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악당/십자군 전쟁(이노센트 3세)

십자군 전쟁(3) 이노센트 3세

Que sais 2021. 1. 17. 23:25

https://youtu.be/Kem9_PvKNR0

<십자군 전쟁의 역사>

십자군 전쟁9차례나 걸쳐 일어난 기독교와 회교도 간의 대혈투라 볼 수 있다.

이들 전투가 기본적으로 성전종교를 표방했지만 역사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고 특히 4차와 5인류역사상 가장 큰 악행이 저질러진 전쟁이라 볼 수 있다. 전쟁 자체를 선한 면으로 포장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이 아니지만 그 중에서도 비난받아야 할 특정 전쟁이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므로 세계의 악당으로 치부되는 이노센트 34차와 5차 십자군 원정을 본격적으로 다루기 위해 다른 십자가 전쟁의 개황을 먼저 설명한다.

곧바로 부작용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전쟁에 대한 준비도 전혀 없이 자신들의 생활 터전에서 무조건 십자군에 합류하기 위해 떠났기 때문에 성지까지 가는 여정 동안 생존하기 위한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예루살렘을 가기 위해서는 먹고 자야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이 모두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고 결국 십자군에 참여하기 위해서라도 길다란 여정 동안에 구걸하거나 도둑질을 해야만 했다.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노상강도라도 되어 자신의 앞가림을 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 중도에서 살해당하기 일쑤였다.

원정에 참가한 사람들의 성향도 문제였다. 그야말로 성지를 탈환해야 한다는 신앙심으로 뭉친 정직한 교인들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애당초 신앙심과는 거리가 멀었다. 부유한 예루살렘에서 한몫을 챙겨 자신의 처지를 바꿔보겠다는 목적을 가진 파산한 빚쟁이, 가난한 귀족, 부랑자들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당시의 상속은 대부분 장남에게 재산이 물려지므로 차남 이하의 경우 빈털터리가 되기 십상이었기 때문에 재산을 확보하기 위한 명목으로 십자군에 지원했다. 그들은 예루살렘 탈환이라는 명제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십자군 전쟁에 대해서는 많은 자료들이 있는데 이곳에서는 <나무위키>, <위키백과>, <위키피디아> 등에서 많은 부분을 참조하였다.

 

1차 십자군(10961099)

 

1차 십자군은 말 그대로 십자군의 첫 번째 원정인데 사실 유럽인들은 십자군 전쟁이 200여년이나 지속될 줄은 몰랐다. 여하튼 1차 십자군은 여러 부류로 구성되어 엄밀하게 말해 오합지졸이 모였지만 소위 민중십자군으로 불린다.

그러나 십자군 모두 맹탕으로 구성된 것은 아니다.

교황 우르바노 2의 절묘한 선동으로 유럽의 유력한 제후들이 대거 참가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원정군 중에는 로렌 공작 부용의 고드프루아, 그의 형 불로뉴 백작 외스타슈 3, 불로뉴의 보두앵, 플랑드르 백작 로베르 2,  툴루즈 백작 레몽 4, 노르망디 공작 로베르 2 등도 참가했고 이들 외에도 중소 영주들도 참여했다.

문제는 이들을 누가 지휘하느냐인데 실질적인 최고 지휘관은 레몽과 동행한 교황의 대리인이자 정신적 지주인 르 퓌(Le Puy)의 주교 몽테유의 아데마르(Adhemar de Monteil)였다.

여하튼 십자군 지휘관들도 원정군이 오합지졸임을 잘 알고 있으므로 이들을 어느 정도 교육시킬 필요가 있었다. 특히 콘스탄티노플에서 원하는 것은 맹목적인 종교에 추종하는 사람이 아니라 통제 가능한 정예군대이므로 나름대로 예루살렘으로 진군하기 위한 계획도를 작성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군수 지원이므로 행군로 상의 거점마다 물자를 비축함은 물론 상인들에게 시장을 준비시켰다.

이 원정은 엄밀히 말하여 종교전쟁이므로 십자군의 편의를 위해 강력한 통제안정적인 물가를 유지케 했으며 현지 주민에게는 이러한 시장 접근이 금지 되었다. 특히 원정을 요청한 동로마로부터 막대한 군자금을 지원받아 콘스탄티노플로 향하는데는 문제가 없었다.

