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7대 불가사의/바빌론의 공중 정원과 바벨탑

공중정원과 바벨탑(6)

Que sais 2021. 1. 20.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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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라미스네브카드네자르 두 사람 중에 누가 공중정원을 건설한 사람인가라는 의문점은 두 사람 모두가 공중정원을 건설했다고 보면 간단하게 풀린다. 사실 테라스 위에 나무나 풀을 심는 것은 메소포타미아의 강가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일반적인 일이었다. 즉 도시 주위를 흐르는 강물을 이용하여 식물을 재배하는 정원은 매우 오래 전부터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대영박물관에 보관된 니네베의 소위 나무로 꽉 채워진 장소 아래에서의 향연으로 유명한 아수르바니팔 왕과 그의 왕비가 나무 그늘 아래에서 향연을 베푸는 그림으로도 알 수 있다.

 

아슈프바니팔과왕비향연

공중정원의 개념을 엿볼 수 있는 고고학적 자료도 두 개나 발견되었는데 첫 번째 파편은 니네베에서 발견된 것으로 높은 궁륭이 연속으로 이어지는 테라스에 심어진 관목들이 보인다. 좌측에는 공중정원으로 보이는 궁정 안에 왕으로 보이는 지배자가 있다. 다른 하나는 역시 니네베에서 발견되었는데 매우 작은 파편이지만 기둥들 위의 테라스에서 나무들이 재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바빌론에 나무의 신이 있다는 것도 매우 의미있다고 볼 수 있다.

여하튼 바빌론에서 정원을 가꾸는 것은 매우 오래전부터라 볼 수 있으므로  사람 모두 옳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유명한 디오도로스는 네브카드네자르 2세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는 세미라미스가 공중정원에 관련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실제로 바빌론에 있는 공중정원은 네브카드네자르 2가 건설했다고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성 안에 공중정원이 있는데 이것은 세미라미스가 만든 것이 아니라 그녀보다 훨씬 후대의 왕이 건설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후궁을 즐겁게 하기 위해 이것을 만들었다. 왕의 후궁은 페르시아 출신으로 아름다운 산들이 있는 고향을 그리워하면서 궁전 안에 식물들이 자랄 수 있도록 왕에게 간청했다.

이 인공정원은 한 변이 거의 120미터의 사각형으로 마치 극장과 같이 계단으로 한 단 씩 올라가게 설계되었다. 테라스 또는 플랫폼에 재배되는 모든 식물의 무게는 높낮이가 있는 기둥으로 지지되도록 했다. 가장 높은 기둥은 거의 25미터나 되어 정원의 최상부를 지지하며 벽체의 두께는 6.6미터나 된다. 테라스는 돌출부분을 포함하여 16x4피에의 크기로 아스팔트가 많이 칠해진 벽돌(갈대를 포함)로 주위를 구분한 후 다시 구운 벽돌로 치장했다.

이곳에 얇은 납판을 붙여 물이 기초부분으로 흘러 들어가지 않도록 했다. 테라스에서 거대한 나무들의 뿌리가 썪지 않고 자랄 수 있도록 해 준 장치인 것이다. 테라스에는 각종 종류의 크고 작은 나무들이 심어져 있어 그 규모나 아름다움이 빼어나다. 기둥의 높낮이를 다르게 만들어 강도가 다른 빛이 들어오도록 유도함으로써 호화롭게 장식된 궁전의 내부 공간에 신비감을 주도록 했다. 단 하나의 기둥이 천장부터 기초까지 내려져 있는데 이 안에 다량의 강물을 테라스까지 올라갈 수 있도록 만드는 수력기계가 들어 있다. 그러나 이 기계는 밖에서 볼 수 없다.‘

 

디오도로스의 설명에 의하면 꼭대기 층 바빌론의 내부 성벽보다 약 20m가 더 높았다고 되어 있다. 이는 20층까지 물을 공급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공중 정원 내부에 방 100여 개가 있고 내부 한가운데에는 크기가 엄청난 광장이 있는데 이 광장에는 목욕탕도 있었다고 적었다.

요세푸스(37100)도 알렉산더 대왕과 같은 시대에 살았던 바빌론의 신관이었던 베로수스의 말이라고 인용하면서 공중정원을 만든 후대의 왕은 네부카드네자르 2세라고 적었다.

 

그는 이 궁전에 거대한 기둥들이 받치는 높은 길을 닦고, 온갖 나무와 식물들을 심은 후 이를 '공중의 낙원'이라 칭했다그는 궁전의 배치를 산악지방과 정확히 같은 형태로 조성하였는데, 이는 산악 지방인 메디아에서 태어나 자란 왕비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였다.’

