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능이 아닌 기독교>
200여 년에 걸친 십자군 전쟁은 서유럽인들에게 그야말로 큰 충격을 주었다.
십자군 신앙심에 호소하기만 하면 이교도들은 간단하게 제압할 수 있다고 단순하게 생각했지만 성지를 점령하고 있는 이슬람교도들은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이 야만인들이 아니었다. 수학, 화학 등 일반 과학은 물론 의학에 있어서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유럽보다 발달해 있었다. 기독교가 아닌 사람들은 인간이 아니라고까지 천명한 유럽인들에게 타 종교를 믿는 아랍인들이 자신보다 더 높은 문화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자 무장한 신앙심만으로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한다.
그럼에도 200년이나 걸쳐 9번이나 벌어진 십자군 전쟁은 이상한 전통을 만들어 냈다. 십자군의 원정 즉 성지로의 순례는 귀족들에게 필수 과정이 된 것이다. 십자군으로 참여하지 않은 기사들은 명함도 내밀지 못할 지경이었다. 우선 십자군으로 합류하여 성지 근처까지 갔다는 것은 경력 상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들은 성지 탈환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지에 가까이 갔었다는 것이 자신의 영지를 지키는 데 가장 중요한 덕목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병력은 끊기지 않았지만 성전에 참여한다는 열정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뿐아니라 세계에 대한 생각도 바꾸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슬람교도에 대한 증오와 동로마제국과 아르메니아에 사는 기독교도들에 대한 동정과 사랑으로 전쟁을 시작했던 십자군은 전쟁을 통해서 진실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속이고 전쟁에 끌어들인 비잔틴 제국의 간교를 알아차리자 그리스인과 아르메니아 인들을 경멸하게 되었고 반대로 이슬람교도들이 전쟁에서 보여 준 관대하고 공정한 미덕에 대해 호의를 품게 되었다.
원정에서 돌아온 십자군은 이교도들로부터 배운 생활태도를 모방하면서 아직도 세계를 모르는 시골의 기사들을 무시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원정 때에 가져온 복숭아나 시금치와 같은 새로운 종자들을 들고 와 유휴지에서 경작하여 수입을 올리기도 했다. 그리고 무거운 갑옷을 입는 대신에 이슬람교도들의 전통적인 관습이자 투르크 인들처럼 비단 또는 면으로 만든 옷을 입었다. 십자군 원정으로 유럽이 새로운 문명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정치적, 군사적으로 보면 십자군은 실패작이었다.
시리아와 팔레스타인과 소아시아에 작은 왕국들이 생겼으나 다시 투르크에게 정복되었고 1244년 이후 성지는 1095년 이전의 상태로 돌아갔다.
<새로운 시대를 탄생시킨 전쟁〉
십자군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유럽의 의학이 얼마나 아랍에 비해 뒤떨어져 있었는가는 12세기에 유럽에 초빙되어 유럽 의사들에게 자문해 주었던 아랍인 의사의 기록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당시 유럽의 의학 수준을 리처드 잭스의 『세계사 속의 토픽』에서 인용한다.
‘그들은 다리에 종양이 있는 기사와 폐결핵을 앓고 있는 여인에게 나를 데려갔다. 나는 기사의 다리에 찜질약을 붙이고 여인의 종양을 절개하여 치료를 시작했다. 때마침 프랑크 인(프랑스) 의사가 나타났다. 그는 기사를 향해 ’이 작자는 환자들을 어떻게 치료하는지 몰라도 한참 모르는군. 당신은 한쪽 다리라도 건지고 살아 남겠소. 아니면 두 다리를 모두 가진 채로 죽고 싶소.‘라고 질문했다. 기사는 외다리가 되더라도 살아남고 싶다고 말하자 의사는 하인을 시켜 힘센 사내를 불러오고 날카로운 도끼를 가져오도록 지시했다. 이윽고 사내 한 명과 도끼가 도착했을 때 나는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았다. 의사는 나무로 기사의 다리를 고정시키며 사내에게 말했다.
‘힘껏 내리쳐서 말끔하게 잘라버려.’
그는 내 눈 앞에서 도끼로 기사의 다리를 내리쳤다. 그런데 두 번째로 도끼질을 하면서 그만 일을 그르쳤다. 다리에서 골수가 뿜어져 나오면서 기사는 죽고 말았다. 잠시 후 의사는 여인을 진찰하며 말했다.
‘이 여자의 머릿속에는 그녀와 사랑에 빠진 마귀가 들어 있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몽땅 잘라라.’
