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7대 불가사의/아르테미스 신전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3)

Que sais 2021. 1. 21.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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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피난처>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이 당대에 가장 유명한 신전으로 자리매김 하는 데는 두 가지 요인이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아르테미스 신전이 당대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인간들의 최후의 피난처(Asylum)로 인식되었다는 점이다.

당시 최강국이었던 페르시아인들이 도시를 공격하자 주민들은 신전으로 달려갔다. 예로부터 에페소스인들은 신전의 기둥에 자신을 매고 성역이다라고 외치기만 하면 모두 구원될 수 있었다. 놀랍게도 페르시아인들도 이 여신을 존경하여 신전으로 피신한 사람들을 해치지 않았다. 아르테미스 신전에 들어가기만 하면 어느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신성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에페소스에는 아르테미스 신전을 인간들의 최후의 피난처(Asylum)규정한 법이 있었는데 이것은 에페소스 신전에 들어오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차별하지 말고 받아주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대인들은 신전에 들어오는 인간을 포함한 동물과 물고기, 새들도 신성한 곳에 거주하는 특별 존재로 대우를 받았다.

이런 페르시아의 행동은 나중에 보상을 받았다.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가 그리스에게 패한 후 자기 아이들을 아르테미스 신전에 보냈을 때 아르테미시아 여왕이 그들을 보호해 주었다.

물론 아르테미스신전이 언제나 절대의 도피처였던 것은 아니다. 알렉산더 대왕 때 대왕의 노예 두 명이 아르테미스 신전으로 도망치자 알렉산더는 대신관에게 정중하게 그들을 인도해달라고 요청했다. 대신관은 아르테미스 신전이 성역임을 알려주면서 보다 정중하게 거절했다.

 

노트르담의 곱추

자신의 말이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린 알렉산더는 신전으로 곧바로 쳐들어가 강제로 노예 두 명을 끌어내 돌로 쳐 죽였다. 알렉산더가 정복자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했지만 그가 요절한 것은 신전을 모욕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로마의 안토니우스도 대신관을 협박하여 클레오파트라의 자매아르시노에를 신전에서 몰아내었다. 이와 같은 몇몇 예외가 있기는 하나 전반적으로 아르테미스 신전이 성역이라는 것은 항상 지켜졌고 또 보호를 받았다.

아르테미스 신전이 왕위에서 쫓겨난 사람들의 합법적인 망명의 장소였을 뿐만 아니라 범인이나 탈주자들도 모두 보호해주었다는 것은 역으로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느냐이다.

한마디로 이들에 대한 모든 편의를 어떻게 부담하느냐인데 이는 신전의 재정이 튼튼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전이 성역으로 버틸수 있는 자금이 확보되어야 하는데 이의 해답은 간단하다.

우선 신전은 제도권과는 다소 다르다. 왕이나 고위직에 있던 사람들의 경우 잘 나갈 때는 문제가 없지만 하루가 달리 반역과 전쟁이 일어나는 사태에서 나름대로 보험을 들어야한다. 이 말은 고대 세계에서 최고 집권자들이 언제 퇴출될지 모르므로 절대적인 피신처를 찾아야하는데 아르테미스와 같은 신전이 최고였다. 수많은 지도자들이 일단 보험을 들기 위해 엄청난 재물을 희사했을 것임은 틀림없다는 뜻이다. 특히 에페소스 사람들은 신전 건축자금을 기부한 사람의 이름을 현판에 새겨주는 아이디어도 채택하여 헌금이 끊이지를 않았다.

 

아르테미스 신전의 동전

더불어 아르테미스 신전이 워낙 유명하므로 공양물, 기부금 등이 엄청났다는 점도 한 몫 했지만 당시 신전은 대부분 거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또 임대했으므로 이들로부터 걷어들이는 세금이 만만치 않았다. 더구나 몇몇 신전은 동전을 주조할 권한도 있었다.

또한 당대 신전이 튼튼한 재원을 기반으로 하는 은행 역할을 충실히 했다.

신전의 승려들은 이자를 계산하고 중계에 대한 수수료를 정하고 교환하는데 아주 숙달되어 있었다. 아르테미스 신전은 이오니아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은행이므로 인근의 왕이나 지방의 관리는 물론 부유한 사람들이 주로 예금했다.

신전에서 돈을 빌렸으므로 갚지 않을 사람이 없는데다 신에 관계되는 물건들도 판매하여 신전은 당대에 가장 부유한 재벌이라 볼 수 있다. 이자의 지급일여신의 생일로 학자들은 그 날짜를 525일경으로 추정한다

신전이 은행역할을 했다는 것은 성경에도 나온다.

