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7대 불가사의/바빌론의 공중 정원과 바벨탑

공중정원과 바벨탑(5)

Que sais 2021. 1. 20.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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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정원의 발명자

세미라미스는 당시까지는 님루드가 수도였는데 수도를 고도인 바빌론으로 옮겼다. 수도를 옮기기 위해 재건한 바빌론은 고대의 바빌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성곽을 가진 도시가 되었다. 그 성벽이 얼마나 거대했는지 헤로도토스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세미라미스의 공중정원

 

아시리아에는 수많은 대도시가 있지만, 그 가운데서 가장 이름 있고 또한 가장 강력한 도시는 니노스(니네베)기 황폐해진 후 왕궁의 소재지가 된 바빌론이었다. 바빌론은 광대한 평야 한가운데 있는 대도시로서 사각형을 이루고 있는데, 각 변의 길이가 120스타디온(14마일)에 이른다.’

 

헤로도투스가 말하는 아시리아는 광의의 뜻으로 바빌론도 포함된다. 그는 성벽을 쌓기 위해 구운 벽돌을 했고 모르타르 대신에 끓인 아스팔트를 사용했다고 했다. 근래의 발굴로 바빌론 부근에 아스팔트가 분출되고 있는 장소가 발견되어 그의 설명이 사실로 나타났다. 헤로도투스는 바빌론의 규모가 거대한 것은 물론 아름답게 정비된 도시이며 성벽은 다른 어떤 도시보다 견고하여 마치 갑옷과 같다고 적었다.

 

성벽 위 양쪽 가장자리에 1층 건물을 두채씩 서로 마주보게 지었는데, 그 건물 사이로 4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가 다닐 수 있을 만큼 넓은 폭을 가졌다. 이 성채는 100개의 문을 갖고 있었는데 모두 청동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헤로도토스의 이러한 설명은 근래의 발굴에 의해 사실로 나타났다. 고대에서 가장 넓은 성곽이라고 해도 폭이 8미터에 지나지 않았으나 바빌론의 성곽은 무려 17.70미터가 되었다. 외부 성곽은 11.3킬로미터였고 내부 성곽은 6킬로미터였다. 성곽을 에워싸며 옆으로 흐르는 유프라테스 강을 건널 수 있는 커다란 기둥으로 된 다리가 놓여졌는데 기둥들의 간격은 3.6미터이고 다리의 폭은 9미터였다. 한 방문객은 다리의 디자인이 세미라미스의 미모에 걸맞게 아름다웠다고 적었다.

 

이런 웅장한 기념물을 만들었던 세미라미스는 여러 면에서 보통 왕과는 달랐다. 아무리 강력한 권력을 갖고 있는 왕들이라고 해도 하나의 궁전에서 거주하는 것으로 만족했는데 그녀는 궁전 하나론 성이 차지 않았는지 여러 개의 궁전을 건설했다. 놀라운 것은 각 궁전으로 가기 위해 성벽 밖으로 통로를 만들지 않고 유프라테스 강 밑으로 터널을 만들었다는 점이다.

 

세미라미스 모델

그녀는 자신이 숭배하는 신전도 따로 지었다. 일반적으로 바빌로니아의 주신은 마르두크였는데 그녀는 도시의 중앙에 벨로스 신을 모셨다. 벨로스는 자신의 남편인 니노스의 아버지와 관련된 신이었다.

 

세미라미스는 유럽의 고대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람으로 현대인들에게도 매우 익숙한 사람이다. 그녀를 주제로 한 영화가 수없이 등장한다. 그러나 미국의 자랑으로 유네스코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이 그녀를 모델로 했으며 할리우드의 컬럼비아 영화사의 로고로 횃불을 들고 있는 여신이 바로 세미라미스다. 세미라미스가 기원전 9세기의 사람이지만 아직도 우리들과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왕비를 위한 공중정원 건설>

세미라미스가 공중정원을 창안했다고 하지만 공중정원은 세미라미스보다 한참 후대인 기원전 500년경 신()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왕비 아미타스를 위하여 수도 바빌론에 건설한 정원이라는 설도 많은 지지를 받는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 즉 성경에서는 느부갓네살 2세는 칼데아의 장군이었던 그의 아버지 나보폴라사르가 혁명을 일으켜 바빌론의 왕이 되자 그를 이어 기원전 605년 왕이 되었다. 그는 45년간이나 바빌론을 통치했는데 기원전 597년과 598년 두 해에 유대인들의 예루살렘을 정복하여 많은 유대인들을 바빌론으로 잡아갔는데, 이 시기를 바빌론 유수라고 부른다.

