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틴 전투>
1187년 7월 4일에 벌어진 하틴 전투(Battle of Hattin)는 십자군 전쟁의 핵을 구성하므로 보다 설명한다. 하틴 전투는 십자군 예루살렘 왕국과 살라딘의 아이유브 왕조의 결전으로 설명되는데 이 전투에서 살라딘이 예루살렘 왕국의 병력 대부분을 궤멸시킨다. 이후 십자군이 차지하고 있던 예루살렘을 포함한 대다수의 십자군 도시와 요새들은 살라딘 즉 이슬람으로 넘어갔음은 물론이다.
하틴 전투의 전초는 1174년, 장기 왕조의 누레딘과 살라딘이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를 멸망시킬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파티마 왕조의 멸망은 이들 지역의 정치적 격변의 시작이라 볼 수 있는데 이후 누레딘이 사망하자 살라딘이 이를 흡수한다. 이는 예루살렘 왕국이 살라딘의 거대한 세력권 아래 포위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1177년 놀랍게도 살라딘의 군대가 몽기사르 전투에서 예루살렘의 보드앵 4세에게 크게 격파당한다. 그런데 보드앵 4세는 나병이라는 중병에 걸린데다 일단 살라딘과의 전투에서 승리했음에도 강력한 살라딘과 계속 전투해서는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다며 살라딘과 휴전협정을 맺었다. 살라딘은 이 기회를 십분 살렸다. 예루살렘 왕국과 전투하는 여력을 이슬람의 절대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세력 확장에 투입하였다.
문제는 보드앵 4세의 생각에도 불구하고 케락의 영주였던 샤티용의 르노가 휴전협정을 무시하고 무슬림들을 공격하여 말썽의 빌미를 만들고 있었다. 그런데 보드앵 4세가 급사하자 그의 누이 시빌라의 어린 아들 보드앵 5세가 왕위를 이었지만, 그 역시 1년도 안 돼 죽었고 시빌라는 자기 남편이었던 기 드 뤼지냥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
문제는 새 왕인 기 드 뤼지냥에 대해 일부 귀족들이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내고 있던 차에 살라딘과 소규모 전투에서 기 왕을 지지하던 성전기사단의 지도부가 궤멸되었다. 살라딘과 예루살렘 왕국과의 전쟁이 피할 수 없게 되자 기 왕은 살라딘을 공격하기 위해 전군을 소집했다.
두 세력의 장병 숫자는 크게 우열이 없었다. 예루살렘 왕국은 1,200명의 중무장한 기사, 기병, 보병, 석궁병들을 포함하여 약 2만~2만 5천명 정도였고 살라딘 역시 2만에서 3만 명 사이였다.
7월 3일 예루살렘 군대는 목표지인 티베리아스로 향하면서 일단 물이 있는 세포리아로 출발했지만 살라딘이 보낸 궁기병의 지속적인 공격을 받아 저녁 하틴 언덕 근처에 진지를 차렸다. 그러나 새벽 살라딘의 군대에 의해 각 부대가 각개 격파되면서 모두 궤멸되었다. 약 20,000명에 달하는 예루살렘 군대는 3,000명 정도 살아남았으나 국왕 기 드 뤼지냥과 성전기사단장 제라르를 비롯한 다수의 귀족과 지휘관이 포로가 되었다.
살라딘은 붙잡힌 국왕 기 드 뤼지냥을 다마스쿠스에 잠시 압송했다가 석방했지만 휴전협정을 어기며 무슬림들을 살상하던 르노 드 샤티용 등은 처형되었다. 나머지 귀족들은 모두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났다. 트리폴리, 티레, 안티오키아를 제외하고 예루살렘 왕국의 거의 모든 영토가 살라딘의 영역으로 포함되었고 발리앙이 지키던 예루살렘도 협상 끝에 10월 2일 수비군 및 민간인들을 무사히 보내주는 대가로 살라딘이 점령했다.
예루살렘을 정복한 살라딘은 예수의 무덤이 있다는 성묘교회에 대해 어떤 간섭도 하지 않았지만 690년에 이슬람의 성전으로 세워진 바위의 돔 위에 있던 십자가만은 부셨다. 유일신을 섬기는 두 종교의 희비가 엇갈리는 순간이었다. 리들리 스콧의 영화, 「킹돔 오브 헤븐」이 바로 이 시점을 그리고 있다.
살라딘은 수많은 아랍인들이 부활을 고대하는 이슬람의 영웅으로 십자군 전쟁 와중임에도 불구하고 아랍인들은 물론 기독교인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그가 두 적대 세력으로부터 존경을 받은 것은 십자군 전쟁 당시 용감무쌍한 전사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살라딘은 하틴 전투에서 십자군을 대파한 후 포로들을 풀어주고, 전투에 앞서 성 안에서 결혼식이 있다는 말을 듣고 공격을 늦춘 사람이다. 이러한 전설이 쌓여 그는 신의 있고 단호했으며 나아가 관대한 인물로 기독교인들까지 감탄했던 인물로 표현된다.