머리카락을 모조리 깎인 여자는 평소대로 집으로 돌아가 마늘과 겨자가 듬뿍 담긴 음식을 먹고 더욱 병을 악화시켰다. 의사는 ‘마귀가 그녀의 뇌 속으로 침투했다’고 단정했다. 그는 면도칼로 머리를 열 십자로 베어낸 다음 두개골 내부가 훤히 드러날 정도로 뇌를 제거했다. 그가 소금으로 뇌를 문지르자 여인은 사망했다. 나는 그들에게 내 도움이 더 필요한지 물었다. 그들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했을 때 나는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 사건을 계기로 나는 그때까지 전혀 알지 못했던 치료 방식을 알게 되었다.‘
십자군 전쟁이 비록 거짓말과 종교적 열정, 그리고 십자군 전쟁을 통한 여파가 거짓말로 점철되었지만 그들이 유럽 사회에 미친 변화는 너무나 엄청났다.
중세의 기사는 농촌 지주였으므로 돈으로 물건 값을 치를 필요가 전혀 없었다. 영지에서는 식구들이 먹고 마시고 입을 모든 것을 직접 생산했다. 외국에서 들여 온 몇 가지 안 되는 물건들은 영주의 영지 내에서 생산되는 꿀, 달걀, 목재와 같은 현물로 치르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우선 판에 박힌 농경생활을 완전히 포기해야 했다.
예를 들어 프랑스 중부의 한 영주가 성전에 참여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생각해보자. 그는 수천 마일을 여행해야 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자고 먹을 때마다 여행 경비와 숙박료를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이다. 집에서는 대부분의 경비를 농산물로 지불할 수 있지만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서 배를 타기 위해서 수천 개의 계란과 장작, 꿀통을 짊어지고 갈 수는 없는 일이다.
이때 현금이 필요한데 부피를 감안하면 황금이 가장 적절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이 전쟁에 참가하기 위해 꼭 필요한 황금을 어떻게 확보하는 가이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전문적인 대금업자인 유대인이나 이탈리아인으로부터 빌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영주가 전쟁 중에 사망할 경우에 대비해서 영지를 담보로 잡고 마지못해 금화를 내어 주었다. 빌리는 사람으로서 엄청난 불평등 계약이었지만 성지를 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결과적으로 기사들의 장원이 고리대금 업자들의 손에 넘어가는 것이 비일비재했다.
이와 같은 부작용이 너무나 많이 생기자 차선책이 대두된다.
자신의 성 주변에 있는 몇 몇 소도시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금화를 갖고 있다는 정보가 성주의 귀에 들어가자 곧바로 서로 필요한 것을 교환하자는 거래가 이루어진다. 도시민은 영주에게 황금을 주는 대신에 영주의 영지 안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사냥이나 낚시와 같은 오락을 허락해달라고 요청한다. 절대적인 권한을 휘두를 수 있는 영지 안에서 도시민들이 자유롭게 행동한다는 자체가 불쾌한 일이지만 영주에게는 방법이 없었다. 도시민들이 영주의 영지 안에 들어와서 고분고분하게 처신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영주의 위신이 떨어졌다는 것을 영주들 자신이 모를 리 없었다. 즉 고대의 봉건 통치의 상징인 성에서 소시민이 유지하는 도시로의 권력 이동이 아주 서서히 진행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200년에 걸친 십자군으로 사람들은 더 이상 교회와 교황을 절대적인 존재로 믿지 않게 되었다. 반면에 국왕과 상인들은 눈에 띄게 세력이 커졌다. 국왕은 분쟁에 휘말린 영주와 기사들의 재산을 합법적으로 몰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국왕은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이들 신흥 상인들과 손을 잡는 것이 보다 유리하다고 판단한다. 국왕으로는 교황이 자신의 집권을 공고하게 만들어 준 것에 대해 고맙지 않을 수 없었다. 일부 국왕은 십자군 전쟁 이후에 교황의 권위와 명성이 땅에 떨어 졌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뜻을 철저하게 옹호한다는 의미로 마녀 사냥까지 적극 지원한다. 그들은 십자군 원정으로 교회의 힘이 약화되는 것을 천천히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제1차 십자군이 성지에서 얻은 성과는 사실 기적이나 마찬가지다.
그것은 과학기술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유럽을 앞섰지만 성지를 내어주고 여하튼 아랍 지역에 기독교의 근거지를 허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0여년이란 기다란 시간을 거쳐 십자군들의 흔적은 그렇게도 강조하던 성지에서 완전 철수한다. 성지를 기독교가 아닌 회교도에게 고스란히 넘겨주었으므로 십자군 원정 자체가 의미 없었다는 뜻이 된 것이다.
