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7대 불가사의/바빌론의 공중 정원과 바벨탑

공중정원과 바벨탑(7)

Que sais 2021. 1. 20.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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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정원의 발굴

공중정원이 있었던 바빌론의 운명은 영욕의 역사가 수도 없이 순환되었지만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기원전 9세기부터 아시리아인들의 지배를 받던 바빌론인들은 호시탐탐 반란의 기회를 노렸지만 기원전 689년에 바빌론은 세나케리브에 의해 완전히 파괴된다. 아시리아인들은 바빌론의 사원들을 모두 파괴하고 마르둑 신상을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로 옮겼고 바빌론 전체가 물에 잠기도록 유프라테스 강의 수로를 바꾸었다.

 

바빌론세나케리브의정복

그러나 바빌론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는 세나케리브의 후계자 에사르헤돈에 의해 다시 재건되었고 기원전 7세기에는 과거의 위용을 다시 회복했다. 기원전 626년 바빌론은 나보폴라사르의 영도하에 아시리아에 독립을 선포하고 14년 후 인근 국가와 연합군을 구성하여 아시리아군을 격퇴시키고 수도 니네베를 파괴하여 강자로 올라섰다.

그의 후계자가 네부카드네자르605년 왕위에 오르자 40년 이상 장기간 권좌에 있는 동안 바빌론 왕국을 부흥시키고 수도인 바빌론을 완전하게 재건했다. 네브카드네자르 2세는 바빌론 재건 기간동안 바빌론 왕국에 있는 모든 노동력을 이용했는데 그들 중에는 기원전 586년 예루살렘을 유린한 후 바빌론으로 강제 이주시킨 유대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기원전 539년 바빌론은 키루스 왕에 의해 점령된다.

키루스는 고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페르시아를 명실공히 강국으로 만들고 있는 키루스에게 걸림돌은 단 한 가지 거대한 성벽을 갖고 있는 바빌론이었다. 바빌론도 키루스의 야망을 알고 있으므로 성안에 수 년 동안 방어전에 견딜 수 있는 식량을 비축해 놓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빌론인들은 유프라테스강이 바빌론의 중심을 통과한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역사학자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키루스는 유프라테스강 상류에 운하를 파서 근접해 있던 습지로 물을 돌려 강의 수위를 낮추었다. 페르시아군은 강줄기를 따라 도시 중심부까지 진격했다. 당시 휴일이었으므로 바빌론인들은 페르시아군이 성 안으로 밀려들어올 때까지 그들의 공격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키루스는 다른 정복자들과는 달리 매우 관대하게 바빌론인들을 대우했다. 특히 그는 바빌론인들의 신인 마르둑의 숭배의식에도 참가하여 바빌론인들을 감격시켰다.

키루스가 고대사에서 우대받는 것은 유대인들을 고향인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내면서 솔로몬 왕의 성전을 재건하도록 했다는 점이다. 유대인들은 이런 상상할 수 없는 모든 일이 신의 권능에 의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더욱 유대인들을 감격시킨 것은 바빌론인들이 성전에서 약탈해 온 400개의 술잔들도 함께 가져갈 수 있도록 명령했다.

키루스가 유대인들을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낸 이유는 그 당시 강성한 활동을 보이고 있는 페니키아인들에게 공동으로 대항하기 위해서다. 바빌론은 521년 네부카드네자르 3세에 의해 또 다시 점령된다. 페르시아 제국의 왕인 다리우스가 그를 응징하려고 원정을 단행하고 바빌론을 포위했다. 헤로도토스는 바빌론이 함락되기까지의 과정이 매우 극적이라고 적었다.

페르시아 군이 바빌론 성에 도착하여 성을 포위 공격했지만 바빌론 인은 이 포위 공격에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그들은 성벽 위에서 손짓 발짓을 하며 야유와 조롱을 퍼부었다. 한 장병은 거기서 뭘 그렇게 멍청하게 보고 있냐? 빨리 꺼져. 네 놈들은 노새가 새끼를 낳기 전에는 우리를 정복할 수 없다.’고 말했다. 노새는 새끼를 낳을 수 없으므로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바빌론을 포위한 지 20개월이 지났는데도 정복되지 않자 다리우스도 안달이 났는데 조피르의 신변에 실로 불가사의한 일이 일어났다. 조피르의 집에서 식량을 운반하던 노새 한 마리가 새끼를 낳았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페니키아 쪽에 있는 시리아에서는 노새가 새끼를 낳는다고 기록했다. 조피르는 노새가 새끼를 낳기 전에는 바빌론의 성벽이 무너지지 않으리라는 말과 결부시켜 마침내 바빌론이 함락될 때가 도래했다고 결론을 내리고 다리우스에게 기가 막힌 계교를 제안한다.

