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악당/세계의 악당 무측천

세계의 악당 무측천 (9)

Que sais 2021. 1. 16. 20:44

https://youtu.be/1f0uJ3fSijs

<막 내린 주나라>

무측천이 황제로 등극했을 때 그녀의 나이는 이미 67로 중국역사상 황제에 즉위한 나이가 가장 많은 황제.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제가 될 초기에는 건강했기 때문에 모든 일을 정력적으로 처리했다.

그러나 세월을 거스를 수는 없는 법이다. 무측천이 여자 황제인데다가 점점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당연히 대두되는 것은 후계자로 누구를 세우느냐였다.

그녀는 집권 초기에 명분을 세워 조카들인 무씨들을 왕에 봉해 특권을 주었고 넷째아들 예종 이단성을 무씨로 바꾸고 황사로 삼아 동궁에 거하게 하면서 황태자에 준하는 의례를 갖추도록 했다.

무씨 종실의 정치적 지위는 높여가면서 이씨 성의 자식에게는 제위 계승 후보자라는 미끼를 던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그녀 사후의 제위 계승 문제는 골치 아픈 문제가 되었다. 무씨와 이씨 간의 세력 다툼 때문이다.

이씨 세력은 무측천이 나름대로 중용했기 때문에 그녀가 황제가 된 후에 무시하지 못할 세력으로 성장해 있었다. 한편 당나라에서 주나라로 왕조가 바뀌면서 이씨가 큰 타격을 받았지만 그래도 그들의 세력은 곳곳에 분포되어 있었다.

고종과의 사이에서 난 이씨인 아들에게 제위를 물려준다면 자신이 세운 나라는 사라질 것이 분명하고 자신의 조카들인 무씨에게 제위를 물려주면 주나라라는 국호는 유지될 수 있지만 조카는 친자식만 못하다. 황실을 잘 알고 있는 그녀로서는 장차 자신의 친계인 아들과 손자들이 몰락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껄끄러운 사건에 휘말릴 경우 몸 보신이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신하들이 무측천의 눈치만 보고 있는데 재상 이소덕691황태자 문제를 거론했다. 그것은 왕경지위왕 무승사태자로 즉위시켜야 한다고 고집스럽게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소덕은 여러 가지 상황을 거론하면서 무측천의 아들이씨를 태자로 책봉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그는 무측천의 약점을 지적했다. 조카가 천자를 위해 즉 고모를 위해 묘를 세웠다는 전례가 없으며 고종이 죽을 때 황태자인 이단으로 하여금 제위에 오르도록 유사를 내렸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는 무측천이 황제 위를 조카 무승사에게 물려주어 무씨 정권을 계속 유지시킬 것인지, 아니면 자기의 아들인 중종과 예종 즉 이씨에게 물려주어야만 그녀 사후에 일어날 모든 문제점이 해결된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물론 무측천의 조카들도 반격을 준비했다. 그들은 상고사를 제외하고 천자가 다른 성으로 후계자를 세운 예가 없다며 제위는 무씨가 계승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을 때 재상 적인걸결정적으로 훈수했다.

그의 결론은 무씨를 후계자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자식을 제외하고 조카가 왕이 된다면 결국 아들보다 조카가 더 앞선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인륜에도 어긋난다고 강조했다.

그래도 무측천이 어느 쪽을 후계자로 삼을 지 확정짓지 못하고 있는데 하루는 적인걸에게 자기가 꾼 꿈의 해석을 의뢰했다. 그녀가 꿈속에서 큰 앵무새의 두 날개가 꺾이는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적인걸은 다음과 같은 해석으로 무씨 즉 조카를 후계자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못 박았다.

 

앵무(鸚鵡)의 무자 중 무()자는 폐하의 성씨이고 두 날개는 두 자식입니다. 폐하가 두 자식을 세우면 두 날개가 떨쳐진다는 것입니다.’

 

결국 무측천은 자신의 아들 중에서 예종이 아니라 자신이 폐위한 중종을 698년 황태자로 옹립했다. 그녀가 이단을 제치고 이현(이철)을 태자로 삼은 것은 이현이 형이므로 서열 관념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즉 이씨 간에 제위 때문에 다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이단도 어머니인 무측천의 뜻을 알고 이현에게 직위를 물려주기를 청했다.

