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악당/십자군 전쟁(이노센트 3세)

십자군 전쟁(9) 이노센트3세

Que sais 2021. 1. 17. 23:40

https://youtu.be/PLamDtCui9E

<카타리 파 말살>

이노센트 3가 사상 가장 강력한 교황권을 갖고 있었던 교황임에도 <세계의 악당>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의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악행은 4차 십자군의 난행 때문이 아니다.

그는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면 노도와 같이 퍼지고 있던 종교 개혁 운동 즉 그가 볼 때 이단 운동이 사라질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의 예상과는 달리 개혁 운동이 계속 번지고 있었다. 이 당시 남 프랑스 랑구독 즉 현재 프랑스의 랑구-루씰론에서 독실한 기독교도인 카타리 또는 알비즈와 파가 위세를 떨치며 확산되고 있었다. 문제는 이들이 추종하는 교리가 공교롭게도 동유럽에서 넘어 온 그리스 정교회와 같았다는 점이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이 세상에는 선과 악이라는 두 개의 원리가 작용하는 이원적인 교리인데 예수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신이 보냈지만, 예수는 신의 아들이 아니라 사람의 모습을 취한 적이 없는 천사였다고 주장했다. 결과적으로 예수는 실제로 죽은 것이 아니며 그의 부활 역시 가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카타리파예수의 중요성죽음과 부활이 아니라 그의 성스러운 가르침에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가 신의 아들로서 육신과 인간성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교황청의 논리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그는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점령을 처음에는 반대하는 척하다 콘스탄티노플이 점령되자 이를 인정했다. 그런데 동로마가 궤멸되었음에도 그들의 교리를 받들고 있는 카타리파는 건재했다.

이노센트 3가 볼 때 가장 큰 문제점은 카타리파가 당시에 부패하고 세속적인 카톨릭 신부들에 비하여 보통 사람들이 크게 감명 받을 정도로 성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행동은 당대의 물질문명에 만연된 교황청으로 볼 때 불가능한 행동인데 더욱 이노센트 3를 불쾌하게 만드는 것은 카타리파가 같은 기독교이므로 카톨릭 교회에 대한 실제적인 대안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카타리파는 기독교 원리에 충실하면서도 사람들에게 보다 넓은 신앙의 자유를 주고 있었다.

그러므로 4차 십자군 운동이 엉망으로 변질되자 카타리파는 교황청의 실추된 이미지에 편승하여 불꽃과 같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교황 이노센트 3카타리파가 더 이상 남 프랑스에서 퍼지는 것을 용납할 경우 교황청의 권위에 치명상을 입을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카타리파에 대한 이노센트 3세의 증오가 어찌나 강한 지 카타리파를 지구상에서 남김없이 몰살시키는 것이 기독교인들이 사탄의 덫에 걸리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노센트 3카타리파를 이단으로 선포한 후, 프랑스 국왕 필립 아우구스투스에게 섬멸해 달라고 부탁하자 1209년 성지탈환을 위해 모였던 십자군들은 이노센트 3세의 명령에 따라 카타리파들이 있는 남프랑스의 베지르를 공격했다. 베지르인들은 곧바로 항복했다. 자신들을 공격한 십자군도 같은 기독교도이므로 재빨리 항복하면 최소한의 피해로 사태를 수습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십자군들이 베지르를 점령한 후 교황 특사인 아르노 아말릭 대수도원장에게 기독교인들과 이단을 구별하는 방법을 물었다.

 

모두 죽여라. 신께서 참된 기독교인들을 아실 것이다.’

 

이후 인근 도시들도 모두 파괴되고 카타리파들은 모두 학살되었는데 알려지기는 이때 희생된 사람들이 약 20,000이나 된다고 한다. 철통같은 요새를 구축하여 어떠한 공격에도 맞서 싸울 수 있었던 유명한 카르카손 성의 성주인 레이몽 로제 백작도 피해를 줄이기 위해 항복했지만 그 역시 감옥에 갇혔다.

그러나 이노센트 3의 카타리파에 대한 박해가 어찌나 심한지 교황청에서조차 불만의 소리가 나오자 그는 약간의 타협안을 제시한다. 원래 이노센트 3는 청빈의 실천 밑에 이단과 싸운다는 명확한 프로그램을 갖고 있는 도미니코와 사도적 생활로의 복귀, 복음적인 사랑의 실천을 역설한 프란체스코를 인정하지 않고 함께 척결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가 철저하게 박멸시키려던 도미니코와 프란체스코보다 더 위험한 카타리파를 먼저 제거했지만 그 여파가 너무나 컸다. 더구나 카타리파는 그리스 정교의 이론을 전파하므로 박멸하는 명분이 있었지만 도미니코와 프란체스코는 교황권 안에서 개혁을 주장했으므로 카타리파와 마찬가지로 다룰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결국 도미니코와 프란체스코에게 최소한 교황청에 절대 복종한다는 서약을 한다면 이를 인정하겠다고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런데 교황청은 카타리파들이 완전히 제거된 것이 아니라 단지 지하로 숨어든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노센트 3는 기독교인이자 이교도들을 몰살시키지 않는다면 두고두고 후회가 될 것이라며 특단의 조치를 구상하고 있는데 카타리파를 말살시키기 위해서는 극단적인 종교재판소를 설치해야 한다는 건의가 들어왔다. 이노센트 3가 즉각적으로 허락했음은 물론이다. 그러므로 이 당시 발족한 종교재판소는 이단을 가려내기 위한 재판소 즉 마녀 등을 재판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카타리파 교도들을 학살하기 위해 설치한 추악한 제도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런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이단으로 규정하려고까지 했던 도미니크회의 규칙을 채택했다는 점이다. 사실 도미니코회는 카타리파가 아니었으면 완전히 궤멸되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구사 회생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교황권은 일반 제후보다 높았기 때문에 교황청의 종교재판소는 완전한 독립적 권한을 가지고 그들 자체의 감옥을 운영했으며 고문의 사용도 허가했다. 한 마디로 종교재판소에 일단 회부되는 순간 그들은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다.