예수가 환전상과 충돌한 곳도 예루살렘 신전 내로 신전의 은행 역할은 이집트, 그리스, 로마에서도 마찬가지다. 당시 유대교의 경우 매년 의무적으로 신전세를 내야했는데 유월절에 예루살렘을 찾아 신전세를 내지 못하는 경우 자신의 몸값을 조달할 의무가 있었다.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모든 유대인 공동체에는 이 돈을 거두어들이는 창구가 있었으며 이들이 거둬들인 자금은 대은행인 예루살렘 신전으로 수송되었다.

그런데 신전은 이렇게 모아들인 것 중에서 값나가는 것을 모두 진열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하면 ()으로 바꾸었다. 금고에 비축된 돈은 그 일부에 불과하여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었다. 델로스 신전은 기원전 5세기부터 기원전 2세기까지 5년 간 10퍼센트의 이자를 받았다. 이는 상당히 저렴한 이율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정부에게 전쟁비용이나 함대 건조용 등으로 대출도 해 주었다. 특히 그리스의 올림피아 신전올림픽으로 유명하지만 이 신전은 전쟁에서 획득한 전리품의 10%를 거둬들였다. 아테네의 경우도 이율이 특별히 낮아 약 6퍼센트였고 국가의 존망이 걸린 중요한 전쟁은 12퍼센트로 할인했다. 이런 이율은 당대 시장의 이율의 반 혹은 10분의 1에 해당한다.

아르테미스 신전은 동양과 서양의 통상 관계를 위한 통화 교환장소인데다 워낙 명성이 높아 도시와 왕들이 잉여 현금을 맡기는데 최적의 장소였다. 아르테미스 신전은 예금 업무 영역에서 신용이 좋아 특별히 인기가 있었는데 신전의 이율7.58.5퍼센트로 알려진다

 

<카니발의 원전>

거의 모든 신전은 매년 신을 모시는 행사를 주관했다.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은 다른 지역의 신전과 달리 아주 오래 전인 기원전 2000년경부터 아르테미스 여신을 숭배하는 거창한 행사를 정규적으로 개최했다.

로마의 카이우스 비비우스 사루타리우스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아르테미스 신전에서 매년 열리는 행진과 의식에 참여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돈을 융자해 주었고 이자는 일 년에 9%였다. 신전의 승려들은 이자를 계산하고 중계에 대한 수수료를 정하고 교환하는데 아주 숙달되어 있었다. 자금이 많은 사람들은 신전에다 돈을 맡기고 이자를 받았다.’

 

거의 모든 신전이 신전을 홍보하기 위한 일환으로 매년 신을 모시는 행사를 주관했는데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은 다른 지역과는 급이 달랐다. 한마디로 차원이 다른 거창한 행사를 정규적으로 열었는데 신전에서 매년 열리는 축제에 꼭 필요한 연주단들도 관리했다.

 

구 에페소스 아르테미스 신전 잔해

아르테미스 신전의 청동 나팔을 잘 부는 합창대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여 수많은 음악가들이 에페소스를 찾았다. 아르테미스 신전을 방문한 음악가들은 방문 기념으로 자신이 만든 악기를 신전에 걸어 놓기도 했다.

아르테미스 여신을 숭배하는 행사는 현재의 카니발과 같다. 우선 축제는 축제의 춤을 찬양한다. 칼리마코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든 사람들아. 해마다 추는 아르테미스의 춤을 멈추지 말라.’

 

축제는 약 한 달 간 계속되는데 에페소스의 관리나 노인들은 전망 좋은 곳에 앉아 구경하였고 도시의 모든 젊은이들이 참석하는데 청년들은 온 몸을 치장하고 젊은 여자들은 매력 있는 모습으로 신전 주위에서 춤을 추었다.

신전 주위에서의 춤이 끝나면 신전의 승려들은 가장 좋은 옷을 입고 황금으로 입술을 칠한 호화로운 아르테미스 여신의 조각상을 들고 거리를 행진한다. 이들이 행진하는 도로에는 도시의 부유한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아케이드가 설치되었는데 아케이드의 지붕에는 화려한 천을 씌워 비가 오더라도 여신과 행렬에 참석한 사람들은 비를 맞지 않았다.

사실상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는 요즈음도 마리아 조상이나 십자가를 들고 특정한 날에 행진을 하거나 민속 축제를 벌이는데 학자들은 이들 행진과 축제의 기원이 에페소스라고 추정하기도 한다.