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악당/십자군 전쟁(이노센트 3세)

십자군 전쟁(6) 이노센트3세

Que sais 2021. 1. 17. 23:37

https://youtu.be/hAkTb0iWYG4

발리앙이 그의 아버지로부터 기사 서임을 받을 때나, 후반에 그가 대주교의 시종기사로 임명할 때 뺨을 후려치는 묘사가 있다. 이는 실제로 신참 기사들이 서임을 받을 때 두들기는 전통이 있기 때문이다. 보다 고상한 중세 시대의 영화에서는 검으로 어깨와 머리를 두드리는데 이는 약식이다. 자료에 의하면 기사 서임당시 워낙 심하게 두둘겨 맞아 인사불성이 되는 경우가 많아 이런 약식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영화에서 뺨 한 번 맞는 것은 그야말로 양반 대우라는 것이다.

하틴 전투에서 포로가 된 기 드 뤼지냥에게 살라딘이 얼음물이 담긴 황금잔을 건네는데 이는 상당한 의미가 있다. 이는 포로가 된 자에게 신변 보장 즉 죽이지 않겠다는 의미로 물을 건네 준 것이다. 살라딘기 드 뤼지냥의 목숨을 보장하겠다는 뜻이다.

블랙버스터 영화답게 전투장면이 화려하게 수놓아지는데 고대의 첨단 무기트레뷰셋 투석기가 나온다. 예루살렘 공방전 장면에 등장하는데 트레뷰셋 투석기가 매우 강력한 폭발을 일으키는 불타는 탄환을 던진다. 그런데 트레뷰셋이 불타는 탄환을 던질 수는 있지만 이 당시는 송진과 유황 등을 이용하여 목표에 명중할 때 화재를 일으키는 용도. 영화의 묘사처럼 폭발이 일어나는 화약을 사용한 것은 아니다. 화약은 추후 몽골의 내습으로 전해진다.

영화에서 가장 말 안 되는 이야기발리앙이 전투 직전에 유대인, 기독교도, 무슬림 모두 도시에 대한 자격이 있다고 말한다. 이때 병사들이 환호하는데, 실제 중세 시대 같았으면 그는 이단으로 화형에 처해졌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십자군 전쟁 자체가 일어날 리 없다.

 

3차 십자군(11891192)

3차 십자군 전쟁은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점령하자 기독교 측에서 십자군을 급파하여 벌어진 전쟁으로 1189년부터 1192년까지 약 3년 동안 계속되었다.

3차 십자군의 준비는 과거와 달랐다. 이슬람과 전투를 해 본 결과 전쟁과 성지 탈환은 열정만으로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 2차 십자군 전쟁을 통해 의지와 용기 못지않게 조직화가 필요했다. 20만 명의 원정군을 훈련시키는데 꼬박 1년을 소요하였으며 각지에서 모여 온 병사들도 노련한 전쟁 기술을 지닌 여러 귀족들의 휘하에 배치하여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또한 살라딘 십일조로 알려진 보통세의 부과로 전국에서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십자군을 돕기 위한 세금을 바쳤다.

특히 3차 십자군에는 당대 유럽 최고의 각국 왕들이 참가했고 군대의 규모와 질 등을 볼 때 십자군 전쟁 중 최고 수준이라 평가한다. 당시 참가한 왕들로는 유럽 최대의 세력을 자랑했던 신성 로마 제국붉은 수염왕 프리드리히 110만 명을 동원하는 대규모 십자군을 구성했다. 중세 프랑스 카페 왕조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고 평가받는 필리프 2 헨리 211881휴전을 맺고 함께 십자군에 참가하겠다고 선포했다. 헨리 2는 참여하지 못했지만 그의 아들로 사자심왕이라 불리는 리처드 1가 포함되어 국왕 십자군이란 이름을 얻었다.

사실 이들 멤버만 보면 십자군 드림팀인데 결과는 전혀 반대였다. 이슬람에서는 살라딘이라는 한 영웅이 전체 판을 주도하면서 전세를 이끌고 있지만 기독교 측은 단결하지 못한데다 악재가 터졌기 때문이다.

바로 역대 십자군을 통틀어 가장 거대한 규모의 십자군을 이끈 붉은 수염 프리드리히 황제가 살레프 강을 건너던 중에 익사한 것이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이 사건 때문에 기세 등등 하던 독일 십자군의 대부분이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중 일부만이 아들인 프리드리히 공작과 함께 진군했으나 그 수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의 갑작스런 죽음 때문에 십자군의 전력은 당초보다 크게 약화되었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진군을 계속했다.

그러나 결론을 먼저 말한다면 거대한 병력을 투입했음에도 성지 탈환이라는 궁극적인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다. 독일이 탈락한 것은 물론 프랑스의 필리프 2리처드 1세와의 알력으로 성지에 대한 열정을 잃고 아예 본국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가 거의 2미터나 되는 사자심왕 리처드 1세의 분전은 대단했다.

하틴 전투 이후 대부분의 십자군 영역이 살라딘에게 들어갔으나 지중해 연안 레반트 지역의 도시들은 리처드 1세의 활약으로 대체로 되찾거나 유지할 수 있었다. 그는 레반트 해안 지역의 주요 도시들을 일부 회복한 후 요새들을 신축하거나 재건하기도 했다. 또한 119210살라딘과의 평화조약을 체결하여 5년간 기독교도들의 성지 순례가 보장되는 등 십자군 국가들의 수명 연장에 큰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일부 학자들은 절반의 성공이라는 평가도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평가는 기독교측의 주장이라는 비판도 있다. 결론적으로 당대의 유럽을 지배하고 있던 신성 로마 제국과 프랑스, 그리고 잉글랜드 등이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왕들의 십자군이 거둔 성과가 미비했기 때문이다. 이후 3차 십자만큼 거대한 규모의 십자군은 다시 결성되지 못했음을 생각해보면 그 결과는 용두사미라는 뜻이다.

