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악당/십자군 전쟁(이노센트 3세)

십자군 전쟁(4) 이노센트3세

Que sais 2021. 1. 17. 23:31

https://youtu.be/FHUzJnqoLNM

<예루살렘에 십자군 국가 건설>

예루살렘이 점령되었지만 상황은 이상하게 돌아간다.

원래대로라면 예루살렘동로마반환되어야 했고 교황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십자군들은 동로마가 배신자라며 한치의 땅도 줄 수 없다고 버텼다. 그동안 동로마가 십자군에 지원한 것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따라서 예루살렘 총대주교교황 특사가 교황령처럼 예루살렘을 통치할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이 당시 예루살렘 총대주교가 죽어 십자군의 성직자들이 새 총대주교를 선출할 것을 요구했지만 십자군들은 합의를 보지 못했다.

이집트의 파티마의 대군이 온다는 소리에 십자군은 일단 레몽에게 에루살렘의 왕위를 권유했다. 하지만 레몽은 원정 기간동안 인기를 많이 잃은 상태였으므로 체면상 거절했음에도 십자군은 곧바로 왕관 고드프루아에게 바쳤다.

레몽이 이에 반발했지만 세력의 열세를 인정하고 다윗의 탑 요새를 양도하고 철수했다. 그런데 철수 도중 이집트의 파티마 군대가 진격해온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돌아왔다. 그런데 파티마 군은 십자군이 예루살렘 안에 있을 것이라고 방심한 틈을 타 공격하여 파티마군은 궤멸된다.

그 결과 예루살렘 왕국안티오키아 공국에데사 백국트리폴리 백국 등의 가톨릭 십자군 국가가 세워지는 등 대성공을 거두었다고도 평가된다. 여하튼 1차 십자군 전쟁에 참가했던 십자군은 대부분이 고향으로 돌아갔다. 한때 4만이 넘는 병사들이 있었지만 원정 기간에도 상당수가 귀향하여 예루살렘엔 약 300명의 기사와 2,000명의 보병밖에 없었다.

내용은 어떻든 1차 십자군 전쟁은 첫 번째 원정인데도 불구하고 후일의 6차 십자군과 함께 성지를 탈환한 성과를 거둔 십자군이다. 유일하게 왕이나 황제가 참가하지 않았고 당시 '영주'들 로만 예루살렘을 점령해 국가를 건설한 것이다.

1차 십자군 전쟁이 가장 큰 비난을 받은 것은 가톨릭권의 이슬람에 대한 첫 대규모 공격으로 십자군 전쟁 전체를 통해 이때가 가장 유혈과 학살이 심했다는 점이다.

특히 예루살렘까지 행군하면서 도중에 만난 모든 유대인들을 죽였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배반한 민족인 데다 항상 자금을 갖고 있으므로 그들로부터 성전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라고 여겼다.

당시 이슬람 세력은 십자군 전쟁의 원인이 되었던 중앙아시아의 투르크아라비아 반도의 맘루크 왕조로 나뉘어 결속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것이 결정적인 패인이었다.

여하튼 1차 십자군의 성공으로 십자군의 열기는 더욱 높아졌다.

 

2차 십자군 원정(1145 ~ 1149)

1차 십자군 원정이 끝난 뒤 반세기 동안 십자군 국가들은 다소 평온을 유지하면서 루살렘 왕국보두앵 2에 이어 멜리장드 여왕과 풀크 왕의 지배를 받았다.

이들은 보두앵 2에게 예루살렘 왕국의 왕위는 물론 안티오키아 공국의 섭정 자리도 물려받았는데 이슬람 세력들이 점점 세력을 규합하고 있는 상태에서 안티오키아는 매우 위험한 존재였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왕국은 보에몽 2세의 9살 된 딸 콩스탕스34세의 푸아티에의 레몽과 결혼시켰고 레몽안티오키아의 지배자로 삼았다.

1127년 예루살렘과 이웃하고 있던 군벌 이마드 앗 딘 장기가 등장하여 이슬람의 세력을 흡수하면서 모술 지역에 강력한 이슬람 국가를 세우자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풀크 왕다마스커스와 연합하여 장기의 다마스커스 공략을 분쇄했지만 장기의 세력은 건재하여 이에 대응하기 위해 구호 기사단과 여러 십자군 기사들이 성채를 세우고 예루살렘 왕국 남부의 방어를 맡았다. 이때 세워진 요새 중 하나가 유명한 크락 데 슈발리에.

