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악당/십자군 전쟁(이노센트 3세)

십자군 전쟁(10) 이노센트3세

Que sais 2021. 1. 17. 23:41

https://youtu.be/c8C2MDzzkJk

이노센트 3세와 호노리우스 3를 이은 그레고리우스 9는 교황이 되자마자 우선 프리드리히파문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2는 교황의 파문에 전혀 구애하지 않았다. 교황의 파문에도 건재 한다는 것은 막강한 교황권에 공개적으로 도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화가 난 교황은 황제에게 공개장을 써서 황제의 이단적인 행동은 물론 개인적인 비행공개했다. 그러자 프리드리히가 예상하지 못한 반격을 가해왔다. 그는 교황의 서신을 조롱하면서 교황과 유럽 각 국 왕들 간에 벌어진 불화의 시시비비를 지적하더니 전 유럽의 절대적인 지배자가 되려는 교황의 야심을 막기 위해서는 왕후들이 동맹을 맺어 교황에 대항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성직자들의 오만과 불신앙을 비난하고 당시의 모든 부패교황청으로부터 비롯된다고 역설했다.

그가 특별히 강조한 것은 교회를 정화시키기 위해서라도 교회 재산을 몰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당시 교회가 갖고 있는 토지유럽 전체의 거의 1/4이나 되었다. 당시 교회를 신뢰하고 있던 신자들이 자손이 없는 경우 교회에 토지를 기증하는 것은 관례였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가 공개적으로 교회 재산을 압수해야 한다는 선언서는 그 후 왕들이 교황에 대들 수 있는 교과서로 결국 교황권을 추락시키는 결정적인 자료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유럽에서 불꽃처럼 타오른 종교개혁이노센트 3로부터 비롯한다는 일부 학자들의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교황권수호하기 위해 극단적인 조치를 취한 것이 부메랑이 되어 결국 교황권의 추락을 초래하는 요인이 되었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5차 십자군(12171221)

1차 이집트 원정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노센트 3가 사망한 다음해부터 햇수로 따져 5년에 걸쳐 일어난 원정이다. 원래 이 원정 역시 이노센트 3가 직접 주도하여 일으킨 십자군이다. 그것은 그가 주선한 4차십자군이 가라는 성지는 안 가고 엉뚱한 콘스탄티노플공격하여 기독교계를 엉망으로 만들자 이를 만회하기 위해 추진한 것이다.

하지만 준비 와중에 이노센트 31216년에 사망하자 교황 그레고리 9가 이를 이어받아 1217년 원정군을 출발시켰다. 이때 헝가리 왕 언드라시 2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드 6키프로스 왕 위그 등이 참석했는데 이노센트 3세와 알력을 빚은 프리드리히 2 참가가 관건이었다.

교황 그레고리 9프리드리히 2를 다독거리기 위해 조건부로 로마제국의 황제로 임명했다. 프리드리히가 로마의 황제로 임명되는 조건은 십자군을 창설하고 동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로마의 황제가 된 프리드리히 2세는 십자군 동원을 약속했지만 이리저리 십자군 파견을 이행하지 않자 교황은 프리드리히를 파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리드리히가 십자군을 동원하지 않자 이미 동원된 십자군의 총사령관으로 예루살렘 왕국의 왕이었던 장 드 브리엔을 임명한 후 시리아를 공격하도록 주문했다.

결론을 먼저 말한다면 원정은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이때 예루살렘의 성벽이 파괴되는 성과를 거두었다고 선전되었으나 이는 이슬람 측이 도시를 비우면서 허물었기 때문이다.

결국 실속없는 원정이 되자 1218년 원정에 참가한 제후들이 뿔뿔이 귀환했다.

그러나 잔존 십자군이 아이유브 왕조가 다스리는 이집트의 항구 도시다미에타를 공략하여 다소 성과를 거둔다. 술탄 알 카밀의 반격을 격퇴하고 2년간의 포위 공격으로 다미에타를 함락시키는 데는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더 이상 전투할 여력이 모두 소진되었으므로 이들은 1221년까지 다미에타에서 웅거하면서 프리드리히 2세의 지원을 기다렸으나 프리드리히 2세는 오지 않고 휘하의 바이에른 공작 루트비히 1세의 지원군만이 왔다.

