 과거와는 달라야 했다. 우선 종실이 달라졌다. 과거에는 당나라를 세운 이연 계통이 종실이지만 이제는 무씨가 종실이었다. 예종황사로 삼으면서 무씨 성을 갖도록 한 이유.

황제가 되자 과거와는 달리 자신이 허락하는 한도에서 외척나라 틀 안에서 활동하도록 했다. 그러나 일부 외척들에게 재상 등 고관의 직책을 주면서도 그들을 통제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당나라 초기 왕들은 봉읍에서 나오는 조세를 모두 왕가에서 징수했지만 무측천은 왕들이 정해진 액수 외에 강제로 착취하는 것을 막기 위해 주현에서 조세를 걷어 왕들에게 보내도록 했다. 소위 봉급을 주고 그녀가 지급하는 액수 한도 내에서 생활토록 한 것이다.

황제가 된 후 그녀는 모든 면에서 자신감을 보였다. 객관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무측천이 황제가 된 후의 기간중국 역사상 가장 안정되고 화려한 시기로 정치경제사회가 모두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그녀의 통치가 다른 황제들보다 결코 나쁘지 않다는 것은 경제상황이 매우 좋아졌다는 점이다.

농업 생산 발전을 위해 변방지역에서 군사적인 성격을 띤 둔전(屯田)과 영전(營田)을 실행하여 두드러진 성과를 얻었다. 이들이 각 지역에서 정착되자 먼 지역에서 군량미를 수송하는 어려움이 사라졌으므로 운송에 따른 백성들의 혹사와 물자 낭비를 줄일 수 있었다.

양주의 경우 둔전의 성공에 따라 몇 년간 풍성한 수확을 거두자 곡식 가격이 하락했고 1필의 명주로 10곡의 양식을 살 수 있었으며 수십 년 동안 먹을 수 있는 군량미가 비축될 수 있었다고 적었다.

그녀의 통치기간68312월부터 중종이 복위하는 705년 정월까지 대략 21인데 이 동안 농업 생산량과 인구가 획기적으로 늘었다.

652년 당나라의 호구수는 385만 호였으나 705년에는 6156,141호였고 인구는 3,714만 명에 이르렀다. 50여 년 만에 인구가 거의 두 배나 된 것이다. 당연히 수공업과 상업과 문화는 물론 교통이 발전했으며 그녀의 치세동안 중국의 영토가 가장 크게 확장되었다.

물론 무측천 시대에 모든 것이 원만하게 돌아간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당태종과 후일 예종의 아들이자 무측천의 친손자현종 시대에 비교할 정도로 상황이 좋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그녀가 일단 집권한 후에 비교적 통치를 원만하게 잘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측천이 잘 알려진 것은 그녀가 측천문자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완전 다른 문자를 만들어낸 게 아니고 그냥 한자의 제작 원리에 따라 한자를 여러 추가한 것이지만 이 문자가 신라에서도 발견될 정도로 상당한 범위에서 활용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 문자의 문제는 기존 한자보다 획수가 더 많고 복잡하여 무측천 시대가 끝나자마자 사멸한다.

그녀는 유달리 문자에 집착하는 성향을 보였는데 이름 바꾸기를 매우 즐겼다. 36부를 근간으로 하는 당나라의 관제는 그대로 두고 이름만 바꾸는가 하면 정적들의 성씨를 나쁜 뜻의 글자로 고치기도 했다. 왕 왕후의 성을 망(, 이무기)으로 소숙비의 성을 효(, 올빼미)로 바꾼 것도 그 예이다.

그런데 보통 황제들의 시호는 한 글자 또는 두 글자가 일반적이었으나 무후가 집권하면서 고조와 태종, 고종의 시호를 대폭 늘리는 바람에 시호 인플레가 벌어져 당나라부터는 부득이 묘호 연호황제를 통칭하게 되었다. 그리고 15년도 채 되지 않는 재위 기간 동안 연호14차례나 바꾸어 역사가들의 골머리를 앓게 했다.

 

<남총은 내가 거느린다>

무측천이 다른 사람과 다소 다르다는 것은 여자로서 황제가 되었으므로 매사가 과거와 다르다는 것을 직시했고 그것을 마음껏 즐겼다는 점이다. 그녀는 옥좌 앞에 문무 대신들이 무릎 꿇고 엎드리는 것을 즐겨했지만 신체 건장한 미남자들 즉 남총들이 그녀의 치마 아래 엎드려 절하는 것도 좋아했다.

그녀의 생각은 명쾌했다. 과거 남자 황제수많은 비빈들을 거느렸으므로 자신이 많은 남총들을 거느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측천만년의 남총으로 설회의, 장창종, 장역지 형제 등이 자신의 공식적인 남총이라는 것을 공개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또한 봉신부(奉宸府)를 만들었는데 일본의 택전서수(澤田瑞穗) 박사는 봉신부가 무측천의 오락을 위한 고급 클럽이라고 설명했다. 그녀가 남창들을 거느리는 것에 대해 전혀 거리낄 것이 없었다는 것은 다음의 일화로도 알 수 있다. 당시 우보궐 주경측이 다음과 같은 상소를 했다.

