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7대 불가사의/아르테미스 신전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4)

Que sais 2021. 1. 21.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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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아르테미시아 여왕>

그리스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왕300명이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와의 장렬한 전투를 담은 300에 이어 나온 후속작이 2014년에 개봉된 300: 제국의 부활은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와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시아 여왕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영화다.

그리스를 침공한 다리우스 1세가 실패하자 그리스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던 아르테미시아가 아버지의 죽음으로 역시 복수심에 불타는 페르시아 왕 크세르크세스와 함께 또 다시 그리스를 침공하였으나 결국 실패한다는 것이다.

그리스와 페르시아 전쟁을 담은 두 영화 모두 흥행에 성공하여 할리우드를 놀라게 했는데 한국에서도 1편에서 292만 명, 2편에서 163만 명으로 준수한 관객을 동원했다고 평가되었다.

 

300 제국의 부활

물론 영화 속성상 페르시아 함대 사령관으로 나오는 아르테미시아에 대한 역사 왜곡은 비난을 받았다. 아르테미시아 여왕이 에페소스의 실존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역사와는 달리 어렸을 적에 그리스군의 침략을 받아 아버지는 살해당하고 어머니는 강간당해 죽는 걸 목격했으며, 자신도 유괴되었다고 나온다. 또한 노예선에 성노예로 몇 년이나 잡혀 있다가 길바닥에 죽도록 내버려진 것을 페르시아인이 구해 검술의 대가가 되었고 함대사령관이 된다고 설정했는데 이는 억지가 아닐 수 없다.

이 영화에 나오는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시아 여왕은 실화로 고대 역사에서 세계7대 불가사의인 공중정원의 설계자로도 알려지는 세미라미스와 마찬가지로 매우 유명한 여인 중 한 명이다. 그녀는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왕과의 대결로 유명한 살라미스 전투 때 페르시아 사령관의 한 명으로 참전한 것도 사실이다.

기록에는 그리스가 무려 50톤이나 나가는 충각을 단 유명한 3() 노 전함으로 페르시아 전함들을 들이받은 후 백병전을 벌이는 뛰어난 전술로 페르시아 군을 격파했는데, 이때 아르테미시아는 그리스 함대들에게서 쫓겨가면서 추적해오는 그리스 전함들에게 혼란을 주기 위해 페르시아 전함 하나와 고의적으로 부딪쳤다.

당연히 페르시아 전함은 수병들을 태운 채 가라앉았는데 그것을 본 크세르크세스왕은 아르테미시아가 그리스 전함을 격침시킨 줄 알고 주위를 향해 나의 남자 제독들은 여자가 돼버리고 나의 여자들이 남자가 되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네티즌 블루팩(BluePack)300: 제국의 부활에서 역사왜곡 10가지와 6가지 진실을 적었다.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시아 여왕을 비롯하여 당대의 정황을 나름대로 정리하였으므로 유명한 그리스와 페르시아 전투 등 당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먼저 역사왜곡을 적는다.

 

아테네는 공백

영화 초반부, 불타는 아테네를 배경으로 반나체로 울부짖는 여성이 있는데 이는 페르시아군이 아테네를 유린하면서 곳곳에서 학살이 자행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당시 대부분의 아테네인들은 테미스토클레스의 제안에 따라, 아테네를 떠나 함대와 함께 있었다. 아마도 극소수의 사람들이 남아있었을 가능성은 있지만 기본적으로 아테네는 공백이었다.

스파르타 함대

스파르타는 아테네와 달리 해군을 육성하지 않았으므로 설사 존재해도 몇 척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영화 줄거리의 일부를 구성하는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의 왕비인 고르고의 선상연설 등을 비롯한 대규모의 스파르타 함대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참고로 스파르타 함대펠레폰네소스 전쟁 즉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격돌할 때 페르시아의 지원을 받아 창설한다.

 

펠로폰네소의 전쟁시 아테네와 스파르타해군 격돌

페르시아의 전쟁의 이유

학자들은 페르시아 전쟁의 발발 책임은 페르시아만큼이나, 그리스 도시국가들에도 있다고 설명한다. 아테네는 이권을 노리고 소아시아의 반란을 지원한 적이 있다.