한편 인간이 태어난 이래의 가장 위대한 천재라고 불리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사실은 로마 가톨릭에 의해 이단(異端) 선고를 받은 카타리파신자라는 설명도 제기되었다.

다빈치를 이단자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최후의 만찬그림에서 4가지 증거가 발견됐기 때문이라고 스페인 작가 하비에르 시에라는 주장했다.

최후의 만찬은 몇 가지 중세시대에 맞지 않는 특이성을 갖고 있다.

우선 예수와 제자들 뒤편에 일체의 후광(後光)을 그리지 않은 최초의 그림이다. 이는 카타르파가 예수를 인간으로 여겼다는 증거라는 설명이다.

또한 로마 가톨릭교회의 창시자인 성 베드로손에 단도를 들고 다른 사도들을 위협하고 있는데 이는 다빈치초대 교황이 배신자라는 모독적인 견해를 나타내고 있다고 주장했다. 더구나 컴퓨터로 유다의 얼굴을 변용하면, 영락없는 다빈치의 초상화가 나온다.

물론 영국 케임브리지대 중세신학 담당인 길리안 에반스 교수카타리파는 다빈치 탄생 200여 년 전에 모두 사라졌다소설과 역사를 혼동할 일은 아니라고 잘라서 말했다.

그러나 다빈치 시대에 카타리파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보는 것도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교황청의 부패가 극심해지자 새로 일어난 신교의 교리에는 카타리파가 주장한 내용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노센트3세와 프리드리히 2세의 대결

이노센트 3가 유럽문명사에서 특별하게 취급되는 또 다른 이유 중에 하나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알력을 빗어 결국 교황권이 몰락하는 단초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노센트 3가 철저하게 카타리파를 제거하자 동 시대에 유럽에서 그를 대항할 세력은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그의 피후견인인 신성로마 황제독일의 프리드리히 2가 그의 비위를 거스리기 시작했다. 이노센트 3는 사실 그의 후견인이라는 타이틀로 당대의 복잡한 정치역학계를 주름잡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지만 프리드리히 2는 그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 할 군번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이노센트 3로서는 프리드리히 2를 단단히 길을 들이지 않으면 자신의 교황권 행사에 큰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프리드리히는 황제 하인리히 6세의 아들1198년에 왕국을 계승할 때는 네 살의 어린아이였다. 그의 어머니는 시칠리아를 점령한지 얼마 되지 않은 노르만 왕 로제르 1세의 딸이었으므로 시칠리아에 애착을 갖고 있었다.

이 당시 시칠리아는 교양 높은 아랍인들로 가득 차 있었으므로 어머니는 그들에게 프리드리히가르쳐달라고 요청했다. 당연히 몇몇 선생이 기독교와 이슬람교에 대해 정확한 정보프리드리히에게 전해 주었는데 프리드리히가 학자들로부터 얻은 결론은 놀랍게도 모든 종교는 모순점이 많고 특히 십자군을 비롯한 악행이 교황청의 잘못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십자군의 전례를 보아도 누구나 파악할 수 있는 일인데 당대 이런 내용을 발설하는 것이 간단한 일은 아니다. 그런데 프리드리히는 자신의 신하들과 교황청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일지라도 궁정에서 자유롭게 논의했다.

이러한 정보를 받은 프리드리히의 후견인이노센트 3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라며 발끈했다. 프리드리히가 어려서 왕이 될 때 그는 이노센트 3가 제시한 여러 가지 조건을 맹세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노센트 3프리드리히에게 독일에서 이단을 탄압토록 서약하게 했으며 시칠리아 섬과 남이탈리아의 왕위를 포기토록 했다. 또한 독일에 있는 성직자에 대한 면세도 강제적으로 승낙 받았다.

문제는 프리드리히였다. 어려서 강압적으로 이노센트 3가 요구한 서약서에 서명했지만 점점 장성해지면서 이노센트 3세와 강제로 맺은 약속을 전혀 지키지 않았다. 이노센트 3는 프리드리히가 통치하는 독일 등지에서도 이단자를 철저하게 말살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이노센트 3가 프랑스에서 카타리파를 무자비하게 억압했던 것을 잘 알고 있는 프리드리히는 그의 말대로 명령했다가는 자신에게도 화가 돌아올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노센트 3가 프리드리히에게 십자군을 일으켜 예루살렘을 회복하라고 강요했을 때에도 그는 약속 이행을 늦추기만 했다. 문제는 프리드리히가 요리저리 핑계를 대면서 이노센트 3세의 요구를 묵살하는 등, 속을 썩이지만 그를 결정적으로 응징할 방법을 찾을 수는 없었다는 점이다.

교황이 당시에 세속의 왕보다 막강한 힘을 갖고 있었던 것은 기독교 세계에서 파문이라는 극약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강한 왕이라 하더라도 파문을 당하면 제후들이 그에게 반기를 들 수 있는 여지가 있으므로 교황에게 순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이노센트 3는 십자군을 동원하지 않는 프리드리히 2를 계속하여 파문하겠다고 위협했지만 프리드리히 2세는 어머니의 고향인 시칠리아 섬에서 머물고 있었으므로 파문을 겁내지 않았다. 교황권이 우세한 독일 등 육지에서 왕이 파문을 받았다는 것은 심각한 일로 퍼질 수 있었지만 시칠리아 섬에는 아랍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다가 기독교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황 사상 가장 막강한 힘을 발휘했다는 이노센트 3가 그를 응징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강구하려는 도중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