무측천황사 이단상왕으로 낮추고 이현황태자로 삼았다. 가장 골머리를 썩일 후계자 문제를 일단 봉합한 것이다.

그러나 후계자의 문제는 다시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돌발사고가 일어났다. 장간지가 무측천을 시봉하던 남총 장역지, 장창종 형제살해하고 무측천이 요양하던 곳을 포위했다. 그들은 황태자 이현에게 제위를 양여할 것을 요청했고 무측천은 이를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705년 정월 25중종이 복위했고 무측천이 옹호하던 악명 높은 혹리들을 모두 축출했다. 또한 10일 후에 국호를 당나라로 회복했고 모든 것을 고종 이전으로 돌렸다.

무측천상양궁으로 압송되어 300여일을 더 살다가 7051126일에 사망했다.

그녀의 유제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호를 거두고 측천대성황후라 칭한다.

종묘에 제사지낸 뒤 건릉에 합장토록 한다.

왕 황후, 소 숙비 등의 자손의 적업을 복원시킨다.

무삼사(양왕)의 실봉수를 원래대로 회복시키고 원서기의 실봉을 늘려준다.

 

반정에 성공한 중종의 측근들은 그녀의 유사 중에 그녀를 고종의 능인 건릉에 합장하는 것을 강력히 반대했지만 중종은 그녀를 유언대로 합장토록 명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특이한 것은 무측천이 '제호를 거두고 측천대성황태후라 칭하라'라는 단어다. 이 말은 자신을 황제로 여기지 말고 황후로 불러달라는 뜻과 다름없다.

그러므로 무측천을 이어 황제가 된 중종은 주나라라는 명칭을 폐하고 다시 당나라 이름으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현재 중국의 당왕조 연표에도 측천무후의 이름은 빠져있다. 그녀가 왜 이런 말을 했는가에도 의견이 분분하다.

정변으로 모든 걸 잃었으므로 자신이 황제라고 칭해봐야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라는 설명과 자신을 다시 황후라 한다면 천하의 새로운 주인이 된 자신의 아들 이씨와의 친근감을 드러내도록 조치한 정치적 판단이라는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한 한 무측천만 내용을 알고 있으므로 정확한 진상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는데 또 다른 예도 있다. 바로 무측천이 후세 사람들이 자기를 평가할 때 양단으로 엇갈릴 것을 예상했기 때문인지 자기의 묘비에 아무런 글자도 새기지 않는 무자비(無字碑)를 세워달라고 했다는 점이다.

무측천이 왜 자신의 비석에 아무런 글을 새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는지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자신의 모든 행적에 대한 가치 판단과 평가를 모두 훗날의 역사에 맡긴다는 뜻이며 둘째는 자신의 공적이 크므로 이런 작은 비석에 모두 적을 수 없기 때문에 아예 적지 않도록 했다는 것이다. 세 번째 이유는 그녀의 비행도 적어야하는데 이를 적는다는 것이 만만치 않으므로 아예 적지 않는 묘수를 부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무자비무측천의 전유물은 아니며 중국 역사상 여러 사람들이 남겼다. 여하튼 무측천 능앞에 무자비가 있는데 모든 일이 자신의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그녀의 무자비는 1012세기에 그녀의 유지를 어기고 13개의 비문이 새겨졌는데 여진족의 문자도 확인할 수 있다.

 

<무측천의 자질>

무측천은 40년을 최고의 권력자로 군림했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살벌한 권력투쟁의 중심부에서 무측천이 자신의 수명대로 살았다는 것은 그야말로 놀라운 일이다. 학자들은 무측천이 나름대로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여하튼 장기간 최고 권력을 행사했는데 그 비결이 무엇이냐에 초점을 맞추었다.