그러므로 3만에서 최대 8만으로 추산되는 원정군이 다양한 경로로 편성되었음에도 대체로 큰 말썽 없이 신속하게 대군이 구성되었다. 이는 당시에 십자군 원정이 얼마나 중대한 목적으로 진행되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동로마에 가장 처음 도착한 것은 베르망두아의 위그로, 그는 프랑스 국왕 앙리 1의 차남으로 바리(Bari) 에서 아드리아 해를 건너려했지만, 그만 폭풍을 만나는 바람에 함대가 난파되어 로마 황제 알렉시오스 1가 그를 구출했다. 황제위그를 극진하게 대접하면서 그들이 정복하는 모든 영토를 동로마 제국에 양도할 것을 요구했다. 병력도 적으므로 그는 황제의 요청을 수락했다.

한편 1차 십자군에서 맹활약하는 고드프루아는 그의 영지를 파는 등 막대한 재정 손해를 감수하고 십자군에 참여하여 빠른 속도로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다. 알렉시오스 황제고드프루아도 황궁에 초청하여 위그와 같은 요구를 하려했으나 위그의 선례를 듣고 그의 초청을 거절했다. 화가 난 알렉시오스 1는 고드프루아가 계속 거부하자 그의 군대에게 시장 이용을 금지시켰다. 군수 지원이 끊기자 분노한 고드프루아는 군사들을 데리고 콘스탄티노플 교외를 약탈했고 알렉시오스가 이에 대응하면서 일시적으로 시장을 열어주었지만 결정적인 상황 변화가 없자 놀랍게도 고드프루아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공략에 실패하자 황제와 타협하고 위그와 마찬가지로 그가 예루살렘에서 점령한 영토를 양도한다고 서약한 후 바다를 건넜다. 이후 보에몽도 바다를 건너 다른 십자군과 합류했다.

십자군에 합류한 툴루즈 백작 레몽 4나르본 공작도 겸하는 등 남프랑스의 13개주를 지배하는 대귀족으로 그는 십자군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다. 그런데 그는 동로마에 도착하기 전 현재의 동구권 곳곳의 부족과 충돌을 벌이면서 어렵게 동로마에 도착했다. 문제는 알렉시오스 1가 다른 십자군 원정대와 마찬가지로 그가 동아시아에서 점령한 영토를 넘겨달라고 했는데 그는 단호하게 거절했고 다른 십자군 지도자들의 중재도 거부했다. 그러면서 레몽황제가 직접 십자군으로 친정한다면 그의 요청을 들어줄 수 있다고 말했는데 알렉시오스가 그럴 의사가 있지만 당장은 곤란하다고 하자 다소 완화된 조약을 맺었다. 이어서 노르망디의 로베르, 블루아의 에티엔, 플랑드르의 로베르가 이끄는 십자군이 합류했는데 이들도 알렉시오스에 서약을 맹세했다. 십자군 원정의 핵심 중 레몽만 황제와의 서약서이견을 단 것이다.

그들의 만행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예루살렘을 공격하기 전에 그들이 자행한 가장 악명 높은 사건은 마라의 대학살이었다. 프랑스 출신의 기사 보에몽이 이끄는 제1차 십자군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 있는 마라 성을 포위하고 곧바로 공격할 테니 목숨이 아까운 자와 노약자, 여자, 어린아이들은 궁전 안으로 피난하라고 최후통첩을 보냈다. 전쟁에서 있을 수 있는 피할 수 없는 학살을 미연에 방지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최후통첩수비병들을 교란하기 위한 위장 술책이자 거짓말에 불과했다. 그들은 성안으로 진격하자마자 약속과는 달리 닥치는 대로 약탈과 살육을 저질렀다. 그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성안에 피한 사람들을 모두 살해했고, 놀랍게도 살아남은 자는 아랍인들에게 노예로 팔았다. 단 사흘 동안 마라에서 학살당한 사람은 무려 30여만 명에 달했다.