 

폐하께서 총애하는 장역지와 장창종으로 충분하데 최근에 우감문위장사 후상 등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자신의 성기가 크다며 봉신 안에서 시봉하고 싶어 한다는 말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간언을 올리는 것이 신하의 직분이므로 감히 폐하께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측천주경측의 상소에 전혀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그의 직언을 칭찬하고 채주 100단을 상으로 내리기까지 했다. 그렇다고 그녀가 남총을 좋아하는 것마저 중단한 것은 아니다.

당나라 사람들의 개방적인 생각의 일단을 보여주는 기록이라고도 평하지만 무측천의 이러한 행동은 자신이 과거에 태종과 고종의 비빈이었던 것에 반발로 보는 사람도 있다.

그녀는 남총들에게 둘러 싸여 있으면서도 어려운 국정을 직접 챙겼고 틈틈이 저술과 시를 지었으며 글씨도 썼다. 그녀의 시문집은 무려 100여 권이나 되는데 문장술이 당대의 어느 작가와도 비견할 수 있을 정도로 탁월하다고 중국인 사원량(謝元量)이 평가하기도 했다.

무측천80세의 고령에도 여전히 젊은 시절의 용모를 유지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신당서에서는 그녀를 일러, ‘나이가 많이 들어서도 자신을 잘 가꾸어 측근들조차 그녀가 노쇠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고 하였다.

무측천이 사용한 미용 비방은 후세에 당대 관청에서 편찬한 약전(藥典)신수본초(新修本草)에 수록되었다. ‘신선옥녀분(神仙玉女粉)으로 알려지는 방법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55일에 익모초를 흙이 없도록 잘 캐어 온다. 그것을 햇볕에 말린 후 잘게 찧어서 체로 친다. 거기에 다시 밀가루와 물을 넣어서 잘 섞은 다음 계란 크기만한 약단(藥團)으로 빚어서 다시 햇볕에 말린다. 황토화로를 만들어 사방에 구멍을 낸 다음 목탄을 쌓고 그 속에 이 약단을 넣는다. 밥 한 끼가 될 시간 동안 고열로 가한 후에 다시 하루 밤낮 동안 저열로 가한다. 그것이 식으면 꺼내어 잘게 갈아서 체로 친 다음 건조한 자기 그릇 속에 넣어 둔다. 그것을 사용할 때는 활석분 십분의 일, 연지 백분의 일을 함께 잘 섞어서 잘게 간 다음 목욕이나 세수할 때 발라서 씻어내면 된다.’

 

<무측천의 외치 실패>

무측천이 나름대로 내치에 성공하여 자신에게 정해진 수명을 모두 살았다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학자들은 그녀의 외치에 관한 한 그야말로 빵점을 줄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당나라최대 강역을 이룩한 시기는 그녀의 남편인 고종 때다. 그런데 무측천 시대북방 민족과 수없는 분쟁이 일어났는데 그녀의 통치 기간 중에 큰 틀에서 영향력과 영토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가르친링의 토번에게 1차로 10, 2차로 40만 명의 원정군을 보냈음에도 오히려 격파당해 군사력에 거대한 공백이 초래된다. 더불어 682돌궐 제2제국골돌록가한(일테리시칸)에 의해 부활했으며, 691년에는 묵철가한이 즉위해 쿠차와 돈황을 위협했지만 이에 손을 제대로 쓰지 못했다.

696 거란 이진충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1차에 18만 명을 투입했다가 협석곡 전투에서 참패를 당하고 2차로 30만 명을 투입했음에도 자력으로 진압할 수 없게 되자 결국 돌궐의 지원을 받아 겨우 진압했다. 그런데 698년 돌궐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곧바로 거란이 재독립하면서 요동과 요서에서 통제력을 상실했다.

여기에는 한민족과도 관련이 되는데 거란의 반란을 틈타 대조영이 일어나자 이를 추격하다 오히려 천문령 전투에서 대패하여 대조영고구려를 이어 발해로 올라서는데 기여한다.

전반적으로 그녀의 치세 동안 당나라북방, 요동, 티베트 지방에서 영향력을 거의 상실하여 그동안 당나라 주도의 이민족 지배를 상징했던 기미 지배완전히 붕괴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결과적으로 당 태종과 당 고종 시대에 쌓은 외치 부분의 업적을 그녀가 깎아먹어 외정과 군사적인 면에 있어서는 무능한 인물로 치부된다.

학자들은 결국 당나라의 외치 실패는 당나라가 부병제로서는 도무지 지탱이 불가능한 수준으로 치달아 절도사가 탄생하는 배경이 되며, 절도사의 폐해 때문에 당이 멸망하였다고 설명한다.

물론 이런 사태의 책임을 모두 무측천에게 돌리는 것이 합당한 것은 아니다.

당 태종과 고종 치세에 당나라가 한족 국가로서는 중국 역사상 최대 판도를 구축하고 이민족들을 기미체제로 편성했다고 하지만 이들 이민족은 당나라와 맞장 뜰 정도의 잠재력을 갖고 있었다.

당나라에 패하여 기미체제 속에 편입되었지만, 기미 체제가 불안정해지면 얼마든지 독립해서 새로운 나라를 세울 수 있는 역량이 있었다. 돌궐, 고구려 등이 그 예다.

그런데 기미 체제의 불안정은 무측천 때 비로소 등장한 것은 아니다. 당 고종 때부터 이미 나타나기 시작했으므로 무측천이 이를 막지 못했다고 무측천만 탓할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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