박기종 박사는 그 해답으로 목표를 향해 흔들림 없이, 끝까지 전진하는 강인한 의지를 제시했다. 무측천은 그야말로 냉정하고 무서운 군주였다. 그녀는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해 젖먹이 공주부터 금쪽같은 아들인 장남을 죽이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또한 장성한 아들 두 명을 폐위시켰고, 무엇보다 태종의 후궁에서 그의 아들인 고종의 여인이 되는데 세속적인 눈총과 이목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더불어 당나라를 폐하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데도 주저하지 않았다. 보통의 사람들은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권력에의 강한 의지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측천역성혁명 이후 중종, 예종의 복위와 현종의 치세에서도 당나라 태묘에 배향되어 제사 음식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현명함 덕분이라는 시각이다.

무측천은 최후의 순간에 주나라 황제 무측천이 아닌 당나라 고종의 황비 무후가 되기를 원했고, 수많은 정적들을 사면함으로써 용서라는 인간의 본능을 이용했다. 이것은 최고 권력자로서 수많은 사람을 부려보고, 죽이고, 용서하고, 총애했던 경험치의 발로라 볼 수 있다.

무측천잔인함은 공적인 업무에서 잘 알려진다.

그는 장손무기 등 원로들을 모조리 청했고, 자신의 추종자라고 볼 수 있는 혹리를 가차없이 처형했다. 그녀는 근무 태만, 명령위반 등의 실수도 죽음으로 다스렸다. 그녀에게 필요했던 건 공포정치였다. 한마디로 공포심을 전 나라에 유포시켜 관료 조직을 휘어잡는 묘수로 활용했다.

반면에 1,000명이나 되는 새로운 신진 관리를 등용해 인재 발굴은 물론 세대교체라는 토끼도 잡았다. 이를 위해 그녀는 당근을 제시했다. 그녀는 고종의 후궁 시절, 궁 안의 환관과 궁녀를 포섭하기 위해 자신의 재물을 아낌없이 모두 사용했다. 그녀가 유명한 부호의 딸이기도 하지만 그녀는 목적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는 과감성을 갖고 있었다. 여자라고 하지만 남녀를 통틀어 어떤 라이벌들과 차별된 것이다.

그러므로 무측천에 대한 평가흑백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무측천의 시대에 중국이 호황기를 맞은 것은 사실인데 그녀가 남자이고 황제의 아들로써 왕위에 올랐다면 그런 업적을 남길 수 있었을까하는 점이다. 이를 감안하면 무측천의 능력은 능력대로 인정해야 한다는 취지다.

반면에 그녀가 남자였다면 자신의 손으로 딸의 목을 조르는 행동을 하더라도 황제가 될 수 있었을지 모른다는 설명도 있다. 어떤 상황에 있든 자신이 원하는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자식의 목을 조른다는 것은 보통 사람들이 취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는 지적이다. 여자와 남자를 통틀어 무측천이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다는 뜻으로 그녀에 평가는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는 뜻이다.

중국 정부20071 매우 놀라운 사실을 발표했다. 무측천과 고종이 들어있는 건릉500톤가량의 보물이 묻혀 있다는 것이다.

중국무측천릉의 발굴을 검토 중인데 사전 조사 결과 능묘와 함께 하궁(下宮)이라는 지하궁전이 존재하며, 이곳에 당나라 당시 최고의 보물이 함께 묻혀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는 것이다. 조사에 참여한 산시(陝西)성의 한 고고학자는 현재 매장품의 70퍼센트를 조사했는데 각종 진귀한 보물과 유물최소 500에 이른다고 말했다.

무측천의 건릉은 중국 내에서 도굴당하지 않고 완벽하게 보존된 황릉으로 유명하다. 학자들이 가장 기대하는 것은 고종이 유언에서 자신이 애호하던 서화를 함께 매장토록 했다는 기록이다. 이것은 '서성(書聖)'으로 불린 왕희지(王羲之)의 불후의 명작난정서(蘭亭序)도 함께 묻혀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참고문헌 :

『측천무후 능에 금은보화 500 t』, 유철종, 중앙일보, 2007.1.17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 측천무후생각하고, 결심하면 바로 행동에 옮겨라!』, 박기종, 매일경제, 2016.07.07.

『측천무후』, 나무위키

『측천무후』, 위키백과

http://blog.yes24.com/blog/blogMain.aspx?blogid=giyoungm&artSeqNo=793014

http://blog.naver.com/tcasuk/40004411871

무측천평전, 조문윤, 책과함께,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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