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악당/십자군 전쟁(이노센트 3세)

십자군 전쟁(8) 이노센트3세

Que sais 2021. 1. 17. 23:39

https://youtu.be/l7GKQg0iP_k

 <동로마 점령>

12036십자군-베네치아 연합군의 대함대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앞 마르마라 해에 도달했다. 동로마로서는 황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로마베네치아 공화국과 동맹을 맺고 있으며 교황청에서 알렉시오스 황자를 지원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알렉시오스 4가 되었다며 대군을 끌고 온 것이다.

결국 동로마난공불락의 성을 배경으로 십자군-베네치아 연합군을 독자의 힘만으로 격퇴시켜야 했다. 십자군-베네치아 연합군711, 1차 공격 그리고 7172차로 총공격을 감행했다.

그런데 황제인 알렉시오스 3가 직접 지휘하면서 공방전은 격렬했지만 동로마군은 십자군 연합군의 공격을 적시적소에서 방어했다. 한때 베네치아 공화국의 엔리코 단돌로의 분전으로 25개의 망루가 점령되기도 했지만 동로마가 곧바로 이들을 격퇴했다.

그러므로 전투자체는 동로마의 승리였다. 그런데 엉뚱한 문제가 사건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연합군이 퇴각하면서 불을 질렀는데 이것이 대화재로 번지면서 피해가 커지자 시민들이 황제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결국 알렉시오스 3는 원군을 청하기 위한 명분으로 상당한 병력과 자금을 갖고 탈출했다.

알렉시오스 3가 탈출하자 시민들은 과거 황제였던 이사키오스 2와 연합군이 내세운 알렉시오스 4 부자공동 황제로 추대했다. 두 사람이 내용은 어떻든 부자지간이므로 명분도 나쁜 것은 아니다. 로마 측으로서는 더 이상 공격받을 여지가 없고 연합군 측으로서도 자신들이 추대한 알렉시오스 4를 통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서로 타협한 것으로 사태는 일단락되는 듯 했다.

그런데 아들 덕에 제위를 되찾은 이사키오스 2이지만 아들이 십자군-베네치아 연합군에게 엄청난 빚을 진 것을 알았다. 한마디로 아들이 제시한 그 어떤 것도 그가 간단하게 들어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더불어 그들이 황제로 콘스탄티노플을 장악하고 있지만 탈출한 적법한 황제인 알렉시오스 3가 수도 밖에서 건재한다는 것도 문제였다. 더불어 그 많던 돈도 막상 창고를 열어보니 무일푼이었다. 알렉시오스 3세 즉 알렉시오스 4세의 형이 탈출할 때 비축금을 모두 갖고 콘스탄티노플에서 탈출한 것이다. 한마디로 군사력 파견은 물론 교회 통합도 불가능했다.

방법은 세금을 올리고 황실의 보물과 성물을 팔고 교회의 재산을 징발하여 돈을 마련하려 했으나 이번에는 시민들이 불만을 터트렸다. 특히 많은 자산을 갖고 있는 교회가 자신들의 재산이 침해되는데 알렉시오스 4의 말을 들으려하지 않았다.

가장 큰 치명상은 알렉시오스 4는 십자군에 의해서 황제가 된 만큼 십자군이 물러나면 반란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 십자군의 주둔을 허용하고 그들에게 돈을 추가로 약속했고 특히 상술로 유명한 베네치아인들이 사사건건 내정에 간섭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사건은 엉뚱하게 비화되어 시민들 간에 분쟁이 생겨 시내에 거주하는 라틴인들이 살해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무슬림을 비롯하여 정교회인까지 연합군에게 학살되거나 약탈당했다. 결국 분노한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자 연합군은 도망치기 위해 불을 질렀는데 이것이 대화재로 또 다시 번져 수일 동안 도시가 불탔고 시민들과 연합군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그런 와중에서 황제 경호원알렉시오스 두카스쿠데타를 일으켜 황제 부자를 구금하고 스스로 알렉시오스 5로 선포하였다. 이때 이사키오스 2사망했다.

알렉시오스 5는 연합군 즉 십자군에 적대적이므로 군대를 모집하고 성벽을 수리하면서 연합군을 공격했다. 그러나 알렉시오스 5의 공격은 실패하고 알렉시오스 4교살되었다.