1143년에 풀크 왕이 낙마 사고로 죽는 등 집권세력에 공백이 생기자 장기1144에데사 백국을 공격했다. 결국 장기의 군대가 에데사를 점령하고 대학살을 벌였다. 제일 먼저 수립된 십자군 국가 에데사 백작국은 사라졌다.

공을 들여 세운 십자군 국가가 50년 만에 멸망했다는 소식에 114512교황 에우제니오 31차 십자군의 영광을 재현하고 성지를 지키기 위한 십자군의 결성을 촉구하는 내용을 발표했다.

교황재산 보호, 채무 변제 등을 조건으로 내걸며 특히 프랑스 이탈리아에서 새로운 십자군을 결성할 것을 독려했다. 프랑스는 루이 7의 전폭적인 지지로 상당수의 영주들이 참가를 신청했다.

한편 1차 십자군에서 유대인 학살큰 문제가 되자 이번에는 유대인을 박해해선 안 된다는 내용까지 나왔다. 그럼에도 유대인 학살은 끊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동안 소극적이던 독일에서 십자군 열풍이 불어닥쳐 상당수의 독일 귀족들이 참가를 서약했다. 이때 성지 수복만이 아니라 독일의 엘베 강 건너의 이교도웬드족 정복 십자군도 결성되었고 스페인의 이슬람 교도들을 몰아내기위한 레콩키스타도 구성되었다. 이는 2차 십자군의 목적성지 탈환 뿐만 아니라 구원에 있었기 때문이다.

여하튼 2차 십자군원정(11451149)이 제1차 십자군 전쟁과 원천적으로 다른 것은 1차에서 대귀족들이 참가했지만 이번에는 유럽의 왕들이 직접 참가했다는 점이다.

유럽의 정통 군주들이 십자군에 참여한다고 하자 시칠리아의 왕 루지에로 2 동로마 제국을 공격하면 프랑스 십자군들을 팔레스타인까지 수송해주겠다고 제안했다. 이는 동로마의 실체가 제1차 십자군 전쟁으로 실력이 탄로났기 때문이다. 즉 자신에게 동로마 영토를 할애해달라는 뜻인데 루이 7는 부용의 고드프루아가 걸었던 육로를 선택했다.

이와 같은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나는 단초는 동로마의 황제 마누일 12차 십자군의 결성이 동로마에 결코 유익하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동안 술탄국과 평화협정을 맺어 제국의 안정을 꾀했는데 이는 동로마가 서유럽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십자군은 점령한 영토를 동로마에 귀속시킨다고 약속했음에도 이를 어기고 반환하지 않았다는 전례를 보아 매우 위험스럽다며 투르크족과 정전 협정을 맺은 것이다. 내용은 어떻든 동로마의 이런 협정은 서유럽으로 보아 배신이었다.

그런데 독일의 콘라트 3세 십자군11479월에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하여 교외에서 국지적인 약탈을 계속했다. 콘라트 3가 프랑스 십자군을 기다리지 않고 안티오키아로 이동했다. 그런데 투르크군과 조우하여 2만 명 중 18,000명을 잃을 정도로 대패했다.

반면 루이 7세의 군대114710월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는데 부하들이 동로마를 공격하자고 했다. 루이 7는 기독교 제국을 공격하는 일을 거부하고 소아시아로 이동했다. 그런데 니케아에서 콘라트 3세와 합류해보니 독일군은 완전 궤멸상태이므로 이번 원정의 성패프랑스 군대에게 달려있다는 것을 깨닫고 위험한 아나톨리아 중부 대신에 에게 해와 지중해 연안의 동로마 영토를 따라 행군하기로 했다. 이때 콘라트 3는 중병에 걸려 콘스탄티노플에서 치료한 후 팔레스타인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홀로 남은 루이 7가 동로마 내부에서도 투르크 군대의 공격에 시달리자 투르크와 마찬가지로 동로마 도시들을 공격했다. 특히 루이 7동로마가 투르크와 연합하여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의심하였고 그런 의심은 십자군 전체확산되었는데 여하튼 루이 7는 우여곡절 끝에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그런데 십자군들은 예루살렘의 우방다마스커스 공략했지만 결과는 참패였다. 결국 십자군은 예루살렘의 우방적으로 돌리는 성과를 얻고 회군했다. 이것으로 장기 왕조시리아-자지라 전체의 패권을 쥐게 되며 장차 아이유브 왕조의 성립으로 십자군 세력이 파멸하는 단초가 된다.