그것은 네부카드네자르 3에게 자신이 위장 투항하겠다는 것이다. 그의 계교에 따라 다리우스 왕은 조피르를 가혹하게 문책한다. 채찍으로 온 몸을 맞고 코와 귀가 잘린 채 투옥된 조피르는 사전에 계획한대로 몰래 탈옥하여 네부카드네자르 3세에게 망명을 요청하면서 자신을 거의 죽음으로 몰고 간 잔인하기 짝이 없는 페르시아 인들에게 복수하겠다고 선서한다. 네부카드네자르 3세는 그의 위장 망명을 알지 못하고 그에게 신임의 표시로 두 성문을 지키도록 한다. 그가 다리우스의 군사에게 문을 열어 주고 성은 금세 함락되고 만다.

조피르는 그 후 바빌로니아 지방의 총독이 되었고 그 자식들도 대를 이어 총독이 되었다. 중국의 삼국지에나 있었을 법한 일이 고대 페르시아에서도 일어났던 모양이다.

바빌론의 영광은 점점 퇴조하여 다른 제국의 도시들인 쉬스, 아케메네스 왕조의 수도인 페르세폴리스와 함께 기원전 321알렉산더 대왕에게 점령된다. 알렉산더는 바빌론을 자신이 죽을 장소로 여길 만큼 중요시했으나 막상 기원전 323613일에 말라리아에 걸려 사망하자 바빌론의 영광은 급전직하한다.

그것은 기원전 312년에 셀레우코스가 동방의 권력을 잡고 티그리스 강가에 자신의 이름을 딴 셀레우코스라는 도시를 세우고 바빌론을 방치했기 때문이다. 바빌론의 중요도가 떨어졌지만 바빌론인들의 정신적인 지주였던 마르두크 의식은 중단되지 않고 거행되기도 했으나 바빌론의 거대한 건물들과 기념물들은 관리 부족으로 급격히 파괴되었다. 특히 건물의 재료가 벽돌인 점도 파손을 재촉한 요인이었다.

 

네브카드네자르와 왕비

바빌론의 공중정원이 다른 불가사의보다 더 유명해진 것은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불러 일으켰던 바벨탑과 로맨틱한 분위기를 갖고 있는 공중정원의 전설이 혼합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공중정원은 다른 불가사의처럼 인간을 압도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랑으로 이루어진 건물이라는데 더욱 매력이 있다. 천하의 영웅 알렉산더가 자신이 죽을 장소로 바빌론을 지목한 것도 이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공중정원이 세계7대 불가사의에 포함될 정도로 유명세를 타고 있지만 자료가 별로 없어 위치가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백지상태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바빌론에서 바벨탑을 발굴하는데 성공한 독일인 건축가이자 아마추어 고고학자인 로버트 콜데바이1899년부터 1917년까지 바빌론을 발굴할 때 디오도로스가 기술한 것을 근거로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성벽 안에서 공중정원의 위치를 찾아냈다고 발표했다.

그가 전문고고학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바빌론의 발굴에 거의 20여년이나 투신할 수 있었던 것은 선천적인 사교성과 남다른 설득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그는 후원자들로부터 19세기 말에 거의 200만 마르크(당시 400,000달러)를 모금했는데 이 속에는 독일의 빌헬름 2의 지원금은 포함되지 않은 액수다.

남다른 재주로 발굴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한 그는 바빌론의 폐허를 철저히 발굴하기 시작했다. 성과는 서서히 나타났다. 그는 네브카드네자르의 왕궁, 성벽, 이스타르문, 행렬의 거리, 유프라테스 강의 다리들은 물론 전설적인 바벨탑을 발견했다.

 

콜데바이가 그린 바빌론 발굴 현장

콜데바이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매우 유리한 조건에서 작업했기 때문이다. 설형문자가 해독된 상태였으므로 보관된 점토반이 바빌론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제공했다. 더구나 성경, 헤로도투스, 크테시아스 등이 적은 기록들도 남아있었으므로 현장과 자료를 비교하면서 최종적으로 각 유적지의 위치나 성격 등을 확정지을 수 있었다.

그는 이슈타르 문 근처에서, 커다란 벽돌 기둥으로 천장을 건설한 흔적을 발견하고 공중정원을 찾았다고 발표했다. 그가 지목한 공간은 궁정으로 둘러싸인 성곽으로 그 크기는 약42미터에 30미터가 되었으며 14개의 방과 복도가 있었다. 그 양쪽으로 궁륭으로 된 건축물이 있다는 것도 확인되어 이를 공중 정원에서 물을 퍼내는 지하 시설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벽돌에 방수를 위한 역청이 발려 있는 것이 확인되었으므로 그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었다. 그러나 이 공간은 디오도로스가 기술한 규모(120x120미터)에 비해 너무나 작고 또한 14개의 하부 공간이 식량 창고 또는 감옥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 추후에 밝혀져 공중정원이 아니라고 결론지었다.

 

공중정원 추정지

학자들은 대체로 추장의 언덕으로 불리는 텔아무란이븐알리를 공중정원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곳이 규모 등을 볼 때 공중정원에 대한 기록과 가장 일치하기 때문이지만 아직까지 학자들로부터 공인을 받은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