반면에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가 흙과 물을 바치라는 명령을 전달한 크세르크세스의 사절을 아테네는 재판에 회부해 처형하고, 스파르타는 우물에 던져 처형했다. 이 당시 흙과 물을 바친다는 것은 항복을 의미하는데 그리스 측에서는 끝까지 대항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한마디로 그리스의 민주주의가 페르시아에 위험하기 때문에 전쟁을 일으킨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마라톤 전투 당시 아테네군과 페르시아군의 병력

 

마라톤 필리피데스의 죽음

마라톤 전투 당시 아테네가 마주한 것은 페르시아의 전군이 아니었다. 마라톤 평원에 있던 페르시아 군은 아테네를 우회 공격하기 위해 절반은 승선하고 있었다. 따라서 현대의 학자들은 아테네군 11,000, 페르시아군 15,000명이 대치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즉 페르시아가 압도적인 군사를 투입했는데도 패배한 것이 아니라 아테네군도 페르시아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여건이었다.

다리우스의 화살 부상

영화에서는 다리우스가 테미스토클레스의 화살 공격을 받아 사망한다고 했지만 다리우스는 크세르크세스와는 달리 친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다리우스가 마라톤 평원에 있지 않았다. 다리우스는 이집트의 반란을 진압하던 중, 질병으로 사망했다.

아테네의 민회의 개최지

영화에서 아테네인들이 테르모필레의 패배 소식을 듣고, 민회를 여는 장면이 나온다. 장소 자체도 신전으로 보이는데 아테네의 민회는 신전이 있는 아크로폴리스에 개최되지 않았다. 민회는 탁 트인 공간인 프닉스 언덕에서 개최되었다. 실제로 그리스의 민주주의가 작동된 공간은 파르테논 신전이 있는 아크로폴리스가 아니라 아고라, 프닉스 언덕이었다.

차별되는 그리스의 농민들의 군대

테미스토클레스가 작은 승리 이후, 농민들로 이루어진 군대가 이만큼이나 했다며 칭찬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우선 과거에는 현대와 같은 상비군이 없었다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농민들도 소집에 응해 전투에 참여한 것은 사실로 보인다. 반면에 그리스인에 있던 상당수에 노예들은 기본적으로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노예들은 전투에 참가할 자격이 없었다.

해전의 주역

영화에서 창과 방패를 갖추고, 배와 배 사이를 뛰어다니며 중장보병들이 백병전을 벌인다. 그러나 이런 화려한 영상은 감독이 관객의 눈요기를 주기 위한 영화적 장치로 인식한다.

당대의 해전은 주로 뱃머리에 달린 청동 충각으로 적의 배를 침몰, 파손시키는 것이다. 물론 로마는 보딩 즉 배를 접근시켜 월선한 후 백병전으로 적군을 제압했는데 이는 로마의 해전 전투가 충각전투에서 변경되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 조선은 판옥선으로 일본과 맞섰는데 이때 일본은 보딩 전법으로 백병전을 기본으로 했다. 그러나 조선은 백병전을 피하여 일본군이 배에 오르지 못하게 했다. 이유는 조선의 판옥선이 일본 배보다 거대하고 튼튼한데다 일본의 접근전을 원천으로 봉쇄했다. 거북선 지붕에 철심을 꼽았다는 것도 이런 연유다.

참고로,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전투 때 그리스의 노잡이로 복무한 사람들은 아테네의 하층시민들인 테테스들이다. 전후, 아테네의 해상패권이 확대되며, 이들은 합당한 권리를 요구하였고 결국 이들에게도 권리가 주어진다. 이로서 진정한 의미의 아테네 민주주의가 시작되었다고 설명한다.

고르고의 슬픔

테미스토클레스가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스파르타를 찾아간다. 고르고는 슬퍼하며 남편 레오니다스의 희생만으로도 충분한 것 아니냐며 테미스토클레스의 제안을 거부한다. 그런데 이 장면은 스파르타를 묘사한 것은 아니다. 당시에 스파르타 여성들은 남자와 다름없이 강건했다. 더구나 고르고는 그냥 스파르타 여성이 아니고 스파르타의 왕비로 스파르타 왕비의 기개답게 울지 않았을 것이라는 뜻이다.

살라미스 해전의 이유.

 

살라미스해전

역사를 보면 영화의 내용과 정확히 반대다. 역사에서 아르테미시아는 그리스인들의 내분을 기다려야 한다고 조언하지만 크세르크세스가 이를 무시하고 공격을 지시한다. 학자들은 당시 페르시아군이 기다리기만 해도, 승리할 수 있었다고 추정한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고, 무엇보다 그리스군은 비축해 둔 군량과 물자가 떨어지고 있었다. 더구나 그리스군은 연합군이므로 장기간 결속력을 유지하기 힘들었는데 크세르크세스의 조급함이 결국 패전의 길로 들어갔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