십자군은 그래도 지원군에 힘입어 카이로로 진격하였으나나일강이 범람하는 우기에 공격하는 실수를 저질러 원정군대패했다. 이후 포로들은 다미에타를 반환하는 조건으로 석방되고 5차 십자군실속없이 종결되었다.

이때 '동방의 수수께끼의 기독교 왕국인 프레스터 존이 십자군을 도운다'는 전설이 퍼졌으나 이는 몽골군으로 실제로 몽골군은 십자군을 직간접으로 돕기도 했다. 몽골군회교도를 공격하는데 회교도의 적인 기독교는 몽골군으로 볼 때 우군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어린이 십자군

십자군 전쟁에서 가장 이상하고도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일어나는데 소위 어린이 십자군이다. 일반적으로 어린이 십자군또는 소년십자군이라고 번역하지만 구성원이 어린이였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pueri'어린이외에도 신의 아이들또는 가난한 사람들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들에 대한 자료에 순례자들의 빈곤을 강조하는 내용이 많이 있는 것으로 보아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또한 여기에서 사용되는 어린이는 나이가 어린 사람이 아니라 결혼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주장도 있다.

여하튼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5차 소년 십자군은 성지 탈환에 대한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프랑스의 양치기 소년 스테판(Stephen)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4차 십자군 전쟁이 끝난 지 몇 년 후인 1212 당시 12살의 스테판은 프랑스 왕 필립 아우구스투스를 찾아가 그리스도직접 썼다는 편지를 보이면서 그리스도가 자신이 양을 돌보던 산에 나타났다고 주장했다. 그리스도스테판에게 십자군에 참가해 자신의 성스러운 말을 전하라고 지시했다며 자신을 따르는 십자군들에게는 바다를 갈라 예루살렘으로 인도해줄 것이므로 타고 갈 것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하지 말라고 주장했다.

필립 왕은 그의 말을 믿지 않고 집으로 돌려보냈는데 스테판은 프랑스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던 생드니 성당 앞에서 자신의 주장을 진지하게 설교하기 시작했고 수많은 아이들이 그를 따랐다.

스테판은 그의 추종자들에게 4주일 안에 벤돔에 모일 것을 지시했는데 12126벤돔에 집결한 아이들은 무려 3만 명이나 되었다. 학자에 따라 1만 명 정도라는 설명도 있지만 이 숫자도 엄청난 것임은 물론이다.

대부분 소년들이었지만 소녀들의 숫자도 적지 않았고 사제들도 일부 참여하고 있었다. 신앙심으로 뭉친 프랑스 소년들이 중심이 된 십자군은 바다가 갈라지는 기적이 있을 것이라는 프랑스 남부의 마르세이유 항구에 도착했다.

그런데 마르세이유 항구에 도착했지만 어린 십자군 전사들이 지나갈 수 있도록 바닷물은 갈라지지 않았다. 일부 아이들은 스테판이 자신들을 속였다며 집으로 돌아갔지만 많은 아이들이 바닷물이 갈라지기를 고대하며 계속 기다렸다.

이때 악독한 상인 윌리엄과 휴가 어린 십자군들에게 자신들의 배로 성지까지 공짜로 태워다 주겠다고 제안했다. 스테판은 아이들을 대표해서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7척의 배를 타고 마르세이유 항을 출발했다. 이들의 소식은 18년이 지나도록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스테판의 이야기는 독일 최서부 라인강 중류의 서쪽 연안인 라인란트 지방까지 알려졌고 니콜라스(Nicholas)라는 소년이 쾰른에서 새로운 예수의 메시지를 전했다. 니콜라스는 어른들이 여러 번 성지 회복에 나섰지만 이슬람교도들로부터 예루살렘을 찾지 못했던 이유는 순수한 마음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라며 순수한 마음을 갖고 있는 어린이들이 나선다면 예루살렘은 순식간에 해방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가 특히 지적한 것은 이전의 십자군들은 이교도들을 정복하려고 했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 것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은 그들과의 전쟁을 통하지 않더라도 개종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니콜라스 역시 자신을 따르면 바다가 갈라져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 열릴 것이라는 스테판의 주장을 반복했다. 곧바로 라인란트 지방은 십자군 운동의 열기로 가득 찼고 수천 명의 아이들이 십자군에 참가했다. 그들은 쾰른에서 모여 북이탈리아의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행진했다. 너무 많은 인원 때문에 두 개 그룹으로 나뉘어 한 그룹은 니콜라스가 직접 이끌고 서스위스에서 알프스산맥을 넘어 제노바에 도착했고 다른 한 그룹은 안코나에 도착했다.