예루살렘을 정복하면서 무슬림을 잔혹하게 학살했던 십자군과 달리 살라딘은 기독교도에게서 평화롭게 항복을 받아내자 기독교의 성묘를 파헤치자는 이슬람 강경파에 맞서 다른 종교도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일부 학자들은 살라딘도 기독교인들을 처형한 사실을 들어 살라딘에게 완전 면죄부를 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 십자군 전쟁 전체를 통틀어 볼 때 기독교 즉 십자군 측에서 살라딘과 같은 행동을 한 사람은 없다.
여하튼 사담 후세인이 걸프전 동안 살라딘이 자신과 같은 고원 지대인 티크리트 출신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후광을 얻은 것이나, 2000년 여름 캠프 데이비드 중동 평화 협상 결렬 이후 귀향한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이 ‘팔레스타인의 살라딘’이라고 추켜세워졌던 것도 이 때문이다.
<「킹돔 오브 헤븐」>
「킹돔 오브 헤븐」은 「글래디에이터」로 유명한 리들리 스콧 감독이 메가폰을 잡아 2005년에 출시한 역사 전쟁 영화로 큰 화제를 받았다. 특히 세계사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제3차 십자군 전쟁 직전에 일어난 살라딘과 십자군의 상황을 시대적 배경으로, 1187년 예루살렘을 살라딘으로부터 지켜내는 과정을 그린 작품으로 일부 역사학자들은 고증이 뛰어나므로 역사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고 평가한다. 한마디로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보도록 추천하므로 이곳에서 보다 설명한다.
특히 현재 예루살렘 땅을 주위로 내전 중인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특히 기독교와 이슬람의 반목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으며, 궁극적으로 '극단적인 가치관을 지닌 상대와도 타협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결론으로 기독교와 이슬람교를 비교적 객관적으로 다루었다하여 큰 주목이 되었다.
<인디펜던트>지의 로버트 피스크는 다음과 같이 이 영화를 평했다.
‘영화를 아직 안 봤으면 꼭 보라. 볼 때, 베이루트의 무슬림들이 할리우드 영화도 공정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음을 기억하라.’
역사물이지만 비교적 칼 같은 고증에 따라 소품을 만들어 찬사를 받았고, 극장판과 감독판의 내용 차이가 매우 큰 영화로도 유명하다. 그런데 이들의 차이가 한 두 장면 편집상 잘린 수준이 아니라 무려 약 50분이라는 어마어마한 분량 즉 영화 기준으로 무려 1/4이 잘려나가 극장판은 완전 다른 영화로 변했다는데 여러 매체에서 혹평을 받았다. 두 영화를 보아야 진면목을 파악할 수 있다는 뜻인데 한 편만 보려면 반드시 감독판을 보라고 추천한다. <위키백과>에 설명된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아이를 사산하고 자살한 아내를 잃은 슬픔 속에서 발리앙이 수도원에 감금되어 있는데 한 무리의 십자군이 마을을 방문할 때 대장장이인 발리앙은 풀려나 기사들의 장구류를 다룬다. 십자군 안에 발리앙 어머니를 버리고 십자군에 참전한 고드프리가 있었다. 고드프리는 발리앙에게 용서를 구하고 함께 원정에 참전하자고 하지만 발리앙은 동행을 거부한다.
십자군들이 떠난 밤 발리앙의 형제이자 아내를 묻은 수도사가 찾아와 발리앙에게 떠날 것을 종용하는 중 수도사의 목에 걸려 있는, 아내에게 걸어준 십자가를 보고 분노한다. 수도사는 자살은 죄악이고 발리앙의 아내는 자살했기에 목을 자르고 묻었을 뿐이라 항변하지만 발리앙은 그를 찌르고 화덕에 넣어 태워 버린다.