이런 결과에 학자들이 나섰다. 십자군 원정의 쇠퇴와 십자군 국가들의 파탄의 근본 원인이 무엇이냐이다. 가장 쉽게 제시되는 것은 처음에 십자군들이 밀어닥칠 때 한 목소리를 내지 못한 아랍인들이 통합되었고 특히 열정적인 지하드가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토머스 애스브리지 박사는 이런 설명은 너무 단순화된 설명이라고 주장한다. 큰 틀에서 보면 무슬림들의 통합은 산발적이었으며, 지하드에 대한 열정은 간헐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부 학자들은 십자군 원정의 기본이 성지 정복과 방어에 적절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설명한다. 십자군은 기본적으로 개인들의 순례 여행이 목적이었다.
그런데 십자군의 철학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계속 변화했지만, 십자군이 나름대로 제각기 꿍꿍이가 있어, 이들을 한 틀로 총괄하기 어려운 중앙집권적 지도부가 없는 일회성 군대들의 집합이었다는 점이다.
사실 성지에 설치된 십자군 국가들이 국가로서 지속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대규모의 상비군이다. 종교적 열정은 군사적 모험을 촉발시키는 데는 상당한 효과를 발휘했지만, 지휘통제의 측면에서는 오히려 문제가 제기되었다.
더구나 유럽에서 후예자를 둘러싼 작위 계승 분쟁들, 흉작과 이단 종파의 발생 등으로 인해 라틴 유럽의 예루살렘에 대한 관심이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성지 지역은 이슬람 세계의 변두리에서 싸우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럽에서 볼 때 매우 먼 거리에 있는 지역이다. 이는 보급과 통신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십자가 운동이 복합적인 면을 볼 때 실패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여하튼 세계 역사상 가장 큰 족적을 남긴 십자군 전쟁은 당초 성지 회복이라는 고귀한 목적에서 시작되었지만 씻을 수 없는 불명예를 남긴 전쟁이었다. 2000년 봄 교황 바오르 2세는 지난 2000년 동안 카톨릭이 저지른 죄과에 대해 사과하면서 십자군 원정을 돌이킬 수 없는 죄로 인정했다. 그는 ‘기억과 화해’라는 제목의 사과문에서 유대인, 이슬람교도, 여성 그리고 소수 민족에 대한 탄압을 사과하면서 십자군의 원정 때에 일어났던 폐해를 특별히 언급했다. 2001년에는 교황이 그리스를 방문하여 십자군의 침략과 약탈과 학살 등에 대해 정식으로 사과했다.
여기에서 교황이 특별히 유대인을 거론한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
십자군 전쟁이 벌어지자 유럽 내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본 민족은 유대인이다. 예수가 유대인에 의해 고통당했고 이후에도 유대교를 고집하며 기독교와 다른 길을 걸었는데 엄밀한 의미에서 유대인 박해의 가치를 든 것은 십자군 전쟁이기 때문이다.
1095년 클레르몽 공의회로 십자군 원정이 결의되자 이후 유대인 박해는 빈번히 일어났다. 제1차 십자군 원정 때 주로 쾰른, 마인츠 등 독일에서 학살이 집중되었고 2차 십자군 때에는 프랑스와 독일, 3차 십자군 시에는 사자심왕 리처드 1세의 대관식이 겹친 잉글랜드의 요크, 런던 등지에서 수백 명이 화형당했다.
유대인들은 무기를 들고 저항하기도 하였지만 결국 집단 자살로 소멸하는 경우가 많았다. 13세기 초, 제5차와 6차 십자군 때에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에서 유대인 학살이 재차 자행되었다. 그러나 이 당시 신성로마제국 안에 있는 유대인들을 처벌한 주모자들은 역으로 처형당했다. 신성로마제국은 기본적으로 유대인을 제국의 신민으로서 존중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대인에 대한 박해는 이후에도 계속일어나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의 유대인에 대한 만행 즉 홀로코스트가 벌어졌음은 물론이다.
9.11 테러가 터진 이후엔 미국과 서방에서 ‘무슬림들이 어째서 우리를 이렇게 적대하는가?’라는 질문에 서방-이슬람 관계의 역사에 대한 전체적인 분석이 이루어졌는데 여기에서 십자군 전쟁이 서방-이슬람 관계 악화의 근본 요인이었다고 지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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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철의 히스토리아] [71] 소년십자군」, 주경철, 조선일보, 2010.08.13.
「십자군 전쟁」, 나무위키
「십자군」, 위키백과
「십자군」,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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