마라를 점령한지 1개월, 식량이 떨어지자 그들은 이슬람교도들을 죽여 요리해 먹기 시작했다. 이교도인 이슬람인들은 사람이 아니라 동물이므로 식량으로 먹어도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그 동물들을 살해하면 금은보화를 얻을 수도 있다고 믿었다. 이슬람인들이 금은보화를 삼켜 뱃속에 간직한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4만 여명에 달하는 1차 십자군 행로에 큰 걸림돌은 유서깊은 안티오키아. 안티오키아는 인구 4만에 거대한 성벽과 400 개의 망루를 갖춘 대도시로 1085년에 튀르크가 점령한 곳이었다. 문제는 안티오키아에 6,0007000명의 장병 밖에 없다는 점이다. 특히 인근 회교도들은 그들에 대한 지원을 주저했다.

이는 당시의 중근동 이슬람 세계 전체의 문제였다. 말리크 샤 11092년 말에 죽은 이후 셀주크 제국의 영역은 후계 다툼과 반란, 내전 등으로 매우 혼란스러웠고셀주크 제국 이집트 파티마 왕조 등의 공격까지 받고 있었다. 이는 과거와 달리 모든 도시들이 독립 왕국이나 다름없으므로 무슬림들이 십자군에 거의 대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하튼 안티오키아는 철저하게 십자군과 대항하여 공성전을 벌였는데 그야말로 십자군식량부족 등으로 자신들의 말을 잡아먹었고 적군의 시체를 먹기도 했다.

여기에서 유명한 보에몽과 레몽이 활약하여 결국 안티오키아를 함락했다. 이것이 사실 가장 악랄한 장면으로 십자군은 튀르크인들을 보이는 족족 죽였고, 이에 휘말린 아르메니아인들과 정교도들도 많이 죽었다.

십자군의 예루살렘 진격이 만만치 않은데 회교도시아파와 수니파로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 관건이다. 그러므로 마다스커스의 수니파 이슬람 영주들은 십자군이 시아파인 파티마를 공격하자 이를 환영했다.

그런데 파티마십자군에게 동맹을 맺어 튀르크와의 공동 전선을 펼 것을 제안했지만 십자군은 이를 애매하게 거절했다. 파티마는 이즈음 자신들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는 조건으로 다시 동맹을 요청했다. 한편 십자군의 숫자가 많다는 것을 안 시돈, 티레, 하이파 등은 십자군과 동맹을 맺었으므로 십자군은 큰 희생없이 예루살렘으로 이어지는 가도를 확보했다.

 

이후 예수의 고향인 베들레헴이 십자군의 수중에 들어왔다. 반면에 예루살렘에는 파티마에서 파견한 예루살렘 총독 이흐티카르가 십자군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이흐티카르의 방어는 철통같아 십자군이 계속 격퇴되었는데 이에 고드프루아가 합류하여 결국 예루살렘은 점령된다. 예루살렘은 희생자들의 피가 무릎까지 올랐다는 말도 있을 정도로 초토돠되었는데 이때 희생자가 최소한 1만 명에서 7만 명이라고 한다. 어느 숫자든 대 학살임은 틀림없는데 한가지 아이러니한 것은 이흐티카르가 예루살렘을 수비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기독교인들이 배반할 우려가 있다며 모두 쫓아냈다는 점이다. 이들은 예루살렘의 대학살에서 살아났음은 물론이다.

십자군의 약탈과 만행은 계속되었고 10996월 드디어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이 전투는 6주일간 계속되었는데 드디어 예루살렘을 점령하자, 여기서도 십자군은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주민들을 무차별로 죽였다. 당시의 참혹함에 대해 종군했던 프랑스 성직자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너무나 처참한 광경이 벌어져 있었다. 큰 거리와 광장엔 사람의 머리며 팔다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십자군은 시체를 아랑곳하지 않고 전진했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성지순례를 방해했던 자들로 더럽혀졌던 이곳이 그들의 피로 씻겨져야 한다는 신의 심판은 정당할 뿐만 아니라 찬양되어야 한다.”

 

성직자조차도 성전의 이름으로 십자군의 대량학살을 당연하게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