발리앙은 즉시 말을 타고 먼저 길을 떠난 고드프리를 찾아가 죄를 지었기에 예루살렘에 가야한다고 말한다. 배를 타기위해 가던 중 마을의 영주의 아들인 고드프리의 조카가 습격을 하고 그 싸움에서 이겼으나 고드프리 역시 큰 상처를 입게 된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항구에서 고드프리는 왕을 지켜줄 것을 부탁하며 아들인 발리앙을 기사로 서임하며 이벨린의 영주자리를 물려주고 죽음을 맞이한다. 배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가던 중 배가 풍랑을 맞아 뒤집어 지고 홀로 해안에 도착한 발리앙은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아버지의 수하들을 만나 왕을 알현하고 이벨린에 가있던 중 예루살렘의 공주 시빌라와 사랑을 나누는데 레날드와 기의 무슬림 상단 공격에 살라딘이 나서며 나병으로 점점 쇠약해져가던 보드앵 4세 왕도 살라딘을 막기위해 군을 이끈다. 요새로 간 발리앙은 시빌라를 요새로 들여보내고 남은 피난민이 대피할 시간을 벌기위해 살라딘의 선봉에 돌격하고 포로가 된다. 살라딘의 부대와 예루살렘 왕의 부대가 도착하고 예루살렘 왕은 살라딘에게 레날드를 처벌할것이니 군을 물리라 요청한다. 살라딘이 군을 물리고 레날드는 감옥에 갇힌다. 무리한 출전으로 죽어가고 있던 왕은 발리앙을 불러 시빌라와 결혼할 것을 바라나 발리앙은 기의 기사들이 떠나는 것을 염려하여 거절하고 왕은 시빌라의 아들에게 왕위를 넘기고 죽음을 맞이한다. 하지만 시빌라는 아들 역시 선왕과 같은 나병인 것을 알게되고 아들 역시 오빠와 같이 고통받을 것을 슬퍼하여 결국 아들도 신의 품으로 떠나 보낸다. 기는 시빌라와의 결혼에 방해가 되는 발리앙을 죽이러 암살자를 보내고 레날드를 시켜 살라딘의 누이를 죽인다. 살라딘의 위협을 이용하여 시빌라와 혼인한 기는 왕이 되고 살아 돌아온 발리앙과 예루살렘 왕의 기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기사들과 병사들을 끌고 살라딘을 치러 나가지만 대패하고 포로가 된다.
살라딘은 레날드의 목을 베어 복수하고 기에게 치욕을 준다. 남은 병력이 전무한 상황에서 발리앙은 살라딘의 대군을 대비해 자신의 장기인 수성전을 준비하며 살라딘의 대군을 맞이하게 된다. 발리앙과 예루살렘의 수일간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성벽은 무너지고 밀려드는 대군을 간신히 막아낸다. 이에 살라딘은 회담을 요청하고 살라딘이 예루살렘의 주민들이 해안가로 이동하는 동안의 안전을 보해주는데 결국 예루살렘은 살라딘의 손에 떨어진다. 발리앙은 풀려난 기와 결투하여 패배한 기를 죽이지 않고 기에게 다시 일어나라는 충고를 한 후 고향으로 돌아간다.’
「킹돔 오브 헤븐」이 다큐멘터리가 아니지만 상당 부분 역사와 근접하다. 그러나 영화의 속성상 극적인 재미를 위해, 혹은 감독의 취향대로 역사상의 기록과 영화의 묘사가 다른 경우가 상당히 많다. 영화속의 주인공 상당수가 가공인물이기는 하지만 등장 인물의 행적을 역사상에서 이름과 모티브만 따온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사실상 허구의 행적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영화의 몇몇 장면은 당대를 정확하게 묘사한다.
주인공(발리앙)이 초반부에, 동생을 죽이고 도주하자 영주의 아들이 쫓는 장면이 나온다. 영주의 아들이 발리앙에게 죄를 묻자 옆의 독일 기사가 결투로 옳고 그름을 판결하자고 말한다. 옆에 있던 구호기사단 소속의 기사도 이에 동조하는데 사실 현대로 보아서는 이해가 잘 안 된다. 한마디로 죄를 지어도 결투 능력이 있다면 무죄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런 장면은 다른 역사물에서도 수없이 등장하는데 이는 중세시대가 기독교로 철저하게 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당시 기독교 관념으로 볼 때 옳고 그름은 신이 결정해준다는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즉 누구라도 옳다면 신이 이기게 해 준다는 뜻으로 다소 현대인으로 볼 때 헷갈리지 않을 수 없지만 선과 악을 분명히 분간해낼 수 없는 상황에서의 판결은 양자 간의 결투가 최선이라는 뜻이다. 특히 게르만 형사소송법 상에서는 재판 결투가 중간절차(Zwischenverfahren)에서 가능하도록 아예 법으로 제정되어 있었다는 점은 물론 당대의 최고 재판 방법이었음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큰 틀에서 수많은 악행을 저질렀음에도 포로로 잡힌 기사에게 몸값을 요구한다는 사실이다. 사실 기독교도들끼리의 싸움에서 기사처럼 몸값을 지불할 수 있는 대상일 경우 포획해서 몸값을 받고 풀어주는 것이 상식이었다. 몸값처럼 환가성이 높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중세시대에 백병전은 현대와 다소 다르다. 기사들이 말 타고 전투하여 말에서 낙마하면 그 순간 전투가 끝나고 포로가 되면 인질금을 주고 풀려나는 것이 기본이었다. 전투에 들어가는 수많은 비용을 인질금으로 확보하려는 것으로 굳이 포로를 죽여 재산을 축낼 필요는 없었다.
그러므로 십자군 전쟁이 그동안 어떤 전쟁보다 참혹했다는 것은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이런 관례를 적용하지 않고 학살로 점철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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