십자군의 실패는 그야말로 유럽에 충격을 주었다. 기독교의 결론은 간단했다. 그리스도교 세계가 죄를 지어서 하느님이 유럽에 승리를 허락하지 않는 것이라며 유럽의 죄를 씻어야 한다는 것이다.

 

<살라딘 등장>

여기에서 이슬람의 영웅살라흐 앗 딘 유수프(1137?1193)을 설명한다. 그는 제3차 십자군과 직결되는데 3차 십자군 전쟁(11891192)직전인 1187년 십자군을 물리치고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결국 3차 십자군전쟁이 실패로 돌아가는 치명타를 날린 장본인으로 살라딘으로 보다 잘 알려져 있다.

살라딘이라크 북부의 티크리트에서 쿠르드족 군인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대부터 모술과 알레포의 영주인 이마드 앗 딘 장기(Imad ad-din Zangi)와 그의 아들 누레딘을 섬겼다. 누레딘시리아 다마스쿠스를 중심으로 지하드의 기치 아래 무슬림들을 단합시켰고, 십자군과의 전쟁에서도 많은 승리를 거두며 '성왕(聖王)'으로 칭송받았다. 살라딘의 아버지 아이유브는 동생인 시르쿠와 전장에서 많은 공을 세웠기 때문에 살라딘 역시 젊어서부터 누레딘의 측근이 되었다.

살라딘이집트 정복 때 삼촌 시르쿠의 부관으로 이집트군과 십자군을 동시에 상대하며 4차례에 걸친 어려운 전쟁 끝에 이집트를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총사령관인 시르쿠급사하자 살라딘이집트의 새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이집트에서 살라딘을 지지한 것은 그의 능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살라딘은 그들의 기대와 달리 이집트 전역을 관장하며 수단과 요루단, 예멘 일대까지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한다. 이후 살라딘의 세력이 커지자 누레딘이 이를 경계하여 이집트를 공격하려 했으나 누레딘이 사망하여 수포로 돌아간다.

살라딘은 이를 기회로 삼아 누레딘의 아들 보호자를 자청하고 누레딘의 미망인과 결혼한다. 결론은 누레딘의 모든 것을 살라딘이 접수하고 아이유브 왕조를 탄생시킨다. 아이유브 왕조는 그의 통치시에 동쪽으로는 시리아 이라크 북부, 서쪽으로는 튀니지 일부까지 세력을 확장한다.

살라딘의 급성장에 위기를 느낀 예루살렘 왕국동로마와 연합하여 이집트로 해군을 통해 원정대를 보냈지만 태풍으로 실패하였고 일부 십자군 국가들이 살라딘을 공격하려다 장병수가 많아 철수했다는 말도 있다.

그런데 살라딘자지라 원정 중 십자군이 다마스쿠스 일대를 침공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이에 개의치 않고 장기 왕조의 심장부인 모술을 포위하여 118211월 점령했다. 또한 살라딘1183년 티그리스 강변의 견고한 성벽도시인 디야르바크르를 점령하였다. 이곳에 100만권의 책이 있다고 알려진 도서관이 있는데 살라딘은 이들 책을 거의 전부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켰다.

이후 그는 정복전쟁을 계속하여 북아프리카, 이집트, 아라비아, 예멘, 시리아, 이라크 북부에 이르는 거대한 영토를 가진 제국을 만들어 사실상 아랍을 통일한 인물이다. 그런데 그는 아랍을 통일하는 동안 가능한 한 십자군과 격돌하지 않고 휴전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는 이슬람 반발 세력들을 흡수, 통합하는데 주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1187십자군의 도발로 휴전이 깨지자 현재 이스라엘 북동부인 하틴 전투에서 예루살렘 왕국 왕 기 드 뤼지냥 휘하의 십자군 주력을 궤멸시키고 예루살렘을 함락시켜 예루살렘 왕국을 멸망시킨다. 그의 정복으로 3차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