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악당/십자군 전쟁(이노센트 3세)

십자군 전쟁(11) 이노센트3세

Que sais 2021. 1. 17. 23:42

https://youtu.be/RdsX-Xyzub4

6차 십자군 원정(12271229)

61227년부터 1229년까지 약 2년 동안인데 이는 과거와 같은 정통 원정은 아니다. 한마디로 당대의 정치 역학을 활용한 협상이라 볼 수 있다.

교황 그레고리오 9(재위 12271241)는 십자군 파병을 조건으로 교황권에 도전한 프리드리히 2를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임명하는 등 지원했지만 프리드리히 2세는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교황의 말에 따르지 않자 파문을 선언했다.

그런데 십자군 원정에 이리저리 피하던 프리드리히 2가 파문당하기 전에 원정에 나섰으나, 항해 도중 병에 걸려 귀환했다는 것을 몰랐다고 한다. 여하튼 그동안 여러 가지 면에서 성지 원정을 극구 사절한 프리드리히 2가 십자군 원정에 나선 것은 복합적인 요인이 포함되었기 때문인데 그의 십자군 원정은 그동안의 원정과는 기본 틀이 달랐다.

그는 소위 성지인 이슬람 지역에 도착하자마자 전투에 돌입한 것이 아니라 이슬람권의 실권자인 아이유브 왕조로 살라딘의 조카인 알 카밀 무함마드 빈 알 아딘협상단을 보냈다.

그의 협상은 그야말로 십자군을 놀라게 했다. 그가 아랍측으로부터 예루살렘 일부 지역의 통치권을 양도받은 것이다또한 예루살렘에 있는 모스크는 무슬림의 관리하에 두되 예루살렘군대를 상주시키지 않는다는 조건이다.

이런 엄청난 결론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간단히 말해서 예루살렘돈 주고 샀다고 비난하기도 한다. 더욱이 프리드리히 2가 전쟁하지 않고 예루살렘 일부를 할애받았다는데 교황 그레고리 9세는 크게 반발했다. 그는 이슬람 쪽의 전력이 형편없으므로 전투를 하면 옛 예루살렘 왕국령 전역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프리드리히 2는 당대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알 카밀 술탄에게 전하여 이를 납득시킨 것이다.

사실 알 카밀도 성지를 팔아넘겼다는 이유로 이슬람권에서 거센 비난을 받았다. 이때 이미 알 카밀에 대항해 시리아에서 형제 알 아시라프가 반란을 일으켰고 여러 이슬람권에서 이를 '굴욕'으로 간주해 큰 저항이 일어나고 있었으므로 프리드리히 2세의 제안실효를 본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 진영은 그야말로 놀라운 결정을 내린다. 놀랍게도 교황 측 십자군프리드리히공격한 것이다. 문제는 프리드리히가 간단하게 이들을 격퇴했다는 점이다.

화가 난 교황은 다시 한 번 제후들을 선동해서 십자군의 재 파병을 선언하여 나바라 왕국의 왕 테오발트 1, 잉글랜드의 왕 헨리 3세의 남동생 콘월 백작 리처드 등으로 하여금 성지에서 프리드리히 2에 대항토록 했다. 그러나 이들 재원정군은 소규모였으므로 프리드리히에 대적이 되지 않았다. 결국 재원정군은 프리드리히 2세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프리드리히 2세가 확보한 예루살렘 일부를 성지 순례하는 것으로 종결하고 회군했다.

교황의 의도와는 달리 프리드리히 2세에 타격을 주지 못했지만 여하튼 예루살렘의 일부를 확보했다는 자체는 대단한 일임은 분명했다. 결국 그레고리오 9프리드리히 2세의 파문을 취소하였다.

더욱 프리드리히 2의 기세를 올려준 것은 조약이 만료된 1239년 이후에도 5년간 즉, 1244년까지 예루살렘의 일부기독교 세력의 영향권에 포함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십자군 원정 중 두 번째로 기독교인들이 평화적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할 수 있었으므로 기독교계에서는 이 원정을 크게 인정한다. 물론 프리드리히 2에 의해 주도된 6차 십자군은 프리드리히 2세가 파문당한 상태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공식 십자군원정으로 간주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7차 십자군 원정(1248~1254)

7차 십자군의 원정 기간은 1248년부터 1254년까지 약 6년간인데 이는 프랑스  루이 9가 주도하여 일으킨 십자군이다. 7차 원정은 기독교 측에서 이슬람권을 명확하게 분석한 후에 이뤄진 원정이다.

당시 아이유브 왕조'시리아 아이유브''이집트 아이유브'로 분열되어 있었다. 1244, 예루살렘'이집트 아이유브 왕조'와 동맹을 맺은 '호라즘 용병들'의 군대에 점령당했다. 그러자 이에 맞서기 위해 '시리아의 아이유브 왕조'와 동맹을 맺은 '십자군'이집트 아이유브를 공격했으나 오히려 포위되어 섬멸 당한다. 이때 벌린 전투를 라 포르비에(La Forbie)전투로, 하틴 전투 이후 십자군이 대규모 전투를 벌인 유일한 예이자 최후의 전투로 설명된다.

여하튼 아이유브 왕조의 살라딘 2가 이끄는 이슬람 세력에 예루살렘이 완전히 넘어가자 이에 자극을 받은 프랑스 왕 루이 9(1226~1270)가 친동생 로베르 백작을 비롯하여 성전 기사단 등과 함께 7차 십자군을 일으킨다.