 

네부카드네자르와 아미티스 공주의 결혼에 대해서는 기원전 4세기, 그리스의 의사이자 페르시아 역사의 저자인 크테시아스에 의해서도 확인된다.

 

센니케리브왕의 돌팔매부대 전투도)

그러나 공중정원에 대해서는 또 다른 가설이 존재한다.

공중정원은 세미라미스보다는 후대이고 네부카드네자르보다는 선임자인 신아시리아의 왕인 센나케리브(재위 기원전 705681)바빌론 서북쪽 티그리스 강변에 건설한 니네베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주장은 역사의 아버지인 헤로도토스가 그의 책에서 바빌론의 화려한 궁전과 신전, 주택과 거리, 상점을 비롯하여 조각 및 장식 등 세밀한 부분까지 자세하게 묘사했고 바빌론을 세계 어떤 도시보다 아름답다라고 적었다는데 근거한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스테파니 달리 교수는 공중정원은 바빌론이 아니라 니네베에 공중정원이 있었다는 주장으로 우선 바빌론은 성벽들로 가로막혀 있고 왕궁과 강 사이에도 성벽이 나 있기 때문에 왕가의 정원으로는 부적합하다고 지적했다.

반면에 아시리아의 수도이자 거대 도시이기도 했던 니네베는 기원전 700여년 경 센나케리브 때 전성기를 맞이했는데 이때 제작된 점토판에 정원 건설 과정이 기록되어 있었으며, 특히 수도교가 정원을 향해 나 있는 것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고 강조했다. 니네베의 정원에 대해서는 비교적 많은 자료가 있다.

니네베는 황량한 사막 한가운데 있는 오아시스같은 아름다운 디자인뿐만 아니라, 물을 끌어올리는 거대한 장치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에 대해 적었다.

아시리아의 왕들이 정원을 가꾸는데 일가견이 있었는데 아슈르바니팔 왕의 궁전에는 산을 굽이치며 흘러가는 거대한 운하가 있었으며, 그 주위를 따라 과일나무, 포도, 올리브, , 대추야자 등 다양한 수목들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었다고 한다. 대영박물관에 소장된 정원 그림은 바로 이 당시를 묘사한 것이다. 또한 세나케리브가 홍수를 막기 위해 정원을 둘러싸는 거대한 석회암 벽19세기 중반에 발굴되기도 하였다.

 

바빌론의 나무의 신

세나케리브는 당시 정원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약 50km에 달하는 거대한 운하를 산까지 연결시켜 해결하였다고 전한다. 기록에 따르면 이 수로는 자동으로 열리는 수문을 갖고 있었고, 방수 시멘트석조 아치 형태로 지어졌고, 무려 200만 개가 넘는 돌들로 지어졌다고 한다.

 

나 세나케리브, 세계와 아시리아의 왕은, 드디어 니네베로 향하는 수로를 건설하였다. 깊은 계곡들 사이로 백색 석회암을 이용하여 거대한 물길을 만들었으며, 물들이 그 사이를 유유히 흐르게 하였다.’

 

위의 글을 보면 세나케리브가 당시의 최신 기술을 이용해 수로를 만들었는데 당시 이를 모든 이들의 경의'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수로는 산에서부터 내려오므로 비교적 높은 위치에 있는 니네베까지 물들을 공급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 세나케리브가 홍수를 막기 위해 정원을 둘러싸는 거대한 석회암 벽은 19세기 중반에 발굴되기도 하였다.

또한 당대에 니네베와 바빌론을 동일 건물로 생각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리스 사람들은 니네베를 바빌론으로 착각했을 가능성을 높다는 설명으로 세나케리브가 니네베 성을 보수할 때 성문 이름에 신의 이름을 붙였는데 '바빌론 신에게 향하는 문'이라고 적었다. 니네베를 또 하나의 바빌론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조그마한 특징까지 상세하게 적은 헤로도투스는 공중정원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더불어 로마의 사학자 크세노폰(Xenophon)도 바빌론의 성곽 등에 대해 찬미했지만 공중정원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사람의 마음을 온통 빼앗은 공중정원을 이들이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은 당대에 공중정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인데 이는 역으로 공중정원이라는 개념 자체가 오래 전부터 있었기 때문에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는 추정이다.

물론 공중정원 자체에 대한 기록은 아니지만 니네베에서 아수르바니팔 왕과 그의 왕비가 나무와 숲이 있는 곳에서 향연을 베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세나케리브가 니네베에 아름다운 정원을 지었으며 성 밖에 있는 강에서 물을 끌어다 정원에 물을 주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그리고 세나케리브의 후손들도 니네베에 있는 정원에서 우리에 가두어 두었던 사자와 야생 노루 등을 풀어 사냥을 즐겼다는 기록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