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악당/십자군 전쟁(이노센트 3세)

십자군 전쟁(2) 이노센트 3세

Que sais 2021. 1. 17. 23:22

https://youtu.be/Uqa7_Wz7kPg

<신이 원하는 전쟁>

10951118일부터 1127일까지 파리의 남쪽 약 400킬로미터에 있는 클레르몽 페랑에서 프랑스의 주교 300여명, 사제 4,000여명과 평신도 3만 여명이 참가하는 공의회를 개최했다. 교황 우르바누스 2도 임석하여 성직자의 독신제 실행과 성직 매매 금지, 그리고 왕비와 이혼한 프랑스 국왕 필리프 1세의 파문 등을 결정했고 1128일 중대 성명을 발표한다고 예고했다.

다음날 아침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모인 특별 집회장에서 교황은 다음과 같이 십자군의 당위성을 발표했다.

 

'프랑스 인이여! 신의 사랑으로 선택받은 백성들이여!

예루살렘과 콘스탄티노플의 형제들로부터 도움을 바라는 편지가 도착했다. 동쪽에서 온 이슬람교도인 투르크인들이 폭력을 휘둘러 그리스도 교도를 박해 및 약탈하고 도시를 불사르고 있다. 이교도들은 포로로 잡힌 우리 동포들을 자기 나라로 끌고 가 잔인하게 고문해서 죽이기도 하며 더러운 손으로 성스러운 제단을 모독하며 파괴한다.

(중략) 이 같은 만행을 바로잡고 그 땅을 회복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의무.

(중략) 원정 도중 또는 전투에서 죽은 사람에게는 신이 내게 부여한 권능으로 죄를 사해 줄 것임을 나는 모두에게 약속한다.

(중략) 지금부터 출발하는 사람은 이마나 가슴에, 목적을 달성하고 돌아오는 사람은 등에 주님의 십자가 표시를 붙이기 바란다.‘

 

우선 프랑스의 기사와 유럽인들에게 처자식을 떠나 예루살렘을 비롯한 성지를 투르크로 부터 구출해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아울러 유일신이 창조한 지구상에서 이교도인 이슬람이 존재한다는 것은 기독교 세계의 불명예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그가 가장 강조한 것은 세속적인 문제.

 

선택받은 백성들이 살고 있는 이 땅은 너무나 좁다. 아무리 일구어도 충분한 식량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서로 싸우고 죽이며, 많은 사람들이 내란 때문에 죽어간다. 이런 내란을 끝내고 성지로 행진하자. 그 땅을 더러운 이교도들의 손에서 되찾아 여러분의 낙원으로 만들 수 있다. 예루살렘은 비옥한 환희의 낙원이다.’

 

그러면서 우르바누스십자가의 견장을 단 사람들은 십자군을 시작하겠다는 엄숙한 맹세를 해야하며 만약 그 맹세를 깨뜨리면 교회의 모든 제재가 가해질 것이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파문도 감수해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에 십자군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가족과 재산은 교회에 의해 보호를 받으며 십자군에 참여하는 동한 전사들은 세속적인 법보다 교회법의 지배를 받는다고 설명했다.

우르바누스가 강조한 십자군 참가자들에 대한 죄의 사면은 그야말로 종교열로 뭉쳐있던 중세인들이 가장 원하는 말이었다. 사후에서의 죄의 처벌이 무척이나 끔찍한 현실로 여겨졌던 사회에서 이것은 대단한 인센티브였다. 누구든 신의 교회를 해방시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는 사람은 모든 참회의 여정을 대신할 수 있다는 것으로 교황만이 할 수 있는 관대한 선언이었다. 자신이 선포하는 전쟁은 성전이며 이교도와의 싸움에서 전사하는 사람은 모두 천국에 가서 그 보상을 받는다고 부추겼다.

당시에 성지 순례의 의미는 현재와는 매우 달랐다는 점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예루살렘방문하는 것은 기독교인들이 죄를 사면 받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당시의 말세론에 의하면 천상의 예루살렘은 지상의 예루살렘 바로 그 자리에 내려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지를 순례하거나 성지에서 죽는다는 것은 최후의 심판 날에 그리스도 곁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뜻했다.