문제는 니콜라스의 말처럼 바다가 열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대다수의 아이들이 니콜라스가 성지로 갈 방법을 찾지 못하자 속았다며 독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니콜라스는 남아 있는 아이들을 데리고 피사로 거쳐 이탈리아 남쪽인 브린디시를 향해 이동했다. 그런데 그들을 성지까지 태워줄 배를 다행하게도 탈 수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들이 배를 타고 난 후 어떤 활약을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안코나에 도착한 그룹은 보다 상황이 나빴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방법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자 각자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독일로 되돌아가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무장이라야 기독교 사상뿐인 어린아이들은 중도에서 기아로 사망하든가 납치되어 소문도 없이 사라졌다.

니콜라스를 따라 소년십자군으로 참여했다가 집에 도착한 어린아이들의 숫자가 아주 적다는 것이 알려지자 부모들은 십자군으로 참가한 자신의 아이들이 비참한 운명에 처해졌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어린이 십자군의 길잡이라고 볼 수 있는 니콜라스의 행방을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므로 결국 부모들은 니콜라스의 아버지를 잡아 교수형에 처한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스테판을 따라 배를 탄 소년 십자군에 대해서는 그들이 출발한 지 18년 후인 1230도에 진상이 알려졌다. 스테판을 따라 갔던 젊은 사제 중에 한 명이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는 소년십자군을 수송할 책임을 진 상인이 항해 도중 아프리카의 사라센 함대와 마주치자 5척에 타고 있던 소년들을 모두 그들이 적으로 간주하는 아랍인들에게 노예로 팔아 버렸다고 증언했다. 일부의 아이들은 이집트로 팔려갔고, 기독교 노예들이 비싼 값으로 팔리는 바그다드까지 끌려가 평생 노예로서 남은 생애를 마친 아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2척은 폭풍을 만나 난파당했기 때문에 그나마 노예로 팔리지 않고 명예로운 죽음을 맞이했다.

놀라운 것은 일부 이슬람교도들의 태도. 그들은 소년 십자군이 참전하게 된 이유를 알고 노예로 팔린 소년들 중에서 700명이나 아무런 조건 없이 풀어주었다고 한다.

이 문제는 워낙 충격적이므로 그동안 학자들이 부단히 진상을 추적했는데 큰 틀에서 이런 사건이 있었던 것은 사실로 인식한다.

특히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독일의 한 양치기7,000명 정도의 사람들을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 제노바까지 간 일이 있으며 프랑스의 양치기 소년의 이야기도 대동 소의하다.

여하튼 둘 다 그들이 예언한 대로 바닷물이 갈라지지 않자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져 상당수 어린이들이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특히 니콜라스와 스테판이라는 소년 이름보다는 이런 사건이 있었으며 당시 참가한 어린아이 상당수가 그야말로 비참한 말로를 맞았다는데 동조한다.

어린이 십자군사건은 이노센트 3와는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다고는 하지만 그가 교황일 때인 1212이므로 십자군의 명예를 가장 훼손시킨 3대 사건자라시와 콘스탄티노플의 공격, 카타리파의 학살, 어린이 십자군 사건이 일어난 것은 사실이다.

이노센트 3가 교황임에도 불구하고 악인으로 치부되는 이유는 그의 비뚤어진 신앙심으로 기독교의 명성을 훼손시켰음은 물론 수많은 순수한 기독교인들이 비명에 사라지도록 앞장서서 사주했기 때문이다. 아랍권에서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과 비교되는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