성서에 의하면 이 당시 모든 왕자와 용사, 장인과 세공인을 비롯한 10여만 명이나 되는 포로들을 데려갔다고 한다. 성경에 미치광이로 묘사되며 유대인들은 오랜 세월동안 예루살렘을 대적하는 모든 공격자들을 느브갓네살이라고 불렀다.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근거로 포악한 사람의 대명사로 네브카드네자르를 거론하지만 학자들은 고고학 탐사를 근거로 그를 근동 지방의 위대한 건설자 중 한 명으로 거론한다. 이집트의 위대한 파라오 람세스 2와 버금간다는 설명으로 네부카드네자르의 바빌론이 당대의 세계를 재편했다고 인정한다.

 

 

근래의 연구에 의하면 실제로 당시에 바빌론으로 끌려간 사람은 유대지도층과 바빌론 축성을 위한 인부 4,600명에 불과했다. 그리고 바빌론 생활은 성경에 적혀있는 것과는 달리 그렇게 견디기 힘든 생활은 아니었다고 설명한다.

이는 콜드웨이바빌론에서 발굴한  4개의 흑판에 근거한다.

흑판에는 포로로 잡혀왔던 유대왕 요아킨에게 든 비용 명세서가 적혀있었다. 그 흑판에 요아킨은 그 당시 사치품에 속했던 물품들도 보이며 네부카드네자르가 한 원로를 뽑아 포로들을 잘 돌보게 했다는 기록도 있다. 유대인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의식을 행할 수 있도록 배려했는데 이 내용을 페트라 아이젤레는 그녀의 책 바빌론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정말 그렇게 끔찍했던 것은 아니다. 유대인들의 바빌론 생활은 모세 시대의 이집트 생활과는 달랐다. 유대인들은 바빌론에서 노예나 죄수가 아니라 반 자유인이었다. 그들은 곧 네브카드네자르를 섬기는 다른 신하들과도 협력했다. 네부카드네자르는 포로들을 정신적으로 탄압할 의사가 전혀 없었고 그들의 문화를 뿌리 뽑으려 하지도 않았다.’

 

한마디로 네부카드네자르가 유대인들의 고집스러운 종교를 탄압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그가 건설한 바빌론은 그야말로 현대학자들을 놀라게 한다.

행진하기 위해 만들어진 16미터 너비의 아스팔트와 돌판으로 덮인 깨끗한 도로가 왕의 거처에서부터 도시 전체를 관통하여 동쪽을 향해 쭉 뻗어있다. 돈황의 유물을 무차별로 약탈하여 세계인들로부터 비난을 받는 스벤 헤딘지구상에 있는 가장 아름다운 도로 중 하나다라고 극찬했을 정도다.

길은 직선으로 뻗어 있었고 가옥들은 직사각형 형태로 주거지를 형성하고 있었다. 바빌론을 특별히 많은 사람들이 찬탄한 것은 바람에 말린 일반 벽돌이 아니라 불에 구운 벽돌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또한 집을 세우기 위해 아스팔트를 부은 기반은 지하세계의 심장부까지 닿아있었다. 이러한 점은 현대 건축에서도 차용하는 기법이다.

이곳에는 바빌론의 신 중 가장 중요한 신인 도시의 신 마르둑에게 헌정된 바벨탑을 비롯하여 43개의 신전과 900개의 작은 방으로 구성되었는데 이 방들은 모두 하나하나 작은 예배당이었다고 한다. 이곳 신전의 특징은 다른 여러 지역에서 숭배되는 신들도 숭배되었다는 것으로 당대의 사람들은 바빌론의 종교 자유에 칭송을 했다. 신들이 도처에 존재하므로 신성을 띤 신물들은 신들보다 몇 배나 많았다.