클레르몽의 회의가 끝난 다음에도 교황은 프랑스 각지를 순회했고 지방의 제후에게 사자 혹은 편지를 보내어 십자군에 참가할 것을 호소했다.

교황의 웅변에 감복한 참석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신이 이를 원하신다(Deus Le Volt)’

 

십자군 전쟁의 공식 목적은 이교도의 손에서 성지를 탈환하는 것이었다. 마침 은둔자 베드로라고 불려지는 사람이 나타나 프랑스와 독일에서 일반 대중에게 십자군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맨발로 거친 천의 옷을 입고, 커다란 십자가를 짊어지고 거리에서, 시장과 교회에서 군중에게 열변을 토했다.

그는 이교도들이 기독교 순례자들에게 가하는 잔인한 행동을 규탄하면서 예루살렘의 불행은 곧 기독교도의 책임이라고 비난했다. 열광의 커다란 파도가 유럽 세계를 휩쓸고 기독교의 대중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복합적인 십자군>

십자군 전쟁이 큰 문제로 비화된 것으로 교황이 십자군을 파견하는 근본 요인성지 탈환이라는 목적보다는 보다 세속적인 목적이 앞섰기 때문이다.

교황청으로 보아 선교로 인해 게르만인, 프랑크인, 노르만인 등이 기독교도가 되었지만 이들은 기본적으로 전투력을 기본으로 한 야만족이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이들의 넘쳐나는 전투력을 발산시키지 않으면 유럽 내부에서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많은데 이는 결국 교황권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했다.

더구나 이들 인구가 전쟁이 거의 없으므로 급격히 늘어 가는데 이들을 먹여살려야할 경작지는 한정되어 있었다. 사실 당시 유럽의 전반적인 상황은 매우 좋지 않았다. 농업 기술의 낙후성으로 말미암아 식량의 부족 사태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실업과 기아는 소요와 폭동으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이때 이슬람교도들이 갖고 있는 소아시아유럽인들이 이주하기에 최적의 땅이라는 보고가 들어왔다. 교황십자군을 일으키면 일석삼조(一石三鳥) 이상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첫째는 이교도인들에게 점령되어 있는 예루살렘을 탈환하여 기독교인로서의 자긍심을 얻는 것이다.

둘째는 예루살렘을 포함한 인근 지역을 점령함으로써 유럽인들을 이주시켜 그들의 식량 부족 사태를 해결하고 경제적 기반을 구축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자신에게 응원을 요청한 비잔틴 제국자신의 영향 하에 둘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사실 알렉시오스 황제의 의도는 예루살렘의 문제점을 근거로 용병을 요청한 것이지 서유럽 군대의 개입을 요구한 것은 아니었지만 교황의 꿈은 보다 원대했다.

십자군 원정교황청의 권위 즉 교황권에 도전하는 기독교국의 골치 아픈 분자들, 그러니까 중세시대의 봉건제도 치하에서 기사들을 교황의 지휘아래 결집시키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 될 수 있었다. 당시에는 오로지 종교적인 동기만이 호소력이 있었으므로 성지를 구출한다는 명목은 각 국의 왕이나 제후들로 하여금 교황의 명령을 따르게 하는 가장 쉬운 방법 가운데 하나였다.

곧바로 종교적 광란의 파도가 유럽 대륙을 휩쓸면서 이성은 완전히 마비되고 말았다. 우르바누스는 주로 군사적으로 경험이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십자군에 호응한 사람은 전투력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대장장이, 목부, 군종사제, 창녀 등 그야말로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활터전을 버리고 투르크 인들을 죽이러 가는 여정에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전투에 익숙한 군인들이 아니라 광신자들일 뿐이었다. 무언가 잘못 꾀인 집단들이었다.

그러나 일단 교황의 선언은 유럽에 광풍을 몰아왔다.

원래 교황1096816성모 승천제(성모 마리아의 사후 영혼과 육체가 함께 천국으로 올라간 것을 축하하는 잔치)의 날을 출진의 날로 예정했다. 그러나 북프랑스의 제후를 중심으로 하여 60,000여 명의 십자군 지원자들이 프랑스 동부 로렌 지방으로 몰려들자 예정보다 빨리 콘스탄티노플을 향해 출발하기 시작했다. 독일에서도 농부 15,000여명이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