베네치아의 엔리코 단돌로가 연합군의 주도권을 쥐자 아예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여 전리품을 얻자는 결론을 도출했다. 단돌로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키면, 경쟁 상대를 동로마에서 쫓아내고 흑해 무역을 독점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연합군이 공격했음에도 콘스탄티노플의 방어는 생각보다 단단했다. 이에 연합측은 본격적인 공성전을 준비하여 최후의 공세를 가했는데 이를 2차 콘스탄티노플 공격이라고 한다. 황제가 직접 지휘하고, 시민들도 함께 저항했지만 결국 1204412일에 연합군이 성벽을 점령하여 교두보를 확보하자 알렉시오스 5는 총알같이 콘스탄티노플에서 탈출했다. 역사상 처음으로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 것이다.

이것으로 십자군 역사상 가장 악명높은 학살과 약탈이 시작되었다. 아민 말루프는 그의 책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조금이라도 값나가 보이는 물건은 약탈되는 것은 물론 교회와 성소도 예외없었다. 남녀노소, 귀족, 성직자들을 가리지 않고 폭행, 살해, 강간, 납치 등이 가해졌다. 소녀, 처녀, 유부녀는 물론 고귀한 귀족 여성들에 심지어 수녀들까지 끌려나와 능욕 당하였다

고대 로마 때부터 전해 내려온 예술품, 유물, 성물도 마찬가지였으며 황제들의 무덤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판토크라토 수도원의 묘역에 있는 황제의 관들이 공개되어 부장품들이 약탈되었는데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유골조차 이때 파손되었다. 천여 년을 이어 오던 성당의 많은 성화들도 이교도가 그렸다고 하여 파괴되었다.‘

 

성소피아 사원의 문에 장식된 금과 은도 벗겨졌다. 그 현장에 있었던 연대기 작가 빌라르두앵이 당시의 참상을 다음과 같이 적었을 정도였다.

 

세상이 시작된 이래로 어느 도시에서도 결코 일어날 수 없을 만큼 엄청났다.’

 

콘스탄티노플의 약탈3일에 걸쳐 철저하게 이루어졌다. 이는 고대에 점령한 곳을 약탈하는 기준이었다. 놀라운 것은 십자군과 베네치아 연합군90만 마르크에 해당하는 전리품을 약탈하여 당초 예상한 것보다 커다란 수익을 얻었다는 점이다.

학자들은 이와 같이 엄청난 약탈은 수십만 명의 시신을 토대로 한 것으로 당대의 참상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다고 적었다. 한마디로 당대 가장 부유하고 유서 깊은 황제의 도시는 성지수복을 구호로 내세운 십자군에게 몰락한 것이다.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후 라틴 제국을 건설했고 탈출에 성공한 동로마인들이 니케아를 비롯한 망명정부를 세웠다.

여기에서 이노센트 3이율배반적인 행동이 나온다.

그는 처음에 십자군이 기독교도인 자라시 공격하는 것을 반대했다. 또한 콘스탄티노플 공격에 반대하는 제스처도 보였다. 그런데 콘스탄티노플에서 십자군에 의해 상상할 수 없는 악행이 저질렀음에도 이들의 행동을 칭찬했다. 한마디로 동로마의 파멸은 기독교 세계에서 서로마 교황청의 우위를 증명하는 좋은 증거였고 종교 통일을 이룰 수 있는 기회였다. 결론적으로 그의 생각대로 교회 통일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로서 동로마의 파멸은 나쁜 일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는 정략적으로 십자군 중에서 특히 악행을 저지른 몇몇 제후를 파문하는 제스쳐를 보였다.

베네치아는 자신의 행동을 뻔뻔스럽게 옹호했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기본이 장사꾼이므로 투자금을 회수해야하는데다 자신들이 십자군과 함께 동로마를 무작정 침공한 것이 아니라 동로마의 알렉시오스 4세의 요청을 받아 알렉시오스 3세와의 내전에 개입했다는 것이다.

더구나 십자군에 여러 가지 혜택도 주었는데 그들이 약속받은 이권 중 아무 것도 이행받지 못했으므로 억지로라도 받아낼 권리가 있었다. , 4차 십자군의 잘못도 명백하지만 4차 십자군을 내전에 끌어들인 것은 동로마이므로 자업자득이라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각자 선악에 대해 생각해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