잉글랜드의 리처드 1가 혼자 남아 분투했지만 끝내 자신의 뜻대로 십자군을 움직이지 못하였다. 이는 제1차 십자군 때와는 반대로, 이슬람 세력살라딘의 통제로 일사분란하게 대응하는데 반해 그리스도교 진영은 상대적으로 분열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십자군이 일부 성지를 회복하게 된 것은 6차 십자군 원정(12271241)때로 내려간다. 그조차도 무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협상에 의한 일시적 회복에 불과했다.

3차 십자군 원정은 후대에 가장 많은 에피소드를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리처드 1가 귀국 길에 배가 난파되어 오스트리아의 레오폴트 공작에게 포로로 잡혔다. 그는 곧바로 신성 로마 제국에 넘겨졌고, 어머니인 엘레오노르의 도움으로 막대한 몸값을 치른 후 1194년 봄에야 풀려났다. 그의 몸값을 마련하기 위해 잉글랜드 국내에 막대한 세금이 부과된 것은 덤이었는데 이 시기에서 비롯된 전설이 바로 로빈후드사자심왕 리처드 1세의 주요 소재로 등장한다.

살라딘의 에피소드는 중세 유럽의 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아이콘이다. 특히 이 당시 주인공들을 주변으로 벌어진 유럽 각국의 권력 이동 등도 흥미로운 일화를 제공해준다.

3차에 걸친 십자군 전쟁은 기독교 측에 큰 충격을 주어 자신들의 신앙에 대한 각성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이슬람에게도 종교적 열정을 부채질하는 계기가 되어 십자군들에 대한 성전을 주장하며 이슬람 세계를 규합해갔다. 또한 십자군이 그들을 공격하여 십자군 국가가 존재한다는 것은 이슬람 신앙이 더럽혀졌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신앙을 '정화'하는 운동이 벌어지고 사원과 학교들이 건립되었다.

 

4차 십자군 전쟁(12021204)

십자군 전쟁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1271년에서 1272년에 걸친 9차 십자군 원정으로 종말을 맞는다. 109511우르바누스 2의 십자군 원정 발의로부터 시작된 제1차 십자군원정으로부터 거의 200년에 걸친 기간이다.

이중 4차 십자군 전쟁은 인류 사상 최악의 악당으로 불리는 이노센트 3의 주도하에 1202년부터 1204년 사이에 펼쳐졌는데 십자군 전쟁이란 말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가장 추악한 십자군 전쟁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역사상 가장 추악한 제4차 십자군 전쟁을 주도한 이노센트 3야 말로 최전성기의 교황권을 행사한 사람이라는 점이다.

이노센트 3를 거론하려면 당대의 정황을 이해해야한다.

3차 십자군 원정이 큰 틀에서 실패했다는 것은 예루살렘 왕국으로는 최악의 상태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때 레반트 해안 일대를 장악하고 다마스쿠스, 이집트 등을 위협한 과거도 있었지만 이제 예루살렘이 관할하는 지역은 아크레 등의 해안지대에 불과했다. 트리폴리 백국 안티오키아 공국의 상황도 마찬가지여서 본거지와 그 주변만을 보전하고 있었다

특히 동로마 제국의 상황도 만만치 않았다. 3차 십자군 원정 당시 프리드리히 1와 갈등을 벌이던 이사키오스 2의 실정을 공격하여 제위에 오른 알렉시오스 3였지만 내분으로 힘이 약화되어 외교 면에서도 위세가 저하된 상태였다. 그러나 워낙 동로마라는 타이틀이 있으므로 근근히 버티고 있었지만 국방력이 형편없이 추락하는 것은 물론 재정 상에도 문제가 되어 예루살렘의 십자군에 지원할 형편이 못되었다.

그러므로 당대의 정황을 정확히 판단한 예루살렘 왕국은 동로마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하자 결국 십자군을 파병할 수 있는 서유럽에 손을 벌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한마디로 새로운 십자군을 파견해달라는 것이다.

이런 정황에 이탈리아 명문 쿤티 가() 출신으로 119837세의 젊은 나이로 교황의 자리에 오른 이노센트 3는 야심만만한 사나이였다.

그는 교회가 세계를 지도한다는 신성한 직분을 수행하기 위해서 보다 강력한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는 교황은 태양이며, 황제는 달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교권의 우위를 주장했으며 교권을 바탕으로 한 정치적 통일을 추진했다.

이를 성속양권(成俗兩權)이라고 설명하는데 즉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은 교황이 갖지만 속권 즉 왕권은 교회의 방위라는 차원에 한정하여 왕에게 위임한다는 것이다. 제후가 교황의 위임으로 속계를 통치하지만 종교상의 문제가 생기면 신의 대리인교황이 직접적으로 관리 통제하며 왕은 이에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특히 전임 교황인 첼레스티노 3가 막강한 하인리히 6에게 짓눌려 힘겨운 임기를 보냈으나, 이노센트 3에게는 시칠리아 왕국의 왕이 된 3세의 어린 프리드리히 2의 섭정이 되는 등 행운도 따라주었다. 이것이 추후에 그의 아킬레스건이 되지만 여하튼 그의 행보는 꺼리낄 것이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황과 기독교의 권위를 높이고 주변 군주들의 주의를 돌릴 수 있을뿐더러 자신의 명예도 높일 기회가 찾아왔다. 빈사 상태의 예루살렘 왕국이 성지 회복을 외치며 원조를 요청한 것이다. 성지 회복 즉 십자군 전쟁은 전임 교황이 이루지 못한 일이므로 야심많은 교황에게 매력적이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