하지만 교황 이노센트 4프레드리히 2세와의 대립을 이유로 출발을 연기토록 했지만 루이 9는 꿈에서 신의 계시를 받았다며 출발한다.

루이 9의 프랑스군은 36,000명이나 되어 1248년 가을, 일단 키프로스 섬에서 겨울을 보낸 후 12496월 나일강 하구 항구도시 다미에타에 도착하여 이를 점령한다. 십자군의 공격으로 아이유브 왕조의 알 살리흐는 십자군에 전갈을 보내어 예루살렘과 다미에타의 교환을 제안했으나 거절당한다. 한마디로 자신들이 기선을 제압했다는 것이다.

이집트의 기후를 잘 알고 있는 루이 9는 나일강의 범람기를 피해 1249카이로를 향해 진군하는데 마침 알 살리흐병사한다. 그의 임종을 지켜본 왕비 샤쟈르 알 두르는 그의 죽음을 숨기고 당시 북방을 통치하고 있던 후계자 투란샤를 불러들인다.

12502, 로베르 백작의 정예 기마부대 290명이 아이유브군을 기습하여 목욕하던 사령관 파크루딘을 죽이는 데 성공한다. 그러자 여세를 몰아 로베르 백작이 적진을 돌파해 열려있는 만수라의 성문으로 들어가 수많은 시민들을 대학살하며 술탄의 궁으로 돌격했지만 수비군에 의해 기마부대 전원이 전사하고 5명만 탈출했다. 이떄 로베르 백작전사한다.

공격 실패로 동생을 잃은 루이 9의 프랑스 군은 아이유브군과 대치상태가 되는데, 북방을 지키던 투랸샤가 도착하면서 전세가 결정적으로 아이유브군에 유리한데다 전염병까지 돌아 십자군은 퇴각한다. 그런데 이를 아이유브군이 추격하여 12504월 다미에타에서 약 20km 떨어진 파리스쿠스에서 루이 9세가 항복한다.

결론은 루이 9발을 사슬에 묶인 포로가 되어 만수라로 옮겨진 뒤, 4년 간 유폐되었다가 배상금을 지불하고 석방된다. 그가 4년간 포로가 된 것은 몸값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승리자 아이유브 왕조의 끝 역시 불행했다. 알 투란샤12505, 술탄에 즉위한 지 2개월 만에 알 투랸샤가 맘루크군살해당하고, 아이바크(Aybak) 맘루크 왕조(1250~1517)를 열었다.

 

 8차 십자군 원정(1270)

13세기는 몽골 제국이 등장하여 호라즘 왕조부터 룸 술탄국, 아바스 왕조를 줄줄이 격파하자 유럽으로서는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러므로 안티오키아 공국1260년 몽골군이 쳐들어오자 몽골 편을 들어 이슬람 세력에 대항했다.

그런데 막강한 몽골군이 술탄 바이바르스에 의해 패배하자 바이바르스1268년 자신에게 반기를 든 안티오키아를 함락시킨 뒤 도시를 폐허로 만들었다. 헬레니즘 시대부터 중동의 대도시였고, 중동 교회의 중심이었던 안티오키아는 이때 결정타를 입어 지금까지 시골도시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에 자극 받은 루이 9가 과거의 치욕을 설욕하기 위해 1270년 다시 십자군을 결성하여 자신의 아들 필리프 3와 함께 북아프리카 튀니스를 공격한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루이 9세의 기세는 좋았으나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식수 부족과 진중에 전염병이 돌아 루이 9튀니스에서 병사한다.

루이9는 십자군 원정으로 결실을 얻지 못했지만 2차례나 십자군 원정에 직접 가담한 실적을 인정받아 교회에서 즉각적인 보답으로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그가 '성왕(聖王)'이라는 별칭을 받은 이유다.

 

 9차 십자군 원정(1271~1272)

루이 9가 튀니스 공격에 실패하고 병사하자, 지원군으로 오고 있었던 잉글랜드 왕국의 에드워드 왕자는 진퇴양난이 되었다. 뒤늦게 도착한 이들은 이슬람 현지에 남겨진 시칠리아 왕 샤를과 함께 십자군의 마지막 거점인 아크레로 진군했는데 다행히 키프로스 왕 위그 3해군으로 이들을 지원을 해주었다. 이들은 또한 몽골의 일 칸국에 원군을 요청하여 기병대를 지원받는다.

그러나 이들 연합군은 1271년 몇몇 소규모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술탄 바이바르스키프로스 본토를 공격하자 키프로스가 철수하고 에드워드의 군대아크레에 고립되고 만다. 결국 갖가지 악전고투 속에 에드워드와 샤를바이바르스10년간의 휴전 협정을 맺고 1272년 철수한다.

이후 십자군맘루크 왕조의 거듭된 공격으로 토르토사트리폴리 등을 잃었다. 한편 십자군을 지원한 일 칸국 몽골군아파미아, 알레포 등을 함락시키는 등 전과를 얻었으나 이집트 술탄 칼라운의 반격으로 패퇴한다.

결국 1291예루살렘 왕국아크레가 함락당하면서 멸망하였고 토르토사의 트리폴리 백국멸망하였다. 1299년부터 1301년간 몽골 일 칸국의 도움과 키프로스 왕국의 활약으로 일부 해안 도시들을 되찾지만 곧바로 맘루크 왕조가 이들을 모두 수복하였고 1302, 최후의 거점인 루아드 섬이 함락되면서 200년에 걸친 십자군 전쟁은 막을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