오늘날 고고학자들이 반인반수라 부르는 괴상한 동물들은 도시 곳곳에 표현되었다.

발톱은 독수리, 머리는 뱀의 머리, 사자이빨을 하고 있고 머리에는 띠를 두르고 꼬리는 전갈처럼 생긴 상상의 동물들이다. 벽돌을 쌓아만든 벽의 전면에는 불에 그을린 것 같은 색을 띤 이 동물들이 벽의 배열과 조화를 맞추어 조각되어 있다. 그중에는 푸른색을 띤 유리로 덧입혀져 있기도 했다. 밝은 하늘색을 바빌론인들은 적을 물리치고 승리하게 하는 색이라 믿었다. 그들은 코발트색에 동을 섞어 신비스런 푸른색을 만들었다.

 

이슈타르문의 사지

이들 위용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슈타르 문이다. 용과 황소 무늬를 얕게 돋을새김하고 푸른색 유약을 바른 타일을 전면에 붙인 이 문은 사랑과 전쟁의 여신인 이슈타르에게 봉헌된 것이다. 이 문은 바빌론의 군대가 하늘과 땅의 창조주요 신들의 신인 마르두크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행진을 했다는 행차의 길을 따라 서있는데 이라크의 야심찬 정책에 의해 복원되었다.

또 하나의 역작이 공중정원이다. 네부카드네자르는 이란 북서부에 있던 고대 국가인 메디아 왕국의 키악사레스 왕의 딸 아미티스를 왕비로 맞았다. 산이 많아 과일과 꽃이 풍성한 메디아에서 자란 왕비는 평탄하고 비가 잘 오지 않는 바빌론에 마음을 두지 못한 채 항상 아름다운 고향의 푸른 언덕을 그리워했다. 이 모습을 보고 안타깝게 여긴 왕은 왕비를 위해 메디아에 있는 어떤 정원보다도 아름다운 정원을 바빌론에 만들라고 명령했다. 이에 대해서는 로마의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 플라비우스가 다음과 같은 글을 적어 사실로 보인다.

 

왕은 이 궁전에 돌로 언덕을 쌓게 하여 산처럼 만든 뒤 거기에 각종 나무를 심으라 명했다. 나아가 공중정원을 마련했다. 메디아에서 온 왕비가 고향에서는 다 그렇게 한다 하여 공중정원을 만들어 달라 하였기 때문이다.’

 

왕의 명령을 받은 건축가는 곧바로 작업에 들어가 도시를 가로질러 흐르며 120미터 길이의 돌다리가 놓여있는 유프라테스강 지류 바로 옆에 있던 성안에 가로세로 400미터, 폭이 15미터의 토대를 세우고 그 위에 계단식 건물을 세웠다. 한 층이 만들어지면 그 위에 기름진 흙을 옮겨 놓고 넓은 발코니에 공중정원을 일구었다.

 

바빌론 영역

현대로 보면 연속된 계단식 테라스로 된 발코니에 풀과 꽃, 수목을 심었기 때문에 멀리서 보면 마치 삼림으로 뒤덮인 작은 산과 같이 보일 수 있으므로 바빌론의 웅장한 성벽과 함께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학자들은 꽃이 만발하고 향기가 나며 야자수 나무의 그늘이 먼지와 더위로 지친 나그네들에게 바람을 쏘이게 해주고 머리를 맑게 해주는 그런 매혹에 가득 찬 정원이었음이 틀림없다고 말한다.

네부카드네자르는 당시 수도 바빌론의 웅대함을 다음과 같이 자랑했다.

 

위대한 바빌론이여. 제국의 성이여. 이것이 짐에 의해 지어진 것이 아니냐. 오로지 짐의 세력과 권능으로 지어져 짐의